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일 국가정보원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무실과 자택 등 10여 곳을 압수수색하고, 통합진보당 활동가 3명을 체포했다.
박근혜 정권은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 활동가들에게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우려 한다. 국가보안법을 빼 들어 쟁점을 흐리고 정치 위기를 돌파하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왜 지금의 마녀사냥에 맞서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관련 기사들을 재게재한다.

 


아래 글은 2007년 '일심회' 사건 당시, 글을 게재하며 실었던 편집자 주다. 

[편집자 - 이 글을 번역·소개하는 이유는 로젠버그 사건이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심회’ 사건 등 국가보안법 마녀사냥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북한 핵실험이 ‘일심회’ 마녀사냥의 계기가 됐듯이, 1949년 소련의 핵폭탄 실험을 계기로 미국 지배자들은 매카시즘의 광기를 더욱 부추겼다.

미국 지배자들은 소련의 위협이라는 두려움을 이용해 광기어린 마녀사냥을 정당화하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 급진화를 억누르려 했다. ‘일심회’ 마녀사냥에 나서며 전 국정원장 김승규는 “국민의 안보관이 너무 많이 해이해져 있다”고 말했다.

매카시즘 속에 미국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이 ‘적국 소련을 돕는 이적행위’로 공격당했듯이 지금, 한국의 공안당국은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들을 ‘이적·간첩’행위와 연결시키고 있다.

로젠버그 부부가 핵폭탄의 비밀을 훔쳐 소련에 건넸다는 혐의로 비난받았다면, ‘일심회’ 피해자들은 더욱 황당하게도 민주노동당 동향과 국내 정세 정보 등 ‘국가기밀’을 북한에 넘겼다고 비난받고 있다.

옛 공산당원인 자칭 ‘전향 간첩’들이 로젠버그 부부 공격에 나섰듯이, 옛 주사파에서 변절한 뉴라이트들도 ‘일심회’ 비난에 앞장섰다.

로젠버그 부부가 묵비권 등을 보장한 수정헌법 제5조에 근거해 마녀사냥에 맞섰듯이 ‘일심회’ 피해자들도 묵비권으로 저항했다.

미국 공산당이 로젠버그 부부 방어에 적극 나서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듯이, 오늘날 ‘일심회’ 방어에 소극적인 일부 운동 지도자들의 태도도 잘못이다.

로젠버그 부부는 광기 어린 마녀사냥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로젠버그 부부는 두 아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너희 아빠와 엄마는 죄가 없으며, 아빠와 엄마는 자신의 양심을 속일 수 없음을 너희가 기억하기 바란다”고 썼다.

50여 년 전 전기의자에서 죽어간 로젠버그 부부 사건은 오늘날 국가보안법 마녀사냥에 맞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줄 것이다.

이 글은 미국의 혁명적 사회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2003년 6월 20일치에 실린 글(http://www.socialistworker.org/2003-2/458/458_06_Rosenbergs.shtml)을 번역한 것이다.]

6월 19일은 에설 로젠버그와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처형당한 지 50년째 되는 날이다. 이 처형은 미국 정부가 국가 안보와 반공주의 투쟁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저지른 냉혹한 살인이었다. 로젠버그 부부는 핵폭탄의 “비밀”을 몰래 훔쳐서 이를 옛 소련에 건네줬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비록 공식 기소장에 적시된 혐의는 그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 사건을 주도한 매카시즘 마녀사냥꾼들은 로젠버그 부부가 “핵폭탄 간첩”이었다는 증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 준 게 하나 있다. 미국은 공산주의자들과 그 지지자들을 파멸시키려고 무슨 짓이든 ― 심지어 무고한 사람 두 명을 살해하는 짓까지도 ―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엘리자베스 셜트(ELIZABETH SCHULTE)가 로젠버그 부부 사건과 그들을 구하려던 국제 운동을 살펴본다.

“이 사형 선고는 놀랍지 않다. 마땅히 그래야 했다. 미국인들이 한국전쟁을 받아들이게 만들려면 광란의 분위기를 확산시켜야 했기 때문에 로젠버그 사건은 꼭 있어야 했다. 전쟁 예산을 증액하기 위해서도 광기와 두려움이 미국을 휩쓸어야 했다. 그리고 좌파의 심장에 비수를 꽂고 이렇게 말해야 했다. ‘이제 너희는 스미스법(Smith Act)[공산당원 탄압에 이용된 외국인등록법] 위반으로 5년형을 살거나 법정모독죄로 1년형을 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너희를 죽일 것이다!’”

―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변호사 매니 블로흐(Manny Bloch)에게 보낸 편지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이 사건을 “세기의 범죄”라고 불렀다. 그러나 간첩 혐의로 1953년 6월 19일 전기의자에서 사형당한 에설 로젠버그와 줄리어스 로젠버그 사건의 진정한 범인들은 경찰·검찰·법원을 비롯해서 로젠버그 부부를 모함하고 처형하는 일을 도와준 정부 관리들이다.

로젠버그 사건이 일어난 1950년대 초는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주도한 반공주의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한 때였다. 이 “적색 공포”(Red Scare)의 표적은 수천 명의 공산당원들과 그 동조자들, 수많은 노동 운동가들, 공민권 운동가들, 반전 운동가들이었다.

1949년에 소련이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음이 알려지자 이 마녀사냥 광기는 더한층 기승을 부렸다. 미국 정부는 미국 내에 있는 간첩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소련이 핵폭탄의 “비밀”을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가 한국전쟁 ―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전쟁이라고 떠들어댄 ― 에 뛰어들자 로젠버그 부부를 기소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정치적 분위기가 조성됐다.

로젠버그 부부는 여러모로 완벽한 대상이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과 딸이었고, 뉴욕의 노동계급 가정에서 자랐고, 두 아이의 부모였다. 이 부부가 핵폭탄 간첩이 될 수 있다면, 어느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었다.

2주간의 재판 내내 검사인 어빙 세이폴(Irving Saypol) ― 당시 〈타임〉지가 “고위급 공산당원들을 잡아넣는 미국 최고의 법률적 사냥꾼”이라고 묘사한 ― 은 줄리어스와 에설의 정치적 인맥 관계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실제로, 에설과 줄리어스는 이미 청소년기에 급진적 운동을 시작했다. 에설은 열아홉 살 때 자신의 작업장에서 파업을 주도하다 해고당했다. 줄리어스는 톰 무니(Tom Mooney)[191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폭발 사건을 일으켜 살인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조합 조직가·활동가] 사건이나 스코츠버러 소년들(Scottsboro Boys) 사건[앨라배마 주 스코츠버러에서 흑인 청년들이 백인 여성 강간 혐의로 기소된 사건. 여성을 검진한 의사가 강간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증언했는데도 모든 백인 배심원들은 피고인들에게 유죄 평결을 내렸고, 가장 어린 12세 소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았다]을 비롯한 당시의 투쟁들을 보며 급진화했다.

대공황기의 빈곤과 그 뒤 파시즘의 성장을 보며 좌파 정치에 투신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에설과 줄리어스도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들은 1943년경부터는 공산당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에 기소돼 감옥에 갇혔을 때 로젠버그 부부는 법정에서 수정헌법 제5조[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는 묵비권 등을 인정하는 조항]를 원용해 저항했다. 마녀사냥의 표적이 된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대응했다.

검사들은 로젠버그 부부가 실체 없는 간첩망의 핵심 고리임을 입증하려고 자칭 전향 간첩들과 FBI 정보원들을 줄줄이 불러내 법정 증언대에 세웠다. 그 중에는 반공 전문가로 변신한 옛 공산당원인 엘리자베스 벤틀리(Elizabeth Bentley)도 있었다. 그는 에설이 소련 정부를 위해 간첩질을 했다고 주장했다. 또, 이미 거짓말쟁이임이 입증된 해리 골드(Harry Gold) ― 그 전 여러 달 동안 영국 간첩 클라우스 푹스(Klaus Fuchs)와 접촉한 ― 는 법무부의 요구에 맞게 자신의 증언을 열심히 꾸며댔다.

그러나 로젠버그 부부를 기소한 검찰의 비밀 무기는 에설의 남동생인 데이빗 그린글래스(David Greenglass)의 증언이었다. 그린글래스를 밀고한 골드는 그린글래스가 제2차세계대전 당시 기계 기술자로 근무한 로스앨러모스의 핵폭탄 개발 프로젝트에서 기밀을 빼내 에설에게 넘겨줬다고 주장했다. 아마 그 때 핵폭탄의 비밀이 새나갔다는 것이다.

증언대에서 그린글래스는 줄리어스를 주모자로 지목했고 에설이 그 기밀 문서를 타이핑했다고 말했다. 2001년에 그린글래스 ― 가명을 쓰며 몰래 숨어살던 ― 는 당시 자신의 형량을 낮추고 아내를 보호하려고 FBI와 뒷거래를 했다고 고백했다. 그린글래스가 소련측에 넘겨줬다는 유치한 핵폭탄 그림 복사본을 제외하면, 재판 당시 법정에 제출된 물증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피고인들의 범죄가 살인죄보다 나쁘다고 생각한다. … 나는 우리의 최상의 과학자들이 예측한 소련의 핵폭탄 완성 시기보다 몇 년이나 빨리 핵폭탄을 소련에 넘겨준 피고인들의 행위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침략했고 그 결과 5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누가 알겠는가. 피고인들이 저지른 반역죄의 대가를 수백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치를 수도 있다는 것을.”

― 선고 공판에서 판사 어빙 코프먼(Irving Kaufman)

로젠버그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하면서 판사 어빙 코프먼은 다음과 같은 선례를 만들고 있었다. 당신이 공산주의자라면 당신은 간첩이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비록 로젠버그 부부의 공식 기소장에 적힌 혐의는 “간첩 활동 음모” ― 이 죄의 법정 최고형은 사형이 아니었다 ― 였지만, 코프먼은 선고 공판에서 그들에게 핵폭탄 간첩 혐의를 적용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흔히 전시의 이적 행위에 적용되는 “반역죄”를 로젠버그 부부에게 적용했다. 그러나 로젠버그 부부가 핵폭탄 기밀 훔치는 것을 도와주었다던 제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에설에게 사형을 선고한 데는 더 흉악한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에설이 저질렀다는 범죄는 문서를 타이핑한 것뿐이었다. 이 사건 담당 검사 중 한 명인 마일스 레인(Myles Lane)은 재판 전에 열린 상하 양원 핵에너지위원회의 비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젠버그라는 이 남자를 굴복시킬 방법은 사형이나 전기의자로 그를 위협하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의 아내도 유죄 평결과 25~30년형을 선고받게 만들 수 있다면, 이 놈이 실토하게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995년에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베노나 문서철(Venona documents) ― 옛 소련 관리들과 미국 내 소련 간첩들이 주고받았다는 전보들을 해독한 자료들 ― 을 기밀 분류에서 해제했다. 이 자료들을 보면, 줄리어스가 몇 가지 사소한 간첩 행위를 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에설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설은 줄리어스가 실토하도록 만들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까지 밀고하게 만들고자 지렛대로 이용됐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매카시즘의 논리였다. 네가 살려면 동료를 밀고하라. 그리고 이런 밀고를 계속 이어나가라. 그러나 로젠버그 부부는 매카시즘의 논리를 거부했다. 비록 그들이 싱싱교도소의 담장 너머에 서로 격리된 채 갇혀 있었지만, 그래서 어린 두 아들 마이클과 로버트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은 타협을 거부했다.

그들은 혐의를 시인하고 고백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법무장관의 마지막 제안에 이렇게 답변했다. “정의는 최고가를 부르는 입찰자에게 팔리는 싸구려 보석이 아니다. 우리가 처형당한다면, 무고한 사람이 살해되는 것이고 이것은 미국 정부의 수치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살든 죽든 역사는 우리가 미국 역사상 가장 극악한 음모의 희생자들이었다고 기록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한없는 고독과 어둠침침한 무덤 같은 억압적 분위기가 우리와 … 외부 세계의 강력한 연대를 단절시켜서는 안 됩니다. 여기 갇힌 우리는 우리의 무고함을 항변하고 굳건하게 버틸 수 있을 뿐입니다. 사형집행인의 손을 붙들어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미국인들의 과제입니다.”

― 줄리어스가 에설에게 보낸 편지

마침내 로젠버그 부부 구명 운동에 고무된 수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항의에 나섰다. 런던·파리·로마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많은 좌파 활동가들이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장-폴 사르트르, 넬슨 올그런[미국의 작가], 대실 해밋[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의 창시자로 불리는 미국 작가], 장 콕토[프랑스의 시인·소설가·배우·영화감독·화가],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 등 저명한 학자·작가·예술가들이 이 운동에 동참했다.

미국의 운동은 느리게 시작됐다. 그러나 1951년 8월에 윌리엄 류벤(William Reuben) 기자가 ‘로젠버그 유죄 평결 ― 냉전기의 미국 판 드레퓌스 사건인가?’라는 제목으로 쓴 7부작 기사의 첫 기사가 좌파 신문 〈내셔널 가디언〉National Guardian)에 실렸을 때, 운동은 본 궤도에 올랐다. 자신의 글이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키자 류벤은 ‘로젠버그 부부 정의 구현 위원회’(Committee to Secure Justice for the Rosenbergs)의 출범을 도와주었다.

유명한 자유주의자들은 로젠버그 부부를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자신들 고유의 더 온건한 반공주의로 매카시즘에 대응했다. 그러나 운동 초기에 공산당도 투쟁을 지도하기를 거부했다. 소련을 위한 간첩 행위를 했다고 의심받던 공산당은 소련 지도자들에게 더 많은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는 행동을 일절 꺼렸다.

그럼에도 로젠버그 부부 구명 운동을 위한 위원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서 저마다 이 사건의 불의와 부당함을 설명하는 발간물들을 펴냈다. 투쟁의 열기가 고조됐고, 뉴욕에서 대규모 시위가 몇 차례 벌어졌다. 1952년 12월 싱싱교도소의 로젠버그 부부에게 지지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1천 명이 뉴욕의 오시닝(Ossining)에 모여들었다. 그들이 싱싱교도소로 출발하려 하자 경찰이 이들을 막았다. 그들은 비를 맞으며 로젠버그 부부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렀다.

지지자들은 로젠버그 부부의 목숨을 구하려는 마지막 노력으로 사형 집행 예정일 하루 전에 거의 1만 명이 모여 철야 시위를 벌였다. 불행히도 그 시위는 너무 작았고 너무 늦었다. 대법원에 아홉 번이나 상고하고,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사면권을 행사하라고 거듭 요청하고, 대법관 윌리엄 더글러스가 마지막으로 사형 집행을 보류했음에도 1953년 6월 19일 로젠버그 부부는 처형당했다. 이 날은 그들의 14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가 저지른 끔찍한 불의를 폭로하려는 그들의 확고한 의지와 더 나은 세계가 가능하다는 그들의 신념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로젠버그 부부가 대통령에게 보낸 호소문에서 에설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순교자나 영웅이 아니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기에는 아직 젊습니다. 너무 젊습니다. 우리는 어린 두 아들 마이클과 로버트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 우리는 언젠가 사회에 복귀해서 평화와 빵과 장미가 충만한 세계를 건설하는 데 우리의 에너지를 쏟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에게 정직한 사람들만이 지닌 소박한 존엄을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