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노동자들에게 굴복했다.” 1987년 경원제지 회장이 한 이 말은 그 해 남한 자본가 계급 전체의 심정을 반영했다.

1987년 전국의 노동자들이 들불처럼 일어섰다. 7월∼9월 석달 동안 3천3백41건의 쟁의가 벌어졌다. 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벌어진 전체 노동쟁의 건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것이다. 대투쟁이 일어난 후 1년 안에 노조가 4천 개나 새로 만들어졌고 노동자 약 70만 명이 노조에 새로 가입했다.

당시 남한 경제는 이른바 ‘3저 호황’을 누렸다. 경제 성장률이 1986년에는 12.5퍼센트를 넘었다. 그러나 이런 초고속 성장은 노동자들이 흘린 땀과 피의 결과였다.

박정희 정권 이래 군부 독재는 압축 성장을 위해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쥐어짰다. 1987년 대투쟁 직전에도 전체 산업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한국노총의 4인 가족 최저생계비와 비교했을 때 62.6퍼센트밖에 안 됐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3.7시간에 달했고 한 해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이 14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군부 독재는 자본가들의 ‘작업장 독재’의 보루였다. 노동자들은 거의 완전한 무권리 상태에 놓여 있었고 군대식 노동규율이 난무했다. 예를 들어 현대그룹 노동 현장을 묘사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뒷머리가 상의 칼라만 살짝 덮어도 정문을 지키는 경비대의 바리깡이 사정없이 지나갔고 작업 지시는 곧 명령이었으며 일과는 복종의 연속이었다.”

1987년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이런 군부 독재를 끝장내고 ‘작업장 독재’에 타격을 입힌 위대한 반란이었다. 6월 민주화 투쟁이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고무했다.

6월 민주화 항쟁

6월 민주화 투쟁에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조직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통제하는 한국노총은 전두환의 군사 독재 연장 선언인 ‘4·13 호헌 조치’를 찬양했다. 한국노총의 통제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몇몇 중소 작업장에서 민주노조 운동이 있었지만 이조차 1985년 들어 전두환이 억압을 다시 강화하자 위축됐다. 운동의 정치적 상징 구실을 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민운동본부) 발기인 2천1백91명 가운데 39명만이 노동자대표들이었다.

그러나 6월 민주화 항쟁이 학생과 중산층의 투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거리에서 정치적 지도는 좌파 학생·청년이 제공했지만, 시위 참가자 면에서 노동자들은 대거 개별적으로 이 투쟁에 참가했다.

성남시가 작성한 〈6.20∼6.21 가두시위 종합보고서〉를 보면, 이 기간에 경찰에 연행된 사람들은 “근로자 34명, 대학생 8명, 고교생 4명, 재수생 4명, 상업 9명, 막노동자 6명, 무직 11명, 기타 4명”이었다. 즉, 막노동자와 실업자를 포함하면 노동계급이 63.7퍼센트를 차지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공장 밀집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사무직 노동자들도 점심 시간이나 심지어 근무시간에도 관리자에게 핑계를 대고 시위에 합류하곤 했다.

날이 갈수록 노동자들의 참가가 점점 두드러지면서 투쟁이 심화되자 정부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는 결국 6·29 선언을 발표해야 했다. 최장집 교수는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자유화 조처는 잘못하면 수많은 공장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올 [것을] 우려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노동자들은 지배자들의 바람과 달리 정치적 민주화 운동에 멈추지 않았다. 6월 민주화 항쟁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거리에서 벌인 투쟁에 밀려 군사 독재 정부가 물러서는 모습을 봤다. 노동자들의 생각은 더 나아갔다. 그렇다면 작업장에서는?

전 통일노조 진영규 위원장은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6월 민주화 투쟁] 집회가 끝나면 주로 양산박에 모였어요. 거기서 술 마시면서 영웅담을 늘어놓았죠. 그때 자연스럽게 우리도 조합 한번 뒤집자, 한번 일어나야 한다 [하면서] 민주노조를 이야기했죠.”

6월의 정치투쟁이 7월에 시작된 노동자들의 대반란에 자신감을 준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에서 지적했듯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이 서로 갈마들고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이는 오늘날 노동자들이 한미FTA 반대 운동이나 반전 운동 같은 정치적 투쟁에 참가하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준다.

6·29 선언 일주일 뒤인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 1백여 명이 울산 시내 디스코텍에 모여 기습적으로 노조를 결성했다. 이에 고무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없다”던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의 눈에 진짜 흙을 뿌리며 일어섰다. 이것은 전체 노동자들에게 반란을 알리는 봉화였다.

울산발 파업 열풍은 주요 중공업 중심지인 부산·창원·마산으로 확산됐다. 8월 중순에는 파업 열풍이 경공업 지대인 경인 지역과 전라도로 번져,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거의 어디서나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불법 파업

한 학자는 당시 “수동성과 침묵”이 특징이던 대기업 노동자들이 투쟁의 주축으로 나선 것을 “놀라운 발전”이라고 평가했다. 이 ‘보수적인’ 대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하청 회사 등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 공간을 열어 주었다.

또, 중공업 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이 부문을 뛰어넘어 운수·사무·서비스 등 다른 업종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무했다.

투쟁은 자생적이었다. 임영일 전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소장은 “준비된 파업은 거의 없었으며 활동가들에 의해 사전 준비 작업이 진행됐던 몇 안 되는 사례들에서도 대중의 진출 속도와 규모, 격렬성에 비춰 볼 때 그 준비는 이미 큰 의미가 없는 것이 됐다”고 말했다.

번듯한 노조 하나 없었지만 노동자들은 “회사 내에 있는 동문회, 향우회, 그리고 산악반 등의 조직”까지 활용해 스스로 동원했다. 노동자들이 자기해방을 위해 스스로 조직하고 투쟁할 능력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 것이다.

노동자들은 협상을 위해 합법적 절차를 지키며 기다리지 않았다. 파업의 94.1퍼센트가 ‘불법 파업’이었다. 거의 모든 작업장에서 ‘일단 파업에 들어가고 나중에 협상한다’는 식이었다. 그 덕분에 노동자들의 교섭력이 극대화했다.

억압이 심했던 만큼 노동자들의 요구도 다양했다. 예를 들어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차별적인 임금체계 철폐, 두발·복장 규제 철폐, 강제적인 아침체조 중단, 점심식사 개선, 남녀평등 등을 요구했다.

노조 지도부가 어용이거나 노조 조직이 없었으므로 현장노동자들이 주도력을 발휘했다. 현장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배신하는 지도부를 현장에서 즉시 소환·교체했다. 현장노동자들의 기세는 노조 지도부조차 놀라게 해 “그들은 나의 피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고 두려워할 정도였다.

자본가들은 경악했다. “계급 혁명”의 공포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자본가들은 정부에 매달렸지만 6월 항쟁에 이어 연타를 얻어맞은 정부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와 자본은 8월 중순경 전열을 가다듬고 대대적 탄압에 나서기 시작했다. 탄압은 자생적 투쟁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제대로 이끌 진정한 정치조직이 없었다는 한계를 간파한 것이다. 김영삼·김대중이 이끄는 부르주아 야당은 “파업 자제”를 요구했고 국민운동본부는 계급 연합 때문에 노동자 대투쟁을 사실상 방치했다.

투쟁은 사그라들었지만 노동자 대투쟁이 한국 사회에 남긴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노동자 대투쟁 때문에 보수 반동 세력은 민주화 흐름을 뒤집을 수 없었다. 1960년 4·19 혁명과 1980년 민주화 운동이 군부의 반동 쿠데타로 좌절된 것과는 달랐던 것이다.

대투쟁 과정에서 생겨난 연대 의식으로 노동자들은 기업간·지역간 연대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총 건설의 기초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무엇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언뜻 보기에 ‘보수적’이고 ‘실리’밖에 모르는 듯하던 평범한 노동자들이 실제로는 체제를 마비시키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맞선 저항을 건설하려는 후예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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