월드컵과 정치

 

김인식

축구는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3대 프로 축구 리그인 프리미어 리그(영국), 세리아A(이탈리아), 프리메라 리가(스페인)를 보며 열광한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는 연인원 3백10억 명이 TV를 통해 월드컵 경기를 시청했다.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것은 축구를 보며 다소간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장에서는 우리의 삶에서 좀체 경험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진다.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전 세계를 유린하는 미국이 월드컵에서 아프리카의 약소국들(카메룬, 나이지리아, 세네갈 등)에 패배할 수 있다. 또, 전반전 내내 고전하던 팀이 후반전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을 때 많은 사람들은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또, 빈민가 출신의 스타 플레이어들(펠레, 마라도나, 호나우두 등)은 많은 사람들에게 대리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기 때문에 축구는 흔히 지배자들의 유용한 지배 수단으로 이용되곤 했다. 고대 로마의 지배자들이 콜로세움(노천 원형 극장)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음식과 오락을 제공해 대중의 불만을 달랬던 것처럼 말이다.

언뜻 보기에 김대중의 숨통을 바짝 죄고 있는 권력 기관들의 부정 부패와 월드컵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에게는 이 둘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김대중은 월드컵에 대한 열광이 권력 기관들의 부패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누그러뜨려 주기를 바란다. 그 때문에 권력 기관들의 부패에 대해 세 번이나 “죄송하다”며 고개 숙였던 1월 14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은 “한국 월드컵 팀이 이번만은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월드컵의 창시자 줄 리메는 “축구야말로 계급이나 인종의 구분 없이 모두를 한 마음으로 만들어 세계를 행복한 한 가족으로 단합시켜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월드컵의 역사는 각국 지배자들이 월드컵을 억압  수단으로 적극 활용해 왔음을 보여 준다.   1962년 칠레의 호르헤 알레한드라 정권은 경제 위기가 낳은 인플레와 생활 수준 하락에 반발하는 격렬한 파업을 무마하는 데 월드컵을 이용했다. 1966년 영국의 해럴드 윌슨 노동당 정부는 출범한 지 2년도 안 돼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직면했다. 윌슨 정부는 국민들이 온통 자국의 월드컵 우승에 관심이 쏠리는 틈을 타 임금을 동결했다. 윌슨은 자국의 승리 군단을 대중적 분노의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는 1978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월드컵을 국제적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적극 이용했다. 군사 정부는 아르헨티나의 우승이 군부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승부 조작까지 했다. 군사 정부가 준결승전에서 페루를 매수해 아르헨티나는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었고 결국 우승했다. 펠레는 월드컵이 이렇게 억압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에 항의해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끝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71년쯤 해서 나는 조국의 실정에 대해 진실의 일부나마 알게 됐습니다. 고문, 살인, 실종 등. 나는 군부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은 브라질 대표 유니폼을 입고 싶지 않았습니다.”월드컵은 국가 대항전이다. 각국 지배자들은 월드컵을 이용해 “국민적 단결”을 호소하고 민족주의(국가주의)를 부추기려 애쓴다. 그 때문에 월드컵은 종종 국가 간 경쟁과 폭력으로 얼룩지곤 했다. 제1회 월드컵은 1930년에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열렸다. 결승전에서 홈팀인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와 이겼다. 몬테비데오에서는 며칠 동안 우승을 자축하는 축제가 벌어졌다. 그러나 국경 너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아르헨티나인들이 도로로 뛰쳐 나가 우루과이 영사관에 돌을 던졌다. 그 때문에 두 나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됐다. 1969년 멕시코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서 맞붙은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경기는 경기장 밖 전쟁(5일 전쟁)으로 번져 수천 명이 사망했다. 지배자들이 부추기는 월드컵 광기는 개인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자살골을 넣은 콜롬비아 수비수 에스코바르는 월드컵이 끝난 후 메데인 교외 라스 팔마스의 한 레스토랑에서 나오다 총알 세례를 받았다.  

 

FIFA, 월드컵, 다국적 기업

월드컵을 주관하는 국제축구연맹(FIFA)은 추악한 협잡꾼들의 사교장이다. 24년 동안(1974-1998년) FIFA를 지배한 주앙 아벨란제는 FIFA 역사상 유례 없는 금권 선거를 통해 회장에 당선됐다. 아벨란제는 파시즘과 군부 독재에 매우 관대했다. 그는 1936년에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그 때 독일에서 보낸 시간은 유익했고,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벨란제는 제3세계의 본선 진출 확대를 미끼로 제3세계 나라들이 1980년 올림픽위원회 선거에서 사마란치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사마란치는 십대 때부터 파시즘 운동에 가담했던 파시스트였다. 이 자는 1975년 스페인의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36년간 그 정권에 충성했다. 1978년에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날)가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에 항의해 월드컵 개최지 변경을 요구했을 때 아벨란제는 냉담하게 거부했다. 아벨란제는 포르투갈의 독재자 안토니우 살라자르 정권의 재무장관이었던 루이스 핀투가 국고에서 횡령한 자금으로 설립한 회사인 오르벡의 이사이기도 했다. 이 회사는 볼리비아의 우고 반세르 군사 정권과 결탁했다. 현 FIFA 회장인 제프 블래터는 아벨란제의 정신적 상속자다. 블래터는 “현 상태의 유지와 지속”을 약속했다. 달리 말해, 전임자 아벨란제의 추악한 방식을 계승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축구는 스포츠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애초에 축구는 미래의  은행가, 공장 소유자, 제국 행정관이 될 청년들의 스포츠였다. 이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자치 능력, 독창성, 자기 규율이 요구됐다. 축구가 대중 스포츠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는 19세기 후반이었다. 초기 영국 축구 팀들은 새로운 도시 노동 계급 거주지에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던 교회들이 주도해 만들었다. 축구 팀의 4분의 1이 교회와 관련돼 있었다. 산업 자본가들은 축구의 이점을 재빠르게 간파했다. 19세기 중엽부터 자본가들은 산업혁명기의 착취 방식에서 탈피해 점점 더 (반)숙련 노동을 필요로 했다. 이를 위해 얼마간의 교육과 적절한 식사와 여가를 노동자들에게 제공해야 했다. 토요일 오후 휴무는 대중 스포츠의 길을 열었다. 축구가 상류층에서 노동 계급으로 확산된 것은 “모범적인” 노동 계급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용주들은 축구 등의 스포츠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노동에 적합한 규율을 부과하고 싶어했다. 그 결과, 아스날 팀은 울리지의 로얄 아스날(왕립 병기 창고) 노동자들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은 랭커셔와 요크셔 철도 노동자들로, 웨스트 햄 유나이트 팀은 탬즈 철강 노동자들로 구성됐다. 오늘날 축구는 수많은 사람들이 즐기기 때문에 거대한 사업이 됐다. 이것은 축구가 철저하게 자본의 이해 관계에 따라 운영된다는 점을 뜻한다. 노동자들이 축구를 즐기고 때때로 경기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축구는 언제나 자본가  계급이 통제하고 지시하는 프로 스포츠다.

월드컵은 단순한 축구 경기가 아니라 거대한 상품이다. FIFA는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국 가운데 하나인 일본의 다국적 기업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JVC, 후지, 캐논은 1994년 미국 월드컵의 공식 후원 업체들이다. 소니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 때 마케팅 독점권을 따냈고, 덴쯔는 국제스포츠레저(ISL) 주식의 49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 ISL은 월드컵의 마케팅과 중계권을 독점 대행하는 업체로서, 다국적 기업인 아디다스가 FIFA와 밀실 거래를 해 설립했다. 코카콜라는 월드컵 2002와 월드컵 2006의 청량 음료 스폰서가 되는 특권으로 10년 동안 1억 달러(약 1천3백억 원)를 지급했다. 아디다스는 10년 동안 1억 달러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FIFA와 계약을 맺었다. FIFA는 그 대가로 심판복에 아디다스의 삼색선 상표를 부착하게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도 다국적 기업들이 협찬하고 있다. 아디다스, 후지 제록스, 버드와이저, 질레트, 마스터 카드, 필립스, 맥도날드, 아바야, 후지 필름, 야후, 도시바, KT, 현대자동차. 월드컵 브랜드 독점권으로 공식 협찬사가 지급한 평균 액수는 4천만 달러(약 5백20억 원)다.

이들 기업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축구 규정을 바꾸고 경기 수를 늘린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방송국들은 0대 0 무승부가 되면 국내 시청자들이 TV 시청을 외면할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더 많은 골이 터질 수 있도록 골대 크기를 늘렸다. 심지어 광고주들의 광고 시간을 늘리기 위해 전후반 경기를 4쿼터 경기로 바꾸자는 제안도 나왔다. 공식 협찬사들의 이윤을 위해 월드컵 출전국 수가 확대됐다. 애초 16개 국이던 본선 진출국 수가 지금은 32개 국으로 늘어났다. 경기가 많아지면 기업체들의 광고 시간이 늘어나 공식 후원사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지겠지만, 선수들은 부상의 악몽에 시달린다. 많은 경기를 치러야 하므로 그만큼 부상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축구 스타 호나우두(브라질)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무릎 부상인데도 경기를 뛰어야 했다. 호나우두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지만, 나이키와 맺은 계약 조건 때문에 그라운드에서 몽유병 환자처럼 어슬렁거려야 했다. 호나우두는 그 후유증으로 3년 동안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때 선수들은 37도까지 오르는 찜통 더위 속에서 경기를 치렀다. 미군의 훈련 교범조차 기온이 30도가 넘으면 훈련 중지를 권고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멕시코 월드컵위원회는 유럽 텔레비전 방송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선수들을 희생시켰다. 축구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월드컵은 뇌물, 승부 조작, 판정 시비, 다국적 기업들의 돈벌이, 마약 밀매, 경기장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노동자들은 멋진 축구 경기에 열광하다가도 월드컵의 추악한 실상에 환멸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월드컵에 매료되는 노동자들의 정서를 이해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지배자들이 월드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에 맞서야 한다. 지배자들이 노동 계급의 영혼을 사로잡기 위해 이용하는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훌리건

 

‘안전한’ 월드컵을 위해 경기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훌리건을 철저하게 단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배자들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훌리건을 마녀사냥한다. 대부분의 훌리건은 실업자나 노동 계급 사람들이다. 비통한 삶에 대한 분노가 경기장 난동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훌리건이라는 용어도 1960년대 초 영국 보수당 정권 하에서 사회복지 축소, 빈부격차 심화에 반발한 실업자와 빈민들이 축구장에서 울분을 터뜨리며 난동을 부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비롯했다. 폭력은 때로 인종주의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배자들은 늘상 “우리”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주범이 “다른” 나라나 “다른” 인종이라고 떠들어 댄다. 월드컵이나 국제 대회 같은 국가 간 대항전 때 언론들은 “우리” 팀이 상대 팀을 무찔러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러다 보니 패배한 팀의 응원단들은 상대 팀 응원단들에게 폭력을 휘둘러 분풀이한다. 따라서 지배자들이 훌리건의 경기장 폭력을 비난하는 것은 순전한 위선이다. 지배자들은 단지 비난만 하는 게 아니라 때로 더 커다란 폭력으로 대응한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경기장 폭력을 막는다는 구실로 경기장 밖에 탱크를 대기해 놓았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 영국과 네덜란드 경기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6천 명의 경찰을 투입해 수많은 사람들을 짓뭉개 버렸다. 그러나 경기장 난동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는 영국과 튀니지가 맞붙은 마르세이유와, 독일과 유고슬라비아가 겨룬 랑스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훌리건의 경기장 난동은 가난한 사람들의 억눌리고 소외된 현실을 왜곡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물론 훌리건의 난동이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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