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권영길 의원이 국회에서 “사회적 연대 방안”을 밝힌 뒤 “사회연대전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회연대전략”의 핵심은 고임금 노동자들의 소득 양보다. 이 제안은 10월에 진보정치연구소가 내놓은 〈소득·임금 측면에서 노동계급 연대전략의 모색〉이하 〈모색〉)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는 “사회연대전략”을 당의 위기 탈출 전략으로 보는 듯하다. 문 대표는 “우리끼리의 나눔”을 통해 “부유세·무상의료·무상교육 투쟁의 토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이론과 실천》 2006년 12월호).

오건호 민주노동당 정책전문위원은 “사회연대전략”을 “참여에 기초한 요구”라고 규정했다. “사회연대운동은 자본과 국가에 대한 요구일 뿐 아니라 노동운동이 스스로 이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의 배경은 불길하다. 민주노동당은 고소득 노동자의 저소득 노동자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을 제안했다. 당연히 지배자들은 이를 반겼다. 노동당이 노동자들의 양보를 설득하겠다는데 이를 마다할 지배자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양보 제안이 지배자들의 양보를 끌어낼 수는 없다. 열우당은 기초연금 도입과 국민연금 후퇴(급여율을 낮추고 보험료를 올리는)를 연동시킨 민주노동당의 제안을 간단히 묵살하고는 국민연금만 개악하려 한다.

당내 의견그룹 ‘전진’의 이론가인 장석준 동지도 “사회연대전략”을 거리낌없이 옹호하고 있다(《이론과 실천》 2006년 12월호).

장석준 동지는 지난 7월에도 대공장 노조원의 임금 양보를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임금 양보 제안은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살 수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슬쩍 말을 바꿔 “조세” 양보를 제안했다. 조삼모사다.

여기에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 ― 정당은 (의회) 정치를, 노동조합은 경제를 담당한다는 ― 라는 사고도 한몫 한 듯하다. 장석준 동지가 관여한 〈모색〉도 “[임금 연대전략보다는] 소득 연대전략에 비중을 둬야 한다”고 권고한다. “임금 영역은 노동조합의 고유 영역”이므로 당이 임금 문제에 개입하면 “노동조합이 노조 운동의 자율성이라는 측면에서 강하게 반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석준 동지는 “노동계급 내에서 생활 격차가 유례 없이 강화”돼 노동계급이 “하나의 계급을 이룬다고는 말하기 힘든 지경”이 됐기 때문에 “[계급 간 재분배만이 아니라] 노동계급 내에서도 조세를 통해 소득의 재분배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계급 내 소득 격차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은 정규직의 70.5퍼센트다(《노동리뷰》 12월호). 이런 현실 때문에 형편이 나은 노동자들이 요구를 자제해 저소득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개선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은 결코 저임금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 정의의 실현 방안이 아니다.

노동계급 내 격차

먼저, 더 근본적인 것은 노동계급 내부의 격차가 아니라 계급 간 격차이다. 2005년 1백 개 상장사 임원의 평균 연봉은 약 4억 4천만 원이었다. 반면, 해당 상장사 노동자 평균 임금은 약 4천4백만 원이었다. 대략 열 배가 차이 난다.

게다가 기업들의 엄청난 이윤 증대(2001년 1백대 대기업 평균 영업이익은 3천억 원이 채 안 됐지만 2004년에 5천억 원을 넘었고 2005년에는 4천8백억 원이었다)를 고려했을 때, 노동계급 내 소득 격차를 완화하기 위해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하라는 요구는 그들의 분노를 자극할 뿐이다.

둘째, 노동계급 내 소득 격차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상이한 부문은 상이한 임금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경향이 있다. 첨단 산업이나 강력하고 잘 조직된 부문의 노동자들은 임금을 더 많이 올릴 수 있다. 나머지 노동계급은 고임금을 받는 강력한 부문의 노동자들과 자기 임금을 비교하면서 그 뒤를 쫓아간다.

이렇듯 한 부문의 에스컬레이터가 움직이는 속도는 다른 부문의 에스컬레이터 속도에 동일한 방향으로 영향을 준다. 한 부문의 에스컬레이터에 속도가 붙는다면 다른 부문의 에스컬레이터도 그리 될 것이고, 역으로 한 부문의 에스컬레이터 속도가 더디면 다른 부문의 에스컬레이터도 그리 될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의 세력이 증대하면 노동계급 내부의 임금 격차가 상당히 감소하는 것이다. 예컨대, 1914년 이전에 영국 숙련 노동자의 임금은 비숙련 노동자 임금의 갑절이었다. 1950년대에 그 격차는 10∼15퍼센트 차이로 감소했다.

따라서 강력한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이 낮다면 취약한 노동자들은 더 형편 없는 임금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 우리가 양보하면 저들도 내놓을 것인가?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물음을 던져 보자. 현대차 노동자들이 저소득 노동자들을 위해 요구를 자제하면 현대차 경영진은 그 돈을 비정규직들에게 송금할까 아니면 자신의 은행계좌에 집어넣을까? 당연히 후자다.

장석준 동지는 “조직 노동자들이 조세·사회복지 기여금의 추가 부담을 먼저 결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본과 부유층이 증세를 받아들이도록 압박”하자고 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노동계급의 양보가 자본가를 압박하는 데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예컨대, 1998년 현대차노조의 해고 반대 투쟁 때, 김광식 집행부는 양보를 거듭했다. 그럴수록 사측은 공세를 더한층 강화했다. 그나마 해고 규모를 줄인 것은 현장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이었다.

우리도 양보하고 저들도 양보하는 것이 공평한 것도 아니다. 한국의 조세 제도가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노동자들의 근로소득세는 자영업자 종합소득세의 갑절이다. 8만 6천7백 명의 수십억대 부자들이 보유한 금융자산은 2백30조 원이지만 한 푼의 보유세도 부과하지 않고 있다.

한편, 장석준 동지는 임금과 이윤을 똑같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임금과 이윤은 질적으로 다르다. 임금은 생산비용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이윤은 그렇지 않다. 이윤은 생산과 판매 뒤에 남는 것이지만 임금은 그렇지 않다. 임금은 노동자와 자본가 양측이 협상을 하지만 이윤은 그렇지 않다.

또, 이윤은 상품의 판매 가격에서 생산비용을 뺀 뒤 남는 것이다. 따라서 이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가격도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가격 통제는 지극히 복잡하며 신자유주의 자체를 제거하지 않는 한은 사실상 불가능한 과제다.

무엇보다 이윤은 자본주의의 동력이고 기업이 원활하게 운용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지표다. 그러니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양보에 굴복해 이윤 추구를 자제할 리 만무하다. 자본가들은 대중 투쟁의 압력에 직면해 양보의 대가가 양보하지 않는 대가보다 작다고 여길 때 비로소 양보할 것이다.

세계 노동자 운동의 역사는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영국에서 현대 복지국가의 토대를 놓은 것은 대규모 노동쟁의에 대한 자유당 정부의 대응이었다. 글래스고 전기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뒷받침한 임대료 납부 거부 운동이 벌어지자 총리 로이드 조지는 1915년에 임대법을 도입했다. 또, 1921년 11월 ‘전국실업노동자운동’은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인 가정 있는 남자에게 실업수당 지급 요구를 쟁취했다.

투쟁을 통한 연대

그러나 장석준 동지는 “투쟁을 통한 연대”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도 조세나 사회복지 기여금을 추가 부담”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오늘날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처럼 공장을 뛰어넘는 연대투쟁이 활발히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에는 “형식적 민주화”도 무시 못할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부활, 공무원노조 불인정 등에서 보듯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고 불안정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장석준 동지가 간과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의 등장과 안착화이다. 우리는 민주노총 정규직 노조 지도부 일부가 비정규직 투쟁을 배신하거나 외면하는 현실을 자주 목격한다.

그러나 장석준 동지가 소속된 ‘전진’은 노동자들의 연대를 해치는 노조 지도자들의 투쟁 배신과 회피를 비판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민주노총 ‘중앙파’ 소속일 경우엔 특히 그랬다. 이것은 또한 ‘전진’이 현장 노동자들의 전투성 제고를 위한 노력보다는 ‘대공장 이기주의’를 비난하거나 산별노조의 조직과 제도 형식에 집착하는 것과도 관련 있다.

결론을 짓자면, 연대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다. “사회연대전략”은 연대를 시혜나 자선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런 시혜로는 결코 “투쟁을 통한 연대”를 강화할 수 없다. 오히려 시혜를 받는 상대방에게 모멸감만 줄 뿐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결코 “노동계급의 연대를 강화할” 수 없다. “노동계급 내에서도 조세를 통해 소득 재분배가 이뤄져야 한다”는 장석준 동지의 주장은 ‘정규직의 양보로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자’는 지배자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이런 논리의 부정적 효과는 명백하다. 양보를 통한 노동계급 내부의 ‘소득 재분배’를 위해선 단결과 투쟁이 필요하지 않다. 양보해야 하는 노동자와 시혜의 대상이 된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만이 있을 뿐이다. 우파 언론과 지배자들은 이 틈을 파고들어 온갖 이간질로 틈을 더욱 벌려놓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부자·기업주들에게 재분배를 요구할 노동계급의 단결과 투쟁이라는 진정한 힘을 약화시킬 것이다.

이처럼 노동계급 일부의 양보를 요구해 분열을 조장하는 전략이 “진보정당이 본래 해야 했던 것”이라는 장석준 동지의 주장은 터무니없다. 물론 이 길이 개량주의적 사민주의 정당들이 갔던 막다른 길이기는 하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급진적 도전이 아니라 ‘사회적 타협’ 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급 협력을 추구하며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제한하던 길로 민주노동당이 가서는 안 된다.

당내 좌파의 과제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사회연대전략”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진정한 행동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모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