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리뷰 - 〈MBC 스페셜 ‘세계를 뒤흔든 순간 ― 러시아 혁명〉:
러시아 혁명의 진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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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다큐멘터리
지금까지 전체 5부 중 4부가 방영됐다. 일부 재연 장면들은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쉽게 접하기 힘든 당시 자료 화면들 덕분에 이 시리즈는 매번 볼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심각한 오류들도 많다. 예컨대, 2부에서 제헌의회 해산을 레닌이 민주주의를 불신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것은 사실과 맞지 않다. 제헌의회 해산은 민주주의에 대한 레닌의 불신 때문이 아니라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의회민주주의 간의 모순 때문이었다.
볼셰비키는 원래, 혁명 전부터 제헌의회 구성을 찬성했다.
그러나 주로 지방의 보수적 농민층의 지지에 힘입어 사회혁명당이 의회의 다수파 정당이 됐다. 그들은 소비에트 체제에 매우 적대적이었고, 이에 고무받은 부르주아
그래서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 좌파의 동의 아래 제헌의회를 해산했다. 대중 저항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안도의 한숨이 전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이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또, 볼셰비키와 ‘온건’ 사회주의자들
내전을 다룬 3부는 오늘날 학계의 유행을 따라 객관적 상황보다는 볼셰비키의 ‘전시 공산주의’ 때문에 혁명이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내전과 연관된 각종 끔찍한 사건들 ― 백색 테러에 맞선 적색 테러, 엄청난 인플레이션, 굶주림, 강제 곡물 징발, 적군 내 군사적 규율의 강조, 공장 내 1인 관리자 제도 도입,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 은 분명 피할 수만 있었다면 좋았을 사건들이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이 일어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한 노동자
핵심 문제인 ‘전시공산주의’라는 것도 실인즉 원래는 볼셰비키의 방침이 아니었다. 1918년 3~4월에 볼셰비키의 정책은 사기업을 정부가 감시
그런데도
당시 혁명 러시아는 독일과의 강화 조약으로 핵심 산업 단지를 잃었다. 이 때문에 철강 생산능력의 80퍼센트, 석탄 생산의 90퍼센트, 그리고 전체 산업 기계와 장비의 절반을 잃었다. 연료와 원료 부족으로 공장이 폐쇄되고 대량 실업이 발생했다. 수많은 선진 노동자들이 굶어죽거나 백군과 싸우다 죽었다. 생존한 노동자의 경우에도 생산 체제 붕괴와 귀농에 따른 탈계급화가 광범하게 일어났다.
‘전시공산주의’는 레닌이나 볼셰비키 이데올로기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이런 엄혹한 상황에 대처하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1921년에 레닌은 이렇게 지적했다. “전쟁과 파괴가 ‘전시공산주의’를 우리에게 강요했다. 이 정책은 프롤레타리아의 경제적 임무와 걸맞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것은 임시 조처일 뿐이다.”
그러나 적군 건설은 훨씬 더 복합적 과정이었다. 사실, 단순히 군사적 조처만으로는 훨씬 더 잘 훈련받고 서방 제국주의가 제공한 더 좋은 무기로 무장한 백군과 싸워 이길 수 없었다. 백군과 맞서려면 최대한 많은 대중의 혁명적 열정에 호소해야 했다.
따라서 적군은 단순한 군사 기구가 아니라 정치 세력이어야 했다. 적군은 계급적 기반을 따라 조직됐고, 짜르 시대와 달리 병사들을 규율로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발적
또, 볼셰비키는 일부 짜르 시대 장교들을 복귀시키면서도 대중이 증오하는 가장 악질적인 분자들을 민주적으로 솎아냈다. 볼셰비키는 적군 창설 과정에서 복귀 예정인 짜르 시대 장교들의 명단을 공표했고, 시민들은 10일 동안 임명돼서는 안 되는 장교들을 선택할 수 있었다.
또,
그러나 만약 볼셰비키가 단지 수동적인 대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면 어떻게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만약 볼셰비키 정부가 노동계급의 지지 없이 강제에만 의지했다면 백군보다 먼저 무너졌을 것이다. 억압에만 기초해서 내전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다른 노동자 정당
그래서 1919년 7월에 영국 전쟁장관조차 이렇게 말했다. “볼셰비키 정부의 안정성을 테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볼셰비키가 가장 위험에 처한 듯했을 때, 콜차크
마지막으로, 레닌과 볼셰비키는 혁명의 국제적 확산 없이는 후진국 러시아의 노동자 국가가 유지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들에게 러시아 혁명은 국제 혁명의 도화선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물론
아쉽게도 4부도 혁명의 국제적 확산 문제를 계속 무시했다.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국제 혁명이냐 일국사회주의냐’ 논쟁을 다룰 때도 트로츠키를 이상주의자로 스탈린을 현실주의자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혁명의 국제적 확산이 실패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이 아니었다. 서구 혁명은 실제로 1918-20년에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바바리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일어났고, 그것이 실패한 것은 한편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배신과, 다른 한편으로 신생 공산당의 미숙함 때문이었다.
그 뒤 비슷한 일이 1930년대 독일
반면에 4부는 선진국과 경제적
그러나
당시 소련 사회의 생산 조직 방식이 자본주의적이었다면 소련은 자본주의가 아니었을까? 물론 서방 자본주의와 달리 국가 관료들이 노동자들을 국가를 통해 집단적으로 착취
이런 관점으로 스탈린 ‘혁명’을 보면 이것이 사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부활시킨, 오히려 반혁명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0월혁명을 성공시킨 레닌과 국가자본주의적 반혁명을 이끈 스탈린 사이에는 질적으로 완전한 단절이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