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았듯이, 자본주의는 착취를 바탕으로 한 계급 분열 사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극소수 특권층이 대다수를 지배하고 이들의 노동에 의존해 살아간다. 어떻게 그들이 대다수를 지배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지적했듯이, 강제력과 동의를 결합시키는 것이 그 해답이다. 사실, 강제력과 동의는 아주 긴밀하게 결합돼 있고 서로를 강화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둘을 따로따로 다루겠다.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주로 국가다. 국가는 군대·경찰·법원·감옥·정부 관료기구 등의 제도들이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네트워크다. 사회 위에 군림하는 국가는 합법적 강제력의 독점을 비롯한 보편적 권위를 내세운다.

이 국가 기구는 각급 주무부서가 사회 전체의 이익, 즉 이른바 국익이나 공익을 구현한다고 자처한다. 그래서 경찰·판사·군장성 등은 항상 자신들이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공통의 국익이나 공익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신화일 뿐이다. 국민은 계급들, 즉 이해관계가 서로 정반대인 착취자들과 피착취자들로 이뤄져 있고, 국가가 대변한다는 사회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라는 특정 사회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런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보존하는 것이고, 이 질서는 자본가 계급의 지배력을 구현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말을 빌면, 국가는 “부르주아지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국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그 구성으로 나타난다. 군대·경찰·법원·행정기관의 상층은 압도적으로 부르주아지 출신 인사들로 채워지고, 그들은 부르주아지와 경제적·사회적·혈연적 연줄을 유지한다. 설사 하층민 출신의 개인이 이따금 상층으로 침투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전혀 없다. 한편으로, 그런 개인이 승진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실제 계급 지위가 바뀌었다는 뜻이고, 그에 따라 그들의 견해도 바뀌기 십상이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자본주의적 작동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런 승진의 조건이다.

국가의 자본주의적 성격의 결과는 강제력 또는 강제력 사용 위협이 일상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어떤 노동자가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했는데, 일을 마친 뒤 자신이 만든 제품의 일부나 전부를 집에 가져가려 한다고 치자. 그 노동자는 당연히 강제 연행돼서 경찰서 유치장에 갇힐 것이다. 또, 어떤 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90퍼센트의 노동자들만이 파업에 들어가고 나머지 10퍼센트는 계속 일을 하려 한다고 치자. 경찰이 ‘법대로 하겠다’며 당장 상당수 병력을 공장 문 앞에 배치해 파업 파괴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해 줄 것이다.

그러나 사용자들이 직장폐쇄를 하고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하기로 결정한다면, 경찰이 또 들이닥치겠지만 이번에는 모든 노동자들을 집으로 확실하게 돌려보낼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아무리 ‘노동권’을 호소해도 경찰은 꿈쩍도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 경찰은 ‘직무를 집행했을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즉, 그들의 직무는 자본주의적 착취를 집행하는 것이다. 내가 말한 사례들이 너무 명백하고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약간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이 점이 중요하다. 자본주의적 착취는 그것을 승인하는 국법 ― 국가의 강제력으로 뒷받침되는 ― 이 없으면 단 5분도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시기에 국가의 강제력은 잘 드러나지 않고 배후에서 집행된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의 이익이 진정한 도전에 직면하는 순간 그것은 전면에 등장한다. 그런 도전이 외국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국가의 강제력은 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 도전이 내부적인 것이라면, 그 도전은 탄압에 직면할 것이다. 그 도전이 선출된 정부가 제기한 것이라면, 국가의 강제력은 [그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군부나 파시스트의 쿠데타를 조직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예컨대, 1973년 칠레에서 피노체트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나 몇 년 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를 전복하려 한 쿠데타가 그런 경우다.

이 마지막 요점, 즉 현직 정부를 반대하는 부르주아지를 위해 국가 권력이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 이것은 국가 기구가 민선 정부에 복종한다는 공식 헌법의 관점(그리고 정치학이 널리 퍼뜨리고 각급 학교에서 가르치는 관점)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둘째, 그것은 20세기의 이른바 공산당 또는 사회당 들이 대부분 무시했거나 왜곡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핵심 쟁점 하나를 제기한다.

그런 단체들의 전략 ― 제1차세계대전 전에 독일사민당에서 시작된 ― 은 의회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가 기구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고 그런 기구를 이용해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계급이 기존의 국가 기구를 인수해서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기존 국가는 부르주아지와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어서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이용될 수 없었다. 오히려 기존 국가는 해체(분쇄)돼야 했고 노동계급이 창설한 새로운 국가 기구로 대체돼야 했다.

레닌은 마르크스 국가론의 진수를 재발견하고 위대한 저작 《국가와 혁명》에서 그것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러시아 혁명에서 소비에트, 즉 노동자 평의회의 권력을 통해 실행됐다. 그러나 나중에 스탈린주의의 지도를 받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적 길과 기존 국가기구 인수라는 사상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군대·탱크·폭탄·전투기 등으로 무장한 현대 국가는 너무 강력해서 심지어 노동계급의 가장 큰 대중 운동으로도 도저히 분쇄할 수 없다는 반론이 흔히 제기된다.

약점

그러나 이런 주장은 국가와 모든 지배계급 권력의 결정적 약점 ― 온갖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노동계급 일부의 협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 을 고려하지 않는다. 모든 총은 그것을 사용할 병사가 필요하고, 모든 탱크에는 운전자가 필요하고, 모든 비행기에는 정비팀이 필요하다. 거의 모든 국가기구에는 직원들이 근무하는데, 하위직은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대중 혁명의 시기에는 노동계급의 압력 때문에 이런 노동자들의 대다수가 윗사람들과 결별하고 대중의 편에 서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국가는 분쇄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은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강제력뿐 아니라 동의에도 의존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런 동의가 어떻게 유지되고 파탄나는가 하는 것이 다음 칼럼의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