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을 이용한 탄압이 ‘간첩’ 색출을 넘어 단순한 사상·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데까지 이르렀다. 지난 1월 두 전교조 교사가 ‘선군정치’ 찬양 혐의로 구속됐고, 얼마 전 또 한 명의 교사가 보안경찰의 출두요구를 받았다. 강정구 교수 재판에서 법원이 강 교수를 법정구속하려 한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또한, 보안경찰은 2월 24일 국가보안법 철폐 집회에 참가한 후 귀가하던 민주노동당 서울시 학생위원장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폭력 연행했다.

“민주주의를 완성했다”는 노무현 정부의 구역질나는 위선이 다시 한 번 폭로되고 있다. 그런데 공안기구들이 다시 탄압을 강화할 수 있게 된 데는 좌파의 잘못된 대응이 한몫하고 있다.

‘일심회’ 사건은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민주노동당 안의 PD 경향들은 거의 모두 ‘일심회’ 사건에 침묵했다. 오히려 ‘자율과 연대’나 일부 ‘전진’ 활동가들은 마녀사냥의 피해자들에게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 심지어 분파주의에 눈이 멀어 이 기회에 탄압받는 동지들을 내치자는 주장도 있었다.

이들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민주노동당이 ‘친북 정당’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민주노동당이 북한 지배계급에게서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북한에 우호적인 좌파를 비난하면서도 남한 지배자들의 억압에 침묵하고 이를 방조함으로써 사실상 남한 체제에 충성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

‘자율과 연대’는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줬다. 그들은 남한 체제가 북한보다 질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북한은 똑같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데 바탕을 둔 자본주의 체제다. 비록 남한의 정치체제가 북한보다는 자유주의적이지만, 이조차 남한 노동자와 학생의 처절한 투쟁으로 권력자들에게 강제해 낸 것일 뿐이다.

사실, PD들은 자유주의 정부 등장 이래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됐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철폐 같은 민주주의 과제가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서구에서조차 민주주의 문제는 운동의 주요 쟁점이 되곤 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본질이 자본가 계급(부르주아지)의 지배이기 때문이다. 1999년 시애틀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미국 정부와 2001년 제노바 G8 반대 시위대에 발포해 카를로 줄리아니를 쏴 죽인 이탈리아 정부의 사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질을 잘 보여 줬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공세와 ‘테러와의 전쟁’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유민주주의 정부는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억압 조처들(테러방지법, 국토안전법 등)을 도입했다.

하물며 남한처럼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권위주의적 유산과 반동 세력의 준동이 여전히 존재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 과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심지어 대다수 당내 PD들은 ‘국가 주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상 간첩죄는 당연하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래서 ‘사상의 자유는 있지만 그것을 실천해서는 안 된다’는 공안검찰의 논리에 부화뇌동하기까지 했다.

언제부터 ‘악법도 법이다’가 우리 운동의 미덕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일 법학자 라드브루흐조차 “악법에 복종하는 것은 범죄 행위”라고 했다. 결국 당내 PD들의 기회주의는 지배자들의 ‘이간질시켜 각개격파하기’ 책략을 도와주는 꼴이 됐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의 주요 표적들인 주사NL 분파들도 마녀사냥 반대 투쟁에 충분히 적극적이지 않았다.

NL 조직들은 국가보안법의 성격을 애써 반통일·냉전 악법으로만 한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2·13 합의로 북한과 미국 사이에 종전선언·평화협정이 체결되는 상황이 오게 되면 국가보안법에 기반한 수구·냉전 세력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라고 낙관한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구속자의 90퍼센트 이상이 표현의 자유 문제와 관련한 7조 위반자들이다. 반면 ‘간첩죄’와 ‘회합·통신’ 등 “남북 교류” 관련 위반자들은 3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또, 2000년 6·15 공동선언이 있은 지 몇 달도 안 된 11월에 ‘국제사회주의자들’ 5명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다. 전보다 줄긴 했지만 국가보안법 구속자는 6·15 공동선언 이후에도 해마다 평균 1백20여 명이 넘었다.

대중파업

남북관계가 좋아져도 국가보안법이 약화할 가능성은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이 유신 독재 강화에 이용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오히려 국가보안법의 약화·폐지에 더 결정적인 것은 구체적인 계급 세력 관계다. 국가보안법이 냉전 악법이기도 하지만 내부의 저항을 억압하는 체제 수호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북핵 위기와 김일성 조문 파문 등 남북 관계가 경색됐던 1994년에 김영삼은 4백67명을 국가보안법으로 검거했다. 반면, 1996∼97년 사이에는 무려 1천4백11명이 검거됐는데, 당시 탄압의 맥락은 남북 관계 문제라기보다는 경제 위기 조짐이 보이면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분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 들어 국가보안법 구속자 수가 줄기 시작한 데는 사실, 김영삼 정부를 붕괴시킨 1997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항의 대중파업이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중파업으로 민주노총이 실질적 합법화를 쟁취했고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노동자 대중정당인 민주노동당이 건설돼,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대중적 노동자 조직의 합법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국가보안법 적용면에서 지배자들은 PD계열의 단체들을 관용하고 ‘주사파’나 혁명적 좌파 탄압은 지속하는 ‘이간질시켜 각개격파하기’ 전략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을 냉전 악법이라고만 보고, 그 폐지가 남북관계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은 실천에서 개량주의로 흐를 수 있다. 남북 지배자들의 협상에 기대거나 북한에 좀더 유화적인 입장을 가진 자유주의 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속죄양

이런 태도로는 자유주의 정부 하에서 벌어진 국가보안법 사건들을 궁지에 몰린 “공안기관의 고용안정 투쟁”으로만 규정하기가 쉬운데, 이는 오해다. 자유주의 정부들의 보안법 적용은 단지 우익의 압력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억누르는 데 우파와 근본적으로 같은 이해관계를 갖는다.

김영삼은 야당 시절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했다가 “집권해 보니 국보법이 필요하더라”고 했다. 김대중 정부의 법무장관 박상천은 “경제 위기 때문에 국보법이 필요하다”고 털어놓았다.

다른 한편, NL 진영이 대부분 ‘일심회’ 사건 등에서 동료들을 적극 방어하지 않은 데는 북한 정부의 처지를 난처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고려된 듯하다. 그러나 북한 지배자들의 이익과 남한 민중의 이익은 같지 않다.

노무현 정부가 ‘일심회’ 사건을 터뜨리는 이유는 북한 핵실험에 진노한 우익을 달래고, 열우당 붕괴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속죄양을 삼기 위해서다. 특히 운동 세력을 친북 세력으로 몰고 그럼으로써 내부를 이간시키는 효과를 지배자들은 노린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희생자를 방어하고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려는 운동은 매우 개방적이고 보편적인 요구로 광범한 세력을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강정구 교수 대책위의 일부 주장처럼 강 교수의 사상에 동의해야만 그를 방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입장 차이를 떠나 사상과 양심·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친민주주의 세력이 모두 힘을 합쳐 국가보안법과 마녀사냥에 맞선 투쟁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