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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ㆍ19 공동성명 1년을 돌아보며

1년 전 6자회담에서 9·19 베이징 공동성명이 채택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9·19 성명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다. 한반도 위기 해소의 실마리에 접근한 듯한 낙관이 지배적이었다.

진보진영의 분위기도 못지 않았다. 9·19 성명이 북한 외교의 승리이고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파산"을 의미한다는 얘기를 좌파 민족주의 경향의 핵심 활동가 동지들한테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한반도 전쟁 위기설은 한동안 쏙 들어가고 "한반도 평화구조 확립"에 대한 낙관이 퍼졌다.

1년이 지난 지금, 그것이 얼마나 단견이었는가를 깨닫기는 어렵지 않다. 한반도 긴장은 해소되기는커녕 완화되지도 못했다. 북한의 미사일 실험 강행에 이어 지하핵실험 준비설마저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사태를 이렇게 만든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에 있다. 미국은 문자 그대로 성명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그것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미국은 공동성명에서 "적절한 시기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해 놓고는, 바로 그 회담의 종료 발언에서 케도(경수로 건설을 위해 구성된 국제 컨소시엄)를 해체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공동성명 채택 후에도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는 합법적 거래, 불법적 거래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이뤄졌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9·19 공동성명이 낙관적 전망대로 이행되지 못한 것은 미국의 탓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 실현의 방법 모색이라는 차원에서는 6자회담 참가국의 합의가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의 대안인지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6자회담(공동성명)을 해결책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6자회담 재개와 공동성명 이행, 그리고 남한 정부의 주도적 구실을 촉구한다. 하지만 6자가 다시 만나 공동성명을 다시 채택한들 이번에는 미국이 그것을 이행할까? 미국이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지 않으리라는 예견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빗나간 전망

얼마 전 절필을 선언한 리영희 선생은 9·19 성명 직후 열린 강연에서 미국이 조약을 지킨 일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라크의 베트남화" 때문에 "미국의 전쟁 애호 집단이 북경회담에서 이루어진 방향으로 동북아 지역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공동성명을 지키지 않을 수 있다고 강력히 경고한 것이다.

"미국이 조약을 단 한 번도 지킨 사례가 없으므로 이 사실로부터 출발해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 문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판단의 단서를 잡아야 한다." "북경회담 합의문이라는 종이조각을 토대로 해서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또, 리영희 선생은 "6자회담 공동성명에 대해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굉장히 문제해결에 접근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데 비해 나는 오히려 걱정과 불안이 생[긴다]."고 했다. "동북아시아 지배권 다툼을 위한 미일군사동맹과 중국과의 전쟁 위기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리영희 선생의 정확한 예견은 어느 정도는 국제정세로부터 한반도를 조망하는 이점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사실, 냉전 해체 이후 동북아 질서의 변화와 미국의 대응을 이해하지 않고는 소위 "북한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

미국은 냉전 해체 뒤에도 동북아의 패권을 잃지 않기를 원했고, 이를 위한 개입의 명분이 바로 북한이었다. 오늘날 미국의 동북아 전략의 기본은 인도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일본과 중국을 적대하게 만드는 것인데, 이 전략이 동북아의 불안정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세력 관계의 저변을 이해하면, 이 지역의 불안정을 일으키는 당사자들이 모여 앉아 이 지역의 평화를 도모하겠다는 것 자체가 앞뒤 안 맞는 얘기임이 더 잘 보인다.

물론 긴장이 고조되는 것보다 대화와 협상이 낫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것이 진정한 해결책을 제공하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최근 몇 년 동안 진보진영 안에서는 한반도 전쟁 위기설과 6자회담 기대론이 몇 개월 단위로 갈마들곤 했다. 하지만 정작 부시 정부의 입장은 대북 군사 조치도, 협상도 택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동에 집중하고 있어 북한을 다룰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적 판도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전략과 위기를 제대로 읽는다면 근거 없는 낙관에도, 근거 없는 두려움에도 치우치지 않고, 미국의 패권 전략을 무너뜨릴 아킬레스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