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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투자협정 - 또 다른 신자유주의적 공격

한미투자협정 - 또 다른 신자유주의적 공격

강철구

1월 20일에 재경부장관 진념은 “한미투자협정을 올 상반기 중으로 마무리짓겠다.” 하고 말했다. 김대중은 집권 초인 1998년 미국에 한미투자협정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의 까다로운 요구 조건으로 협상은 지연됐다. 핵심 쟁점은 스크린쿼터제(한국 영화 의무상영제)였다. 미국은 스크린쿼터제 폐지 없이는 한미투자협정을 체결할 수 없다고 압력을 넣었다. 한미투자협정을 체결하겠다는 것은 스크린쿼터제를 축소 또는 폐지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인과 시민단체 들은 즉각 반발했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는 스크린쿼터제는 “헐리우드 영화의 독점에 대응, 문화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에 존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발에 직면해 김대중 정부는 스크린쿼터제의 축소·폐지를 유보하겠다며 한발 물러났다. 그러나 부시는 방한 기간 동안 한미투자협정 체결을 압박할 것이다. 미국은 WTO를 통해 밀어붙이기 힘들거나 지연되는 사안들을 양자간 투자협정을 내세워 관철하려 한다. 미국은 지난 10년 간 40개 국가와 투자협정을 체결했다. 한미투자협정도 애초에는 1994년에 미국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WTO 같은 기구들과 양자간 투자협정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수단이다. 양자간 투자협정을 통해 미국의 대기업들은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그러나 상대국 민중이 치른 대가는 혹독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멕시코 민중의 삶을 빈곤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1994년에만 84만 명의 농민들이 농촌을 떠났고 수많은 실업자가 생겼다. 미국 기업들은 노동 기본권을 짓밟았고, 환경과 사회복지 서비스를 파괴했다. 미국 지배자들은 라틴 아메리카 민중이 겪은 고통을 이제 한국 민중에게 강요하고 있다. 한미투자협정은 미국 자본의 권리헌장이다. 미국이 제시한 표준안 6조에는 “의무이행 강제의 금지 조항”이 있다. 이것은 노동 기본권, 환경, 보건, 사회복지, 안전기준 등 모든 “의무이행” 규제를 없애라는 것이다. 1월 중순 한국을 방문한 미국 무역대표부 부대표 존 헌츠만 일행은 노골적으로 “한국의 대폭적 시장개방”을 주문했다. “유전자조작식품에 대한 표시제를 완화하라, 승용형 디젤차의 까다로운 환경규제를 완화하라, 스크린쿼터제를 축소하라 ….”미국은 의료·교육·통신을 포함해 모든 것들을 다국적 기업이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려 한다. 사기업화와 개방화가 이뤄지면 노인 복지 차원에서 시행돼 온 경로 우대 등의 할인 혜택이 폐지될 것이다. 외딴 섬이나 벽지의 전화와 통신은 내팽개쳐질 것이다. 교육과 의료에 대한 최소한의 국가 보조금은 “시장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치급될 것이다. 농가 보조금은 “자유 무역”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삭감될 것이다. 환자들에게 의약품을 값싸게 공급하려는 시도는 “지적 재산권 침해”라는 이유로 좌절될 것이다.

좌절

김대중은 외자 유치를 위해서 한미투자협정을 서둘러 체결하려 한다. 김대중은 외자 유치가 돼야 고용이 늘어난다는 되지도 않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한미투자협정은 미국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로 채워져 있다. 투자협정은 ‘투자’의 개념을 단기 수익과 배당금을 위해 주식과 채권을 매매하는 단기성 투기에까지 확대 적용한다. 그렇게 되면 투기성 단기 자본을 규제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진다. 외국인 투자자 보호는 국제 투기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보장을 뜻하게 된다. 그리 되면 경제는 급격하게 불안정해질 것이다. 한미투자협정에 따르면, 다국적 기업이 국내에 투자를 하더라도 기술을 이전할 의무가 없다. 내국인을 고용할 의무도 없다. 투자 수익을 자유롭게 해외로 송금할 수 있어 국내에 재투자를 할 이유도 없게 된다. 그런데도 정부는 해외 투자 유치를 위해 각종 세금을 감면해 주고, 저가의 부지 임대를 보장해 주려 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노동권을 침해하고 환경을 파괴해도 제재를 받지 않는다. 제재를 받을 경우에는 오히려 투자와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외국인 투자자가 정부를 국제 분쟁 해결 기구에 제소할 수 있다. 한미투자협정은 미국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들과 같은 물에서 함께 놀고 싶어하는 국내 재벌들의 이익을 위해 한국 민중의 삶을 희생시킬 것이다.

“자유 무역”이라는 허울 아래 환경과 기초적인 사회복지 시스템이 망가지고 한국 민중의 생활 수준이 더 하락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국내외 자본가들의 탐욕이 우리의 미래를 갉아먹지 못하도록 한미투자협정을 좌절시켜야 한다.

세계화,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스크린쿼터제

최근 몇 년간 성장하고 있는 반자본주의 운동은 세계화가 문화에 끼친 해악들을 폭로해 왔다. 52개국의 3백여 문화단체들이 참가하는 ‘문화 다양성을 위한 국제 네트워크’는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문화의 획일성을 강요하는 것에 반발했다. 이 단체는 한국에서 헐리우드 이외의 국내 영화가 많이 상영되는 것을 보고 스크린쿼터제를 주목했다.

물론 스크린쿼터제가 시행된다 해서 자동으로 관객이 좋은 영화를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자본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창의적이고 다양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상영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스크린쿼터제가 폐지돼 헐리우드 영화가 국내 영화 시장을 독점하게 되면 관객의 선택은 더 제약될 것이다. 반자본주의 활동가들은 스크린쿼터제 사수 투쟁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 이 투쟁을 지지한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 영화만을 봐야 한다는 편협한 민족주의로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꼭 ‘문화적 분리주의’나 ‘토착 문화’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문화는 국경을 초월해 서로 융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전 세계 영화의 85퍼센트를 독점하고 있는 헐리우드의 대자본들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문화적 다양성을 공격하고 있다. 세계의 영화를 자기 입맛대로 획일화시키는 헐리우드 영화 자본의 횡포와 압력을 막을 수 있는 규제는 필요하다. 스크린쿼터제 사수 투쟁을 지지하는 것은 오만한 미국 정부를 앞세운 헐리우드 자본의 압력에 저항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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