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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니카라과 혁명, 산디니스타

미국 정부 관리들은 1980년대 산디니스타 집권기의 경험을 들먹이며 오르테가의 당선이 니카라과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협박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과거 산디니스타 정부 시절 니카라과인들이 겪은 고통의 많은 부분은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강압 정책 때문이었다.

오르테가가 이끈 산디니스타는 1979년 7월 43년 동안 니카라과를 지배해 온 소모사 가문의 친미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미국은 그 해 초 이란에서 친미 팔레비 왕정이 무너져 큰 타격을 입은 데다 자신의 뒷마당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좌파 정권이 들어선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1980년대에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경제봉쇄로 니카라과의 목을 조였을 뿐 아니라 우익 반군(콘트라)을 조직·지원하며 물리적으로도 산디니스타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다. 미국은 당시 적대국으로 여기던 이란에 무기를 판 돈으로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1981년 이후 콘트라 반군과의 내전으로 희생된 니카라과인이 무려 5만 8천여 명이나 됐다.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에 인플레율이 2만∼3만 퍼센트까지 치솟고 경제성장률은 세계은행 예측치의 4분의 1도 안 되는 등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의 위협, 반군과의 내전 때문에 산디니스타 정부는 예산의 거의 절반을 군사 예산으로 충당해야 했다. 자연히 사회복지 예산은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콘트라 반군은 무차별 공격으로 농장·병원·학교 등을 파괴했다.

그럼에도 혁명 초기의 성과는 상당했다. 예컨대, 문맹률이 50퍼센트에서 12퍼센트로 감소했고, 토지개혁 덕분에 8만 가구 이상의 무토지 농민 가구에 토지가 분배됐다. 농촌 지역에 학교와 병원 들이 설립돼, 교육·의료 서비스가 크게 개선되자 영아사망률은 대폭 하락하고 평균수명은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개혁의 범위를 제한한 요인은 내전만이 아니었다. '혼합 경제'를 고수하려는 산디니스타 정부의 경제 정책도 한몫 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항상 노동자·농민·'애국적'자본가들과의 동맹이라는 틀 안에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그래서 민간 지주들의 토지를 대거 몰수해서 분배하는 정책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주로 국유지나 유휴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이것은 일부 지주들이 콘트라 반군 편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는 데 도움이 됐지만, 다른 한편으로 토지를 원하는 많은 농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정책이기도 했다.

또, 산디니스타 정부는 사용자들을 달래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권리도 제한했다. 그래서 집권 기간 내내 파업을 금지했다. 그리고 니카라과 노동계급의 약 3분의 2가 산디니스타가 주도하는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있었는데, 그 노조는 낮은 임금인상과 작업속도 가속화를 강조하는 등 '생산적 노동조합주의'를 주창했다.

집권 말기인 1980년대 말에 이미 오르테가와 산디니스타는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부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노동자들을 대거 해고하고, 통화가치를 크게 떨어뜨리고, 소비자 보조금을 모두 폐지했다.

이에 항의하는 농민들이 최고법원의 판결을 무시한 채 토지 점거에 나서고 교사들과 택시 노동자들의 파업이 정부와 충돌로 이어지는 등 저항이 빈번해졌다.

그런데도 점차 부유해진 산디니스타 대원들은 10여 년 전 자신들을 열렬하게 지지해 준 사람들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들은 국가 소유 자산들을 개인 재산으로 빼돌리는 등 국가를 약탈해 자신의 배를 불리며 원성을 사고 있었다.

1990년 대선에서 오르테가가 우파 연합의 비올레타 차모로에게 패배한 것도 순전히 미국의 강력한 압박과 횡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뒤 오르테가의 우경화는 더욱 가속됐다.

그는 여전히 산디니스타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의회 안에서 어느 정도 권력을 유지했지만, 대중적 지지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산디니스타 내부에서는 논쟁이 억눌렸고 오르테가에 대한 도전은 죄다 억압당했다. 산디니스타가 특별히 민주적인 조직은 아니었지만(산디니스타의 주요 구호는 "전국 집행부의 결정을 따르자!"였다), 점차 1인 독재 체제가 산디니스타를 지배했고 고참 조직원들 가운데 일부는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 산디니스타의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전 부통령 세르지오 라미레스, 전 문화부장관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게릴라 지도자 도라 마리아 텔레스)가 산디니스타혁신운동(MRS)이라는 정당을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MRS는 오르테가의 지배력에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르테가의 양녀가 오르테가를 성추행과 협박 혐의로 공개 비난한 뒤에야 그의 지배력이 타격을 입었다.

과거에 오르테가와 산디니스타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소모사에 맞서 싸운 혁명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오늘날 니카라과 안에서 그들의 명성은 사뭇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