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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모델”에 대한 올바른 이해

‘소득·임금 연대전략’은 본래 스웨덴의 ‘렌-마이드너 모델’을 참조한 것이다. 〈모색〉이 비록 스웨덴과 한국의 다른 조건 ― 자본주의 경제 상태와 노동운동의 조직화 수준 ― 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지만, 아이디어 자체는 ‘렌-마이드너’ 모델에서 나온 것이다.

‘렌-마이드너 모델’은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노동계급에게 개혁을 제공하면서도 자본가들에게도 이로운 방안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렌-마이드너 모델’은 무엇보다 임금 수준을 중앙에서 결정하는 “임금 연대전략”이었다(민주노동당은 “임금 연대전략”을 “소득 연대전략”으로 바꿔 내놓았다). 즉, 스웨덴 같은 소규모 산업 경제가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쟁력을 갖춰야 하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스웨덴 산업 부문 ― 철강·자동차·전기 등 ― 의 국제 경쟁력이 스웨덴 노동계급의 임금 수준을 결정한다는 이론이었다.

이론적으로 연대임금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뜻했다. 동일하지 않은 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이 아니었다. 애초 계획에도 용접공의 임금과 유치원 교사의 임금 간의 관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국제적으로 ‘개방된’ 부문의 경쟁력에 따라 임금을 결정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실천에서, 임금의 중앙집중적 결정은 상이한 노동자 부문의 임금 격차를 좁히는 효과를 냈다.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과 열악한 조건의 3D 업종에서 자본가들을 제약하는 이점이 있었다. 반면, 자본가들에게는 가장 수익성 있는 기업의 임금을 통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의 문제점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자본가들이 임금과 경쟁자들의 압력을 받아 주기적으로 공장을 폐쇄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경제가 확장되는 시기(스웨덴 경제는 1950년대에 연간 3.5퍼센트, 1960년대에는 연간 4.4퍼센트 성장했다)에는 이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됐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연대임금 정책은 꽤 성공적이었고 스웨덴 자본주의는 급속하게 성장했다. 진정한 문제는 노동력 부족이었다. 그래서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여성을 작업장으로 끌어들였다. 진보적으로 보이는 정책들(특히 육아 정책)은 대부분 노동력 확대 요구라는 맥락에서 비롯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자본가들에게는 높은 수익성을, 노동계급에게는 실질적인 빵조각을 제공하는 식으로 자본가 계급과 협상했다. 사회민주당은 자본가들에게 적당한 자본가처럼 굴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웨덴 모델”의 성공 자체가 위기를 낳았다. 스웨덴의 번영은 세계 경제의 성장에 크게 의지했다. 세계 경제는스웨덴 사민당의 통제 밖에 있었다. 스웨덴의 위대한 진보의 시대는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긴 호황과 일치했다. 호황이 끝나고 1974년 석유 파동 뒤 스웨덴 경제의 문제가 밝히 드러났다.

1951년 이래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산업 정책 목표였던 수출 지향 경제 때문에 거의 모든 주요 산업 부문이 무역 사이클에 매우 취약해졌다. 수요 감소 때문에 많은 스웨덴 산업 부문이 위기를 겪었다. 공장폐쇄와 해고가 뒤따랐다. 개량주의 왕관의 보석 중 하나인 완전고용의 운명은 스웨덴 정부의 정책이 아니라 세계 시장의 변덕에 의존하게 됐다.

게다가 스웨덴 자본주의는 스웨덴 국경 밖에서 성장했다. 이것은 사회민주당과 협상해야 할 물질적 이해관계가 적어졌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세금과 고임금을 지급할 필요가 줄어들었다.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간부층의 핵심 임무는 이런 계급 세력 균형에 심각한 변화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 계급 화해, 사회 개혁, 수익성 있는 자본주의라는 “스웨덴 모델”의 지속.

그러나 그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 오랫동안 지속된 사회적 타협의 후유증 때문에 노동계급의 자기방어력이 약화된 것이다. 따라서 불황의 시기에 민주노동당이 노동계급에게 이런 정책을 설득하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