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가 권좌에서 쫓겨났다 복귀했다. 기성 언론들은 “사회주의 개혁”으로 민심을 잃은 “독재자”가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퇴진했다가 간신히 살아난 것으로 보도했다. 세계 4위의 석유 수출국 베네수엘라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그러나 빈곤·불의·불평등 또한 엄청나다. 인구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지주가 60퍼센트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인구의 약 80퍼센트가 빈곤층이고, 국부의 40퍼센트를 외채 상환에 쓰고 있다.

1970년대에 들이닥친 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로 베네수엘라 자본주의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유가 폭락으로 경제는 곤두박질쳤다. 노동자·농민은 절박한 생존의 위기로 내몰린 반면, 부자들은 석유 수입으로 부를 쌓았다.

당시 베네수엘라 정치를 지배하고 있었던 기독교민주당(COPEI)과 민주행동당(AD)은 중남미 최대의 부패 스캔들에 휘말렸다. 20년 동안 중간 계급의 소득은 70퍼센트나 폭락했다. 부패에 찌든 기성 정당들은 무기력했다. 군부 내에서는 주로 쁘띠 부르주아지 출신의 소장파 장교들 사이에서 불만이 팽배했다. 1983년에 이들 가운데 일부가 차베스의 지도 아래 비밀리에 ‘볼리바르 혁명 운동’(MBR-200)을 시작했다. 그들의 사상은 민족주의와 갖가지 좌파 사상이 뒤섞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에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카라카소”, 즉 빈민 대중의 자생적 봉기가 발생한 것이다. 전국은 봉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러나 민주행동당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정부는 봉기를 유혈 진압했다. ‘볼리바르 혁명 운동’의 소장파 장교들은 카라카소 유혈 진압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1992년에 페레스를 몰아내고 “명예롭고 애국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의 쿠데타는 실패했고 그 지도자들은 투옥됐다. 1990년대에 베네수엘라의 노동자·민중은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다. 베네수엘라 최대 노조 연맹 베네수엘라 노총(CTV)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총파업을 호소하게 한다거나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MAS)과 급진당(Causa Radical) 같은 좌파 정당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정치인들과 노조 지도자들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노동자의 18퍼센트를 아우르는 CTV는 철저하게 관료들의 통제를 받았다. CTV 관료들의 생활 조건은 대중의 실제 생활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CTV 지도자들은 단지 압력용으로만 파업을 호소했고, 파업이 정치 투쟁으로 발전할 조짐이 보이면 바로 중단시켰다. 그리고 CTV는 “말 안 듣고” “분란을 일으키는” 조합원 명단을 작성해 사장들에게 넘겨 주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바로 이런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차베스의 제5공화국운동(MVR)이 출범했다. 군부 내 소장파 장교들과 그 밖의 다른 중간 계급 부문의 주도로 결성된 MVR은 공산당(PCV), MAS, 우리의 조국(Homeland for All:PPT) 같은 상이한 좌파 경향들을 포괄하는 애국전선을 만들었다.

“볼리바르 혁명”

1998년 12월 차베스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선출됐다. 그는 제헌의회를 구성해, 완전한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 자립을 강화하며 부정부패를 일소할 수 있는 헌법을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 헌법은 소위 “볼리바르 혁명”의 초석이 될 것이었다.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은 결코 사회주의를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국제 노동자 운동의 촉진보다는 세계 시장에서 베네수엘라 국가의 몫을 더 늘리고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차베스는 “야만적인 신자유주의”를 비난했지만, 해외 투자를 적극 유치하려 했고 고용주들의 노동 유연화 전략에도 도전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옹호했다. 1999년에 차베스는 “국가가 필요한 만큼 시장도 필요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가 추진한 개혁 입법의 일부는 노동자를 공격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공기업 단체협약을 “국가 재정에 무책임한” 것이라고 판단하면 파업을 금지할 수 있었다. 국가가 임신한 여성 노동자들을 예고 없이 해고할 수도 있었다.

1999년과 2000년에 차베스 정부는 유가 인상과 세계 경제 호전 덕분에 그런 대로 잘 나갔다. 베네수엘라 석유회사의 사유화를 중단시키고 이 회사의 일부 소득으로 공공 지출을 늘릴 수 있었다. 그래서 외채나 통화량을 늘리지 않아도 됐고, 자본가 계급과의 결정적인 전투를 피할 수 있었다. 2000년 공공 지출은 42퍼센트나 상승했다. 그럼에도 이런 조치들은 차베스를 지지하는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생활 조건의 근본적인 변화를 바랐다. 2001년에 유가가 하락하고 경제 위기가 닥쳤다. 특히 빈민층이 고통을 겪었다. 환멸은 늘어났고 볼리바르 운동에 대한 지지는 더욱 낮아졌다.

작년 11월 23일 차베스가 49개의 “개혁 입법”을 통과시킨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 대응하려는 시도였다. 많은 사회·경제적 개혁 조치들을 시행함으로써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개혁 입법 중에서 특히 세 가지가 부르주아지와 제국주의 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정부가 유휴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분배하거나 지주에게 경작을 강제하는 “토지법.” 석유와 가스 부문의 외국 자본에 대한 세율을 16.6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올리고, 자국 내에서 채굴한 석유와 가스에 30퍼센트의 로열티를 부과하는 내용의 “탄화수소법.” 소규모 어업과 환경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특정 해안 지대 내의 대형 트롤 어업을 금지한 “해안지대법.”페데카마라스(베네수엘라 상공회의소)나 부르주아 언론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그런 조치들은 전혀 사회주의적이지도 않았고 “마르크스주의적”이지도 않았다. 사실, 그런 조치들은 각국의 부르주아 정부들이 간혹 선택했던 국가의 경제 개입 조치였다. 그러나 지금 베네수엘라 상황에서 이 조치들은 제국주의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정책들(사유화, IMF 긴축 조치, 시장 자유화, 모든 사회 생활에 도입된 시장의 논리, 특히 다국적 자본의 명령에 대한 굴종 등)과 상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베스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투자를 중단하고 자본을 해외로 빼돌리는 합법적인 방법과 “냄비” 시위나 12월 10일의 공장 폐쇄 같은 방법들을 동원해 대항했다.  서방 언론에서는 12월 10일의 공장 폐쇄와 상가 철시를 두고 가당치도 않게 ‘노동자와 고용주의 연합 총파업’으로 묘사했다. 자본가들의 반발에 부딪힌 차베스는 처음에는 공세적으로 나갔다. 그는 군 장악력을 더욱 강화하고 문제의 개혁 입법을 고수하는 한편 이를 지지하는 대중 시위를 호소했다. 12월 18일에는 농민들에 대한 대출을 거부하는 은행은 국유화할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격돌

그러나 반정부 세력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2002년 1월 13일, 베네수엘라의 “유력” 일간지 〈엘 나시오날〉에는 “카라카스 군대 선언”이라는 제목의 문건이 실렸다. 차베스에게 정책의 방향을 바꾸라는 경고문이었다. 1월 23일에는 친정부 시위대와 반정부 시위대가 모두 거리를 점거했다. 그 시위에 자신감을 얻은 기득권층은 언론을 통해 차베스가 대중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했으며 이제는 그의 사임 여부가 아니라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떠들어 댔다.

차베스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테러와 싸우는 테러리즘”이라고 비난하자 미국은 그에게 테러리즘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라고 요구했다. 또, 베네수엘라 주재 미국 대사를 소환하기도 했다. 유가 하락과 국내외 투자 감소로 인한 경제 위기에다 지배 계급의 공세, 미국 제국주의 위협 등 안팎의 거대한 압력에 직면한 차베스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2월 13일에 그는 고정환율제를 포기했다. 그러자 곧바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올해 인플레이션은 30퍼센트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동시에, 차베스는 재정적자를 이유로 예산안을 22퍼센트 삭감하고 공공 지출을 7퍼센트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또, 콜롬비아혁명군과 연계 의혹에 시달린 내무장관도 교체했다. 차베스의 양보를 목격한 지배 계급은 더욱 자신감을 얻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최근 몇 주 동안 베네수엘라 군인·언론인·야당 정치인 들이 미국 대사관을 드나들면서 쿠데타 시나리오를 문의하는 등 차베스 축출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석유회사 경영진을 자기 주변 인사로 교체하자 이를 계기로 대중을 동원해 시위를 벌이는 한편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결국 이번 쿠데타는 가톨릭 교회·부패한 노조 관료 집단 등과 손잡은 자본가 계급이 도시 빈민과 농민·노동자의 지지를 받는 포퓰리스트 정부를 타도하려 한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