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칼럼에서 여성 차별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가족의 형성이 핵심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칼럼에서는 자본주의 탄생과 함께 가족의 구실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겠다.

산업 자본주의 전에 존재한 농민 가족은 생산 단위였다. 남성은 가정의 우두머리이지만 여성과 자녀들도 집에서 생산 활동에 종사하며 가계 소득에 기여했다.

여성과 자녀들은 가족 농경지에서 일하고 가축을 돌봤다. 여성은 당시 사회의 핵심 경제 단위인 집단적 촌락 생활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산업혁명은 이런 생활 방식을 완전히 파괴했다. 노동 대중은 토지에서 쫓겨나 새로 등장하는 도시들로 몰려들었다.

역사상 최초로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노동계급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계급의 구성원들은 임금을 벌기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노동해야 했다.

옛 사회적 연계들이 파괴되고, 한동안 노동자의 가족도 해체되는 듯했다.

부부와 자녀들은 모두 공장과 광산 등에서 끔찍한 노동조건 아래 일했다.

엄청나게 많은 여성이 방직 공장에서 일했다. 1856년에 방직업 노동자의 57퍼센트가 여성이었다. 아이들은 17퍼센트였다.

여성은 종종 최악의 노동조건에서 가장 힘든 일을 했다. 1850년대에 올덤에서는 여성 8명 중 1명이 25~34세 사이에 죽었다.

자본주의의 이런 야만성 때문에 노동자들은 가정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하거나 고된 일에서 잠시나마 해방되기를 바랐다. 노동자들은 남성이 아내와 자녀 부양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가족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요구가 순전히 남성에게 유리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남성이 가정에서 여성을 계속 억압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임금 덕분에 남성 한 명의 임금으로 한 가족이 생활할 수 있었다. 그 전에는 같은 액수의 임금을 벌기 위해 일가족 서너 명이 일해야 했다. 그래서 가족임금 덕분에 여성과 아이들이 힘든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산업 자본주의의 가혹한 현실에서는 가정에 고립되는 것이 일과 자녀 양육을 함께 하는 것보다 나았다.

대다수 여성에게는 ‘믿을 만한 밥벌이꾼’을 남편으로 삼는 것이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보였다.

‘사적 가족’

그러나 이런 ‘사적(私的) 가족’이 자본주의의 특징이 된 것은 단지 아래로부터의 압력 때문이 아니었다. 자본가 지배계급은 ‘가정 가치관’을 노동자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이데올로기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차세대 노동자 양육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공짜로 전가했다.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이 건설됐다. 이것은 과거의 낡고 허름한 오두막들보다 크게 나아진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주택들은 핵가족 구조에 맞게 건설됐다.

이런 집은 보통 분리된 침실들과 부엌으로 이뤄졌고, 어떤 경우에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앞마당이나 작은 정원도 있었는데, 이것은 부모 두 명과 자녀 몇 명이 살기에 알맞은 크기였다. “남성의 집은 그의 성(城)이다” 같은 말이 등장했다.

물론 많은 노동계급 여성은 여전히 가정 밖에서 일했지만, 이제 가정주부가 여성의 주된 구실이 됐다.

이와 함께 현모양처의 전형적 특징 ― 헌신성·수동성·순종성 ― 이 나타났다.

다시 한 번 여성의 기여가 평가절하됐다. 모든 것을 화폐단위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가정에서 여성이 공짜로 하는 노동은 무가치해 보였다.

노동계급 남성은 자본주의의 사적 가족 형성의 주된 수혜자가 아니었다. 남성이 밥벌이꾼 구실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성이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면 그는 가족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무시당할 수 있었다.

산업 자본주의의 끔직한 현실에서 가족은 노동자들이 쟁취한 피난처이자 지배계급의 경제적·이데올로기적 수단이 됐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일자리를 얻으면서 여성의 기대 수준도 다시 높아졌다.

다음 칼럼에서는 이런 변화가 이상적인 가족상과 오늘날의 여성 해방 가능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