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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이론은 국민적 단결 신화를 어떻게 보는가?

TV와 기성 신문은 월드컵 대회를 이용해 민족주의를 한껏 부추긴다.

사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월드컵이든 학교의 역사 수업이든 병역 의무든 압력은 언제나 똑같다 ― 너는 한국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우리 나라가 최고라고 믿어라.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다른 나라의 어린이들도 모두 자국의 우월성을 믿도록 교육받는다. 어디서든 그렇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처럼 터무니없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지배자들한테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들은 애국심이 모든 사람의 몸에 배어 전혀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애국심은 우리 나라 사장과 노동자가 다른 나라 사장과 노동자에 대항하는 공동의 이해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강화한다. 또한 애국심은 국가의 권력과 권위를 강화한다. 이것은 착취자가 피착취자를 계속 지배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가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이유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를 국가의 관점이 아니라 계급의 관점에서 본다. 즉, 세계는 근본에서 국가가 아니라 계급에 따라 분열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국가 내부의 계급 대립이 없어져야 국가 상호 간의 적대적 대결도 사라질 것이다.

국민 국가의 틀을 받아들이는 기성 정치인들과 일부 개혁 지상주의자들은 IMF 관리 체제 초기에 “우리 경제를 살리자”, “우리 나라가 다시 일어서게 만들자”고 외쳐 댔다.

하지만 이 말은 잘못됐다. ‘우리’ 경제, ‘우리’ 나라는 없다. 둘 다 지배 계급의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 경제”, “우리 나라”를 이야기하는 개혁 지상주의자들은 스스로 지배 계급의 포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그 같은 생각을 노동 계급 내에서도 강화한다.

부르주아지는 노동 계급을 자신에게 묶어 놓기 위해 민족주의가 필요하다. 반대로, 노동 계급은 자신의 독립성을 확립하기 위해 국제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사회 근본 변혁이 한 나라 안에서만 성공할 수는 없기 때문에 국제주의가 필요하다. 사회 근본 변혁이 일국에서 고립되면 세계 규모의 군사·경제 압력을 견디지 못한다. 그 나라는 세계 자본주의의 경쟁 압력 때문에 자본주의 방식을 다시 도입하게 될 것이다. 계급 착취와 차별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종속이 부활할 것이다. 1920년대 말 옛 소련의 사례가 이것을 입증한다.

국제주의는 일상의 노동조합 투쟁에서조차 점점 더 불가피해지고 있다. 다른 나라 노동자들을 서로 경쟁시키는 다국간 기업에 맞서는 최선의 방어는 노동조합 현장 활동가들이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단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국제주의는 수입 규제 정책을 거부한다. 수입 규제 정책은 다른 나라들의 보복으로 인한 경제 재앙을 부른다. 그뿐 아니라, 한국 지배 계급에 대항한 고용 안정 투쟁이, 일본·홍콩·독일·프랑스 등의 노동자들에 맞서 ‘우리 나라’ 사장들을 지지해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뒤바뀌어 버린다. 진정한 국제주의는 민족·인종적 편견을 버리고 전 세계 국민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갖는 것 이상을 뜻한다.

국제주의는 ‘인류 형제주의’(혹은 ‘인류 자매주의’)를 믿는 문제가 아니다. 마르크스 국제주의의 기본 요소는, 사회가 적대적 이해 관계를 가진 계급들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모든 남자들이 형제인 것도, 모든 여자들이 자매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국제주의는 세계를 그저 국민 국가 사이의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 자본주의에 맞서는 세계 노동계급의 투쟁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러한 투쟁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국제 노동 계급 전체의 이익이 지역과 국가에 따라 분할된 단기적인 이익보다 먼저라고 본다. 이와 같은 국제주의는 대중 매체에서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고 떠드는 정책들과 아주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