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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평준화 해제 - 가진 자들만의 권리 찾기

고교 평준화 해제 - 가진 자들만의 권리 찾기

김성보

지난 2월 14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고교 평준화 해제, 고교 등급제 실시, 대학교 기부금 입학제 실시를 골자로 한 ‘비전 2011’을 청와대에 보고했다. KDI의 ‘비전 2011’은 진념 경제부총리가 1월 31일 밀레니엄 포럼에서 “차라리 일제 시대의 교육 체계가 지금보다 나았던 것 같다”며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 폐지와 자립형 사립학교 확대를 주장했던 것과 동일선상에 있다. KDI와 진념 부총리의 발언은 공교육의 기본 이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KDI와 경제부처의 교육관은 일관돼 있다. 교육을 시장에 내맡겨 국가의 교육비 부담을 노동자에게 떠넘기고, 소수 엘리트에게만 교육 재정을 투자한다는 것이다.

‘비전 2011’에는 16개 국책기관이 참여했으나 한국교육개발원을 비롯한 교육 관련 기관이나 단체는 제외됐다. 경제적 논리로 만들어진 교육 계획은 교육의 비전이 될 수 없다.

고교 평준화를 깎아내리는 우익들

진념 부총리는 강남의 부동산 투기 열풍이 수도권의 고교 평준화 정책 탓이라고 주장했다. 평준화로 ‘수준별’ 교육을 시행할 수 없어 사교육 시장이 확대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급 학원이 몰려 있는 강남 대치동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을 학원으로 내모는 것은 평준화 정책이 아니라 과도한 입시 경쟁이다. 또, 강남의 부동산 값이 뛰는 진짜 원인은 오랜 경기 침체와 금리 인하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돈들이 부동산 투기로 몰리기 때문이다. 잘못된 주택 정책의 책임을 고교평준화 정책 탓으로 돌리는 경제부총리의 무책임에 어처구니가 없다.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 처음 도입됐다. 청소년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키고 망국적 과외병을 없애기 위한 취지였다. 이후 대도시를 중심으로 평준화가 확대됐지만, 아직도 전국에는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 많다. 고교 평준화는 학교별·지역별 교육 여건의 차별 해소와 고등학교 교육 기회 확대에 기여해 왔다. 또, 고입 과열 과외 완화와 초·중학생들의 입시 부담을 덜어 주었다. 〈조선일보〉는 2월 1일자 사설에서 “평준화 28년은 곧 학력의 하향 평준화 과정이었다”며 진념의 평준화 해제 주장을 지지했다. 〈조선일보〉의 근거는 한국 학생들의 학력 수준이 중상위권에 밀집돼 있고 최상위권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중상위권의 비중이 커지는 것은 〈조선일보〉의 주장과는 반대로 평균적인 학력 상승을 뜻한다.

우리 나라의 학생들은 세계적인 학습량을 ‘자랑’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학생들은 연간 1백50∼1백80일 정도 학교에 간다. 우리 나라는 연간 2백20일 이상 학교에 간다. 한 시간에 배우는 학습량은 미국, 영국, 프랑스 학생들보다 최소 4배에서 최대 10배가 많다. 게다가 방과 후에는 학원이나 과외 수업을 받도록 내몰린다. 우익들이 우려하는 바대로 학력이 저하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비평준화로 고교입시를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5일제 수업으로 학습량을 대폭 줄이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처럼 대학까지 평준화하는 것이 아직 해결되지 않는 입시지옥과 과외병을 끝장낼 대안이다.

자립형 사립고는 귀족 학교

KDI는 자립형 사립학교의 확대를 요구했다. 자립형 사립학교는 귀족학교다. 연간 1천만 원 가량의 수업료를 지불할 수 있는 집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다. 지난해 교육부는 전교조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혀 자립형 사립고를 전국에서 5개의 시범학교로 축소했다. 서울시에서는 단 하나도 시행하지 못했다. 그런데 KDI는 자립형 사립학교가 대부분의 사립학교로 확대될 경우 입시 사설학원과 사립학교는 차이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자립형 사립학교의 교육 목표가 대학 입시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또, KDI는 고등학교의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고교 등급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교 등급제는 학교 연좌제다. 학생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선배들의 실적에 따라 후배의 내신성적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는 고등학교 교육의 내실화는커녕 지금보다 더 심한 입시지옥을 낳을 뿐이다.

기부금 입학제는 교육의 기회 균등을 노골적으로 부정한다. 대학교의 높은 문턱과 비싼 등록금 때문에 박탈감을 느끼는 노동자·서민의 자녀들을 더욱 소외시킬 것이다. 부자들의 자식들에게만 교육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기부금 입학제는 불평등과 사회적 특권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진념 경제부총리와 KDI의 충격적인 교육정책 제안에 대해 교육부는 기부금 입학제, 고교 등급제, 평준화 해제에 반대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평준화 해제 주장에 양보해 자립형 사립고를 수도권과 일부 지역에 30개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자립형 사립고가 평준화 정책을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평준화 정책의 보완이라던 각종 특수목적고(외국어고, 과학고)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입시 명문으로 자리잡았다. 자립형 사립고는 해결책이 아니라 새로운 귀족학교의 양산으로 귀결될 뿐이다.

김대중은 학벌 타파를 주장했던 한완상 전 교육부총리를 경질하고, 5공 시절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지냈던 이상주를 신임 교육부총리로 임명했다. 그리고 교육문제에 대한 경제부처의 몰상식한 발언과 개입에 대해서도 “너무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말라”며 진념과 KDI의 주장을 두둔했다. 이상주는 2000년도에 쓴 책에서 학교 운영위원회가 교장의 학교 행정권에 대항하고, 사학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크게 침해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교조의 합법화가 교직 사회의 분열을 초래한다고 비판했던 자다. 김대중과 이상주가 교육 정책에서 올바른 입장을 견지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교육을 일부 가진 자들의 특권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대중적 저항으로 좌절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