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칼럼에서 설명했듯이,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은 생산에 집중했다. 사회가 생활필수품의 생산을 조직하는 방식이 생산양식이다. 이 경제 토대 위에 법률·정치·종교·철학·도덕·예술 등 상부구조가 형성된다. 

그러나 하나의 생산양식은 어떻게 다른 생산양식으로 바뀌는가? 이것은 마르크스 자신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폐지하기를 원하는 반자본주의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마르크스가 생산의 두 측면,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구분했다는 사실로 돌아가야 한다. 근본적 사회 변화의 바탕에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작용과 충돌이 놓여 있다.

생산력은 사회가 재화를 생산하는 능력, 즉 사회의 자원·노동·지식·기술 등이다. 예를 들어 보자. 석기시대 수렵인들의 창·활·화살, 중세 농민의 소나 말이 끄는 쟁기, 산업혁명기의 방적기와 증기기관차, 현대 산업의 생산라인·발전소·컴퓨터 등이 생산력이다.

생산관계는 사람들이 생산 과정에서 맺는 사회 관계다. 생산관계는 원시 공산주의 수렵·채집 사회의 씨족 관계에서 고대 이집트·그리스·로마의 노예 소유주와 노예, 중세의 지주와 농노·농민, 오늘날의 자본가 고용주와 임금노동자 관계까지 다양하다.

마르크스는 생산력 발전 수준이 생산관계를 좌우한다고 주장한다. "맷돌은 봉건 영주의 사회를 만들어내고, 증기기관은 산업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생산력 증대가 결코 균등하거나 획일적이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 생산력은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인류는 더 효과적인 생산 방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생산력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생산력은 기존 생산관계(사회의 소유관계이기도 하다)와 충돌하게 된다. 생산관계가 처음에는 생산력 증대를 뒷받침했지만, 이제는 생산력의 더한층 발전에 장애물, 즉 "족쇄"가 된다. 그러면 "사회 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이런 모순이 시작될 때 사회 전체는 장기간의 위기에 빠져든다. 낡은 생활 방식이 더는 효과적이지 않게 된다. 낡은 사상들과 기존 제도들이 그 권위를 잃기 시작한다.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새 사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 위기는 새로운 생산관계와 새로운 생산양식이 확립되고 사회가 전진할 수 있을 때만 해결된다.

이것이 바로 유럽에서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전환할 때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 배후에서, 이제는 세계 규모로 작동하고 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괜찮은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생산력이 존재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빈곤과 영양실조, 집 없는 설움에 시달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서 끝없는 충돌과 전쟁이 벌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고, 우리가 환경 재앙의 위협에 시달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위기는 오직 새로운 생산양식, 즉 사회주의가 확립돼야만 끝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모든 과정이 기계적·필연적인 것처럼, 즉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게 경제적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여러 이유로 마르크스는 가끔 그렇게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고 마르크스의 진의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충돌은 사회계급들 사이의 충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충돌

원시 공산주의 수렵·채집 사회의 종말 이래로 생산관계는 항상 계급 관계, 즉 착취와 억압의 관계였다. 한 계급(주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는 지배계급 ―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 소유주들, 봉건제에서는 지주 귀족들, 자본주의에서는 부르주아지 ― 이었다. 이 계급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확고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기존 질서가 그들의 권력과 특권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생산력 발전에서 비롯하는 도전에 직면할 때마다 그들은 "이제 우리의 시대는 끝났다. 무대에서 우아하게 퇴장하자" 하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운다. 그러면서 "우리의 생활 방식"이나 "우리의 문명"을 지키자고 말한다.

생산력 발전은 또 특정 계급과 연결되고 그런 계급을 만들어낸다. 봉건제에서는 매뉴팩처와 상업의 성장이 신흥 부르주아지를 만들어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대적 공업이 프롤레타리아라는 노동계급을 만들어낸다. 위기의 해결과 인류의 운명은 낡은 지배계급과 신흥 계급 사이의 투쟁 결과에 달려 있다.

이 투쟁 결과는 결코 미리 예정돼 있지 않다. 유럽에서 16세기에 부르주아 혁명에 실패한 이탈리아와 독일은 3백 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그 나라들은 19세기에 가서야 국가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한국까지 확장해서) 낡은 제국의 질서가 자본주의의 발전을 억누를 수 있었고, 그 때문에 20세기에 들어섰을 때도 여전히 심각한 빈국이었고 결국은 제국주의의 오랜 피해자가 돼야 했다. 1918∼23년 독일에서 노동자 혁명이 패배하자 스탈린과 히틀러가 떠올랐고, 이 때문에 7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지배계급은 부(富)·전통·이데올로기, 특히 국가권력 등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들은 특히 피억압 계급들을 억누르는 데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다. 혁명적 계급의 투쟁은 경제투쟁뿐 아니라 정치투쟁, 즉 국가권력을 쟁취하려는 투쟁이어야 한다. 그 투쟁의 승리는 정치의식·동원·조직화에 달려 있다. 그 중에 상당 부분은 지금 우리 활동가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