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자본에 반대하는 투쟁
〈노동자 연대〉 구독
3월에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3백만 명이 거리를 뒤덮었다. CGIL
한국의 반자본주의 운동
한국에서는 아직 바르셀로나와 로마 같은 규모의 시위를 볼 수 없다. 그러나, 2000년 10월 서울에서도 2만 명이 모인 ASEM
그리하여 계급 투쟁은 대안을 논의하는 수준으로까지 고양됐다. 3월에 18개 진보단체가 모인 ‘연대와 성찰 : 사회포럼 2002’가 한 예다. ‘사회포럼 2002’에 참가한 단체들은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데는 모두 공감했다. 논쟁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둘러싼 것이었다. 민주노총 등은 공공성 강화
기회를 움켜 쥐기
양극화와 동시에 모순이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모순의 발전 방향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파괴적 결론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건설적 결론으로 나아갈 것인가? 그 동안 양극화는 왼쪽으로 이동해 왔다. 그러나 역류가 존재한다. 너무 강한 나머지 전체 흐름을 뒤바꿀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유럽 사회민주당 정부들의 실패는 1990년대 선거에서 부분적인 패배를 불렀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이 그랬다. 김대중의 파산은 우파가 준동할 수 있는 토양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심각한 패배를 겪지 않았다. 지금 운동은 강력한 단결과 연대를 요구한다. 따라서 대다수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고 그 기반 위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가장 효과적인 행동에 끌어들일 수 있는 기본 틀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좌파는 강 어귀의 삼각주와 같다. 썰물일 때 좌파는 말라 버린 수로가 된다. 그러나 밀물일 때는 강력한 하나의 물줄기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무엇 때문인가? 부분적으로 노동자 투쟁의 부상이다. 국제적으로는 1995년 공공 부문 총파업 이후 프랑스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한국에서도 1997년 1월 대중 파업 이래 나타난 특징이다. 그러나 더 주된 것은, 자본주의는 우리가 바라는 세계가 아니라는 새로운 각성이다. 대기업과 기성 정치 체제 그리고 그들의 무장 가신들은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의 적이다. 그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유신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상관 없이 말이다. 우리의 첫번째 임무는 이 운동을 지지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계급 운동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과 자신을 구별짓는 특수한 슬로건에서 체면을 찾는” 것은 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