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스는 마르크스 추도사에서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혁명가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왜 ‘혁명’인가?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혁명’은 어떤 것인가?

혁명은 위험한 사건이다. 혁명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특히 노동자들이 죽는다. 그리고 혁명은 잘못되기 십상이다 ―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혁명, 중국 혁명의 결과를 보라.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고, 결국은 혁명 전과 비슷하거나 더 악독한 폭정 체제가 들어섰다. 게다가,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여러분이 실제로 만나는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전혀 혁명적이지 않다. 그들은 혁명보다 TV나 월드컵에 관심이 더 많다.

그렇다면 체제를 조금씩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 노동조합과 의회 활동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높이고 노동자들에게 이로운 개혁들을 쟁취하는 것 ― 이 분명히 더 낫고 더 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결국 사회주의에 도달하겠지만, 설사 사회주의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상황을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면 이런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내가 보기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온건한’ 정치인들과 노조 지도자들을 지지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혁명적 투쟁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약속했다.

프랑스·러시아 혁명의 역사와 다른 혁명들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은 분명히 이 논쟁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여기서 그것을 다 다룰 수는 없고, 이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 자신의 대답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겠다. 마르크스는 1845년에 쓴 글에서 그 대답을 간단히 이렇게 요약했다.

“그러므로 이 혁명이 꼭 필요한 이유는 지배계급을 전복할 다른 방법이 없을 뿐 아니라 지배계급을 전복하는 계급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낡은 사회의 오물을 떨어버리고 새 사회에 맞게 스스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다른 많은 문장과 마찬가지로 이 문장도 여러 가지 심오한 사상을 한데 포함하고 있고, 따라서 상세한 고찰과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지적할 것은 맑스가 혁명가가 된 것이 그의 조급한 성질이나 쓰라린 심정 때문에 또는 그가 폭력이나 자극적인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즉, 근본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경제적이기도 하고 정치적이기도 하다.

전복

자본주의의 동역학은 착취를 바탕으로 한 자본 축적 드라이브 때문에 개별 기업이나 국가가 다른 기업이나 국가와 경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축적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때는, 다시 말해 경제가 성장하고 이윤이 높을 때는 (아래로부터 압력을 받아)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개혁 조처들이 시행될 수 있다. 단, 축적의 핵심 메커니즘이 위협받지 않는 조건에서만 그럴 수 있다. 따라서 가장 순조로운 이 시나리오에서도, 개혁은 부자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조각들이 노동자들에게 더 많이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반면에, 노동자들과 부자들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사회에서 자본가들의 권력은 더 강화된다.

축적이 난관에 부딪히고 이윤이 낮아지면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공격하고 과거에 허용했던 개혁들을 도로 빼앗아가려 한다. 개혁을 위한 투쟁은 ― 물론 그 투쟁은 당연히 해야 한다 ― 시시포스의 노동이나 마찬가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는 언덕 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고 그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다시 밀어 올리는 일을 영원히 계속하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점진적 개혁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면, 사회주의 정부를 선출해 전반적 사회 변혁에 헌신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가? 분명히 그것은 적어도 평화적인 방법이 아닌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이 여러 차례 보여 주었듯이, 그런 위협에 직면한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의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이용해 그 사회주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좌초시키고 파괴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할 것이다.

그들은 환투기를 감행하고, 투자 ‘파업’을 일으키고, 공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그래서 심각한 경제 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국가기구 ― 결코 중립적이지 않고 수많은 끈으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묶여 있는 ― 를 이용해서 입법 활동과 정부 기능을 마비시킬 것이고, 무엇보다도 군사 쿠데타나 파시스트 쿠데타의 형태로 무력을 사용할 것이다.

노동계급이 이런 공세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독자적인 힘을 사용해서 공장과 작업장 들을 점거하고 기존 국가기구를 분쇄하고 사회 전체를 통제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정부 선출은 혁명의 필요성을 결코 없애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혁명의 전주곡이 되거나 아니면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혁명적 관점을 가진 노동자들의 조직된 기구, 즉 혁명정당이 운동 안에 존재하지 않으면 이런 대결에서 성공할 가망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물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이 모든 것이 공상이라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노동계급은 체제에 의해 너무 많이 세뇌당해 있기 때문에 결코 혁명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답은 마르크스 인용문의 두번째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체제가 미디어·교육 등을 이용해 노동자들의 머릿속을 반동적 사상 ― 국수주의, 인종차별, (여)성차별, 순종,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 등 ― 으로 가득 채운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그런 반동적 사상을 “낡은 사회의 오물”이라고 불렀다.

흔히, 혁명이 일어나려면 먼저 대다수 사람들이 혁명적 사상을 확신해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혁명은 노동자들의 압도 다수가 투쟁 ― 보통 특정 쟁점을 둘러싼 투쟁이나 특정 정권에 반대하는 투쟁 ― 에 참가할 때 자생적으로 시작된다. 이런 혁명적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 대중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집단적 힘을 자각하기 때문에 오랜 편견과 환상을 스스로 떨쳐내고 혁명적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 때문에 혁명은 필요하기도 하고 가능하기도 한 것이다.


영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존 몰리뉴의 ‘실천가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입문’을 격주로 연재한다.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