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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진영의 독자 출마가 이회창을 이롭게 하는가

진보 진영의 독자 출마가 이회창을 이롭게 하는가

정병호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지지하는 이유는 수구 정치인 이회창에게 발견할 수 없는 ‘개혁적 이미지’를 노무현에게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빌라 게이트’로 이회창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노무현이 급부상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노무현 지지율이 급상승하면서, 민주 개혁을 바라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노무현이 이회창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홍세화 씨는 이회창을 떨어뜨리기 위해 진보 진영이 “유연성”을 발휘해 노무현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 민주 개혁을 성취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러나 노무현이 민주 개혁을 선사해 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노무현은 김대중을 추종한다. 그러나 김대중 집권 4년은 정확히 배신의 역사였다.

세간에서 김대중의 치적 중 하나로 꼽는 것이 언론 개혁이다. 그러나 김대중의 언론 개혁은 수구 언론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을 등에 업고 반대파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정치적 시도였다. 이것마저 탈세 언론사 사주를 구속했다가 금세 풀어 주는 식으로 끝났다.

또, 김대중의 햇볕 정책은 남북 화해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그러나 김대중은 한반도 평화의 최대 위협 세력인 미국에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 화해는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게다가 햇볕 정책은 동쪽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추진하면서 서해에서는 북한과 교전하는 모순된 정책이었다.

또, 부패방지위원회 위원장으로 김대중이 내정한 자가 부패 혐의에 연루되는가 하면, 사립학교법 개정 시도를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매도한 한나라당의 반동적 선동에 타협했다. 결국 지난 4년 동안 김대중이 우리에게 선사한 민주 개혁은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렵다.

김대중을 “확실히 계승하겠다”는 노무현은 김대중과 다를까? 노무현은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사장들이 낸 돈으로 운영되는 정당 출신이다. 이 때문에 노무현은 근본에서 사장들의 이익을 거스를 수 없으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민주 개혁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야 하는 모순된 처지에 있다. 노무현이 말하는 개혁 역시 좌충우돌하다 결국 대중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 될 공산이 크다.

강준만 교수는 노무현의 당선이 진보 진영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넓게 보면 노무현은 진보 정당의 국회 진출에 혁명적인 기여를 할 수도 있다.”그러나 노무현 당선이 진보 진영에게 그다지 이로울 리 없다. 김대중도 진보 진영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진보 진영의 활동을 훼방놓고 탄압했다. 김대중이 1997년에 대선 공약으로 공무원 노조 합법화를 약속했지만, 정작 공무원 노조 출범식장에 경찰을 보내 무참히 짓밟았다. 또, 2000년 4·13총선 당시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낙천낙선 운동을 ‘불법 선거 운동’이라며 탄압했다. 1997년 대선에서 국가보안법 개정을 약속한 김대중은 정치 위기에 빠질 때마다 좌파들을 마녀 사냥했다. 김대중 정권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한 사람은 노태우·김영삼 정권 때보다 더 많다. 노무현에게 기대를 걸다가는 김대중에게 당한 경험을 다시 되풀이할 것이다.

진보 후보 출마 = 이회창 돕기?

어떤 사람들은 진보 진영이 이번 대선에 독자 후보로 출마하면 노무현 지지표가 분산돼 결국 이회창을 돕는 게 아니냐고 우려한다. 어차피 진보 후보를 지지하는 표는 ‘사표’가 될 터이니, 노무현의 당선을 위해 아예 출마하지 않는 게 좋다는 투다.

이러한 태도는 2000년 미국 대선 때 녹색당의 랠프 네이더 지지자들에게 쏟아진 비난을 연상시킨다. 민주당의 고어가 공화당의 부시에게 패배하자, 고어의 지지자들은 네이더가 출마해 고어 지지표를 가져갔기 때문이라며 네이더와 네이더 지지자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네이더를 지지했던 영화배우 팀 로빈스는 이렇게 반박했다. “클린턴 시기 민주당의 결정적 우경화를 목도하고 나서, 전략적으로 투표하기보다는 나의 양심에 따라 투표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한겨레21〉 2001년 9월 6일치.)미국 대선에서 고어를 지지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심지어 부시에게 투표한 일부 사람들도) 결정적으로 민주당에 실망한 사람들이었다. 고어가 패배한 탓을 네이더에게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다. 진보 진영 후보 출마가 이회창을 돕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이회창을 키운 것은 김대중이었다. 김대중 정권의 실정과 부패로 김대중 지지율이 85퍼센트에서 16퍼센트까지 떨어지는 동안 이회창 지지율은 ‘호화 빌라 파문’ 직전에 50퍼센트까지 상승했다. 김대중 집권 초 한나라당 지지율은 10퍼센트도 안 됐지만, 지금은 24퍼센트나 된다. 사정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총체적 부패가 가장 큰 몫을 했다.

이회창이 당선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진보 진영 탓이 아니다. 또, 진보 진영에 가는 표를 ‘사표’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진보 후보가 출마해 영향력 있는 득표를 한다면, 이것은 차기 정권을 왼쪽으로 미는 압력이 될 수 있다. 프랑스 대선에서 노동자 해고 금지를 내세운 ‘노동자투쟁’당의 아를렛트 라기예르 등 극좌파들이 10퍼센트 이상 지지를 받자, 사회당은 총선 정책을 좀더 왼쪽으로 틀어야 했다.

결국 진정한 민주 개혁은 기업주들로부터 독립적인 정치 세력, 즉 노동 계급에 기반한 진보 정당의 성장과 광범한 대중 투쟁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진보 진영이 노무현에게 양보하는 “유연성”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독자 출마해 신자유주의와 부정 부패에 대한 급진적 대안을 내세워 광범한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안이다.

민주노동당의 울산 선거 승리를 위해

일각에서는 “민주노동당과 노무현이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성공회대 정해구 교수는 “울산시장 선거에서 민주당은 후보를 내지 않고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하고 말했다. 그러나 울산시장 선거에서 민주당과 ‘협력’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에게 결코 이롭지 않다. 민주당은 대중적 원성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인데다 김대중 아들들의 비리까지 겹쳐 인기가 형편없이 떨어져 있다. 게다가 울산은 노동자 거주지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계급적 반감이 강한 곳이다. 우리 당이 울산에서 승리하려면 노동자들의 계급적 반감을 충분히 수용해야 한다. 그래야 계급 투표가 이뤄질 수 있다. 한나라당은 이것을 우려한다. 그래서 우리 당과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 한다. 한나라당이 우리 당 송철호 후보와 노무현의 “연대론”을 퍼뜨리고 있는 이유다. 우파 신문 〈조선일보〉도 같은 맥락에서 “아직 후보가 없는 민주당은 후보를 안 내 민주노동당을 도울 가능성이 있다.” 하고 슬쩍 흘렸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일각에서 주장하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간의 협력”은,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민주노동당에게는 자멸 행위다. 매우 옳게도, 송철호 후보는 자신이 “민주노총 후보”이자 “노동 시민 후보”로서 “노동자 정치 세력화”에 복무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김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