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칼럼에서 보았듯이,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에서는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이 결정적 구실을 한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이 역사의 주요 동력이라고 보았고, 계급투쟁이라는 수단에 의해 하나의 생산양식이 다른 생산양식으로, 예컨대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또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바뀐다고 보았다. 그런데 계급이란 무엇인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해졌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계급이라는 말은 한편으로 언론과 각종 문헌, 일상생활에서 아주 폭넓게 쓰인다. 왜냐하면 부(富)의 소유 정도나 라이프스타일, 각종 기회의 편차가 아주 큰 사람들의 층(層)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 분명해서 도저히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지배자들로서는 대중, 특히 노동 대중이 계급에 대한 분명한 인식, 다시 말해 계급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그래서 1백 년 넘게 지배계급은 기꺼이 학자들(특히 사회학자들)과 전문가들에게 돈을 대주며 다양한 계급 이론들과 개념들을 만들어내게 했다. 그들 지배계급은 이런 이론들이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한은 그 이론의 내용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 조건이란,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을 '논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미혹의 주된 전략은 계급의 본질을 주관의 문제로 취급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위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자신의 계급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문제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논쟁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지식인이자 20세기 초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사회적 행동의 주된 요인으로 경제적인 계급이 아니라 '지위'와 '지위집단'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그가 말하는 지위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개인의 위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언뜻 객관적 기준에 따른 것처럼 보이는 정부 통계나 사회학 통계에서 흔히 나타나듯이, 계급을 직업으로 규정할 때조차 ― 예컨대, 교사는 중간계급, 정비사는 노동계급 하는 식으로 ― 직업 분류는 지위라는 막연하고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이뤄진다.

계급을 주관적으로 취급하게 되면 계급 개념이 쉽사리 달라진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에 따라 계급 개념이 달라진다. 또, 이제 계급 분열은 사라졌고 더는 계급이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이나 계급의 관점에서 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주장 따위로 쉽게 이어지기도 한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비록 계급의식을 분명히 중시하지만 계급 분열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계급 분열을 인식하든 안 하든 객관적으로 사회 구조 속에 계급 분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계급 분열이 사회의 생산관계에서 비롯했고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았다. 흔히 이것을 표현하는 문구가 "계급은 생산수단과 맺고 있는 관계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흔히 "그것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 문제다"라는 말이 덧붙여진다. 비록 이 공식이 대체로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불충분할 뿐 아니라 때로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 노예 소유주들, 봉건 지주들, 자본가들은 모두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이지만 서로 다른 세 계급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 삼성의 중간 관리자나 작업 현장의 노동자는 모두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아니지만 둘은 똑같은 계급에 속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을 더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 가지 요점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사회의 생산관계는 하나의 전체인 특정 생산체제를 이룬다는 것과 계급은 이 체제 전체에서 그것이 하는 구실에 따라 규정된다는 것이다. 개별적 경우[개인의 사례]가 아니라 체제 전체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둘째, 계급은 사람과 사물(생산수단 ― 토지·기계·공장 등) 사이의 관계 문제일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문제이기도 하다. 즉, 계급은 서로 충돌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셋째, 그런 충돌의 원인은 시기심이나 라이프스타일의 차이, 심지어 단순한 불평등이 아니라 착취적 생산관계, 즉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노동에서 잉여(이윤)를 체계적으로 수취하는 것 때문이다. 계급투쟁은 생산과정 상의 착취에서 비롯하고, 거기에서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된다.

부르주아지의 온갖 자유주의적·사회학적 설명들과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의 차이점이자 그런 설명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착취 개념(다음 번 칼럼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이다. 착취 때문에 이해관계의 객관적 충돌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임금, 노동시간, 노동조건 등을 둘러싸고, 나중에는 주택, 보건의료, 교육, 법과 질서, 외교 정책(전쟁이냐 복지냐) 등을 둘러싸고 충돌이 벌어진다.

이런 분석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일부 중요한 지역들에 적용시켜 보면, 우리는 모든 선진국들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계급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상층에는 지배계급인 자본가 계급이 있다. 그들은 주요 생산수단을 소유하거나 통제하고, 임금노동자들을 고용해서 그들에게서 나오는 이윤으로 살아간다. 지배계급의 성원이 모두 몸소 고용과 이윤 축적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모두 그런 일에 매여 있고 그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물론, 일부 고위 정치인들과 국가 관리들은 몸소 관여한다.

지배계급의 반대편에는 사회의 대다수인 노동계급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하고 자본가 계급에게 착취당한다. 노동계급에는 육체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모두 포함된다. 항만 노동자나 자동차 노동자뿐 아니라 간호사나 교사도 노동계급인 것이다. 주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모두 노동계급의 일부이다. 그들이 광산이나 공장에서 일하든 콜센터나 대학에서 일하든 그것은 상관 없다.

이 양대 계급 사이에는 흔히 중간계급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중간 계층들이 있다. 중간계급의 상층은 그 처지가 점차 지배계급을 닮아가고 하층은 점차 노동계급을 닮아간다. 중간계급에는 두 부류가 있는데, 둘 다 위계적으로 조직돼 있다. 한편에는 소상공인들, 즉 쁘띠부르주아지가 있다. 그들은 자영업자일 수도 있고 노동자들을 몇 명 고용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에는 관리자들이 있다. 관리자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임금이나 봉급을 받는다는 점에서 노동계급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받는 보수는 여느 노동자들이 받는 것처럼 임금이 아니다. 즉, 그들은 착취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통제하는 노동자들의 착취를 감독하고 실행하는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 그런 관리자들은 사기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 병원, 국가관료 집단에도 있다.

현대 사회의 기본적 정치 지형을 결정하는 것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의 투쟁이다. 지배계급은 중간계급 없이는 사회를 운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중간계급도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으로 양대 계급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더 강력한 '인력'引力)을 발휘하는 쪽으로 끌리는 경향이 있다.

많은 저개발국에는 또 다른 주요 계급인 농민이 있다. 그들은 생산과 정치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심지어 농민이 여전히 다수인 곳에서조차 결정적인 것은 대개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의 투쟁이다. 그리고 명백히 세계 규모에서는 국제 부르주아지와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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