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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에세이:
사회적 자본, 사회적 투자국가, 노무현 정권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최근 사회적 자본 이론, 사회적 투자국가론이 진보진영 일각에서 유행하고 있다. 그 중에는 사회적 자본의 확충, 사회적 투자국가 수립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노무현도 지난 1월 신년연설의 상당 부분을 사회적 자본, 사회적 투자국가 등의 용어로 채운 바 있다. 노무현은 “신뢰·통합 등 사회적 자본 투자가 충실해야 지속 발전이 가능”하고 “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에, “신뢰가 바로 선 사회, 통합이 잘 되는 사회”, “사회적 자본이 충실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사람에 대한 투자”인 “사회투자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착취적 자본, 이윤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투기적 투자와 다른 사회적 자본 또는 사회적 투자라는 개념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자본이란 개념은 원래 문화자본론을 주장한 부르디외(P. Bourdieu)가 처음 비유적으로 도입한 개념인데, 이를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한 것은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퍼트넘(R. Putnam)이다.

퍼트넘에 따르면 사회적 자본이란 신뢰, 신용, 도덕적 의무감, 사회적 연결망, 네트워크 같은 것들이다. 사회적 자본 이론에 따르면 경제 발전에는 물적 자본, 경제적 자본뿐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 큰 구실을 한다.

예컨대 신뢰는 경제 주체들 간의 필수적 규범으로 기능하여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세계은행

퍼트넘은 1980년대 이후 미국 경제가 쇠퇴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 같은 현상에서 보듯이 공동체 문화가 와해돼 사회적 자본이 고갈된 것이라고 주장한다.(하지만 퍼트넘은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는 이 사건이 미국에서 ‘애국주의’를 고조시켜 사회적 자본을 재건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한국이나 최근 중국이 다른 제3세계 나라들과 달리 고도 성장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나라에 고유한 교육열이나, 화교 네트워크 같은 사회적 자본 덕분이라고 주장된다. 한국과 중국의 고도성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 경제학이 아니라 사회적 자본을 핵심 요소로 하는 ‘발전의 사회학’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사회적 자본 이론은 지난 세기 말부터 세계은행이 적극 수용한다. 세계은행은 제3세계의 빈곤과 저개발의 원인을 이들 지역에서 사회적 자본의 부족에서 찾고, 제3세계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적 자본의 확충을 통한 사회 통합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점에서 사회적 자본 이론은 세계은행과 같은 제국주의 기구들이 제3세계의 노동조합과 NGO를 비롯한 사회운동들을 각종 정책 토론과 발전 프로젝트로 끌어들여 이들을 체제에 위협적이지 않은 세력으로 편입하기 위한 도구임이 드러난다.

즉, 사회적 자본 이론은 신자유주의를 대신해 21세기 세계 자본가 계급의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로 떠오르고 있는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Post Washington Consensus: 대표적 주창자는 전직 세계은행 부총재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이다)의 핵심 이론이다.

이른바 ‘시장의 효율적 작동’,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착취와 축적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하이에크 같은 원조 신자유주의자들이 신봉했던 자유시장 만능주의가 아니라, ‘조절된 시장’의 구축 및 이를 위해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 거버넌스, 사회적 자본의 확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자본을 개선·확충하는 정책들은 이른바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를 개선해서 ‘시장의 효율적 작동’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자본 이론은 자본주의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면서도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경제적 합리성을 긍정한다. 사회적 자본 이론은 신자유주의의 시장 근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사회적’·‘정치적’ 등의 미사여구로 분식한 것일 뿐이며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근본 원리에 도전하지 않는다. 사회적 자본 이론의 주요 개념인 ‘네트워크’ 개념 역시 신자유주의 신고전파 경제학과 쉽게 조화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 구조와 정면 대결하지 않고 신자유주의의 시장 경제학을 비판하려는 케인스주의자들이 사회적 자본 이론을 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본적 효율성을 옹호하면서도 단지 그것의 ‘불완전성’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케인스주의자들에게 사회적 자본 이론은 이러한 ‘불완전성’을 사회적 측면에서 보충해 줄 수 있는 도구로 간주된다.

한 마디로 사회적 자본 이론은 ‘좌파 신자유주의자’ 노무현에게나 어울리는 신장개업한 신자유주의 수사학일 뿐이다.

따라서 혹시라도 일부 진보진영이 사회적 자본이나 사회적 투자는 투기적 자본이나 투기적·반인간적 투자보다는 바람직한 것이니, 반신자유주의 차원에서 이들 정책 자체는 비판적으로 지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일 것이다.

그 경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의 포섭은 필연적이다. 사실 사회적 자본 이론 자체가 진보진영의 담론과 운동을 교란·분열시켜 체제 내로 통합시키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서 의도된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좌파 신자유주의

진보진영은 마르크스의 자본 개념을 근본에서 부정하는 사회적 자본 이론을 전면 폐기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 개념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자본은 ‘시장사회주의’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형용모순의 사이비 개념이다. 사회적 자본 개념은 자본 개념을 문어발식으로 확장한 나머지, 임금노동의 착취에 기초한 사회적 관계로서 역사특수적인 자본 개념을 제거한다.

사회적 자본 개념은 경제적 형태의 자본(산업자본·상업자본·금융자본 등)이 사회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개념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산업자본·상업자본·금융자본과 같은 ‘경제적 자본’은 이들을 지탱해 주는 사유재산 제도나 자본주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개념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자본 이론은 협의의 ‘경제적 자본’이 비사회적이라고 전제함으로써, ‘사회적인 것’과 자본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킨다. 반면, 사회적 자본 이론은 신용·신뢰·정직 등을 무차별적으로 자본으로 간주함으로써, 자본 개념에 고유한 경제적·계급적 내용을 제거한다.

그러나 자본 개념에 핵심적인 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영구적 운동이라는 환원될 수 없는 경제적 내용이다. 사회적 자본 이론처럼 모든 사회적 관계를 무차별적으로 자본으로 간주할 경우, 본질적으로 착취적인 위계적 계급 관계로서 자본의 특성을 이해할 수 없다. 사회적 자본 이론은 자본으로 개념화할 수 없는 ‘사회적인 것’을 부당하게 자본화할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사회적 개념인 자본에서 사회적 내용을 박탈한다. 그리하여 사회적 자본 이론은 사회가 아니라 자본에 봉사한다.

최근 세계 지배계급의 담론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이미 사회적 자본 이론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자유주의’(노무현이 얼마 전 ‘좌파적 신자유주의’라고 부른 것), 즉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로 이동했다. 자유시장 지상주의, 시장 근본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미 한물갔다. 세계 자본가 계급들이 신자유주의 카드를 내리고, 그 대신 사회적 자본, 사회적 투자국가 카드를 흔들고 있는데, 진보진영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반신자유주의’의 문제설정에 갇혀 있다면, 뒷북칠 우려가 있다. 진보진영이 신자유주의가 현 체제의 핵심 문제라고 비판한다면, 노무현을 비롯한 지배계급은 자신들은 이미 신자유주의 정책을 접었으며 사회적 자본 확충과 사회적 투자국가 수립에 매진하고 있다고 응수할 수 있다.

진보진영은 최근 유행하는 사회적 자본 이론이나 사회적 투자국가론,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 등 케인스주의의 각종 변종들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본질을 인식하고, 단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항대립적 반대를 넘어서 1999년 시애틀 투쟁에서 분출했던 ‘반자본주의 정서’에 기초하여 ‘21세기 사회주의’를 구현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