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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붉은 사원’ 학살:
‘테러와의 전쟁’이 부른 또 하나의 참극

a7월 10일 파키스탄 정부군이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붉은 사원’을 공격해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1주일 간 봉쇄 과정에서 이미 10여 명이 사망했고, 이날 새벽부터 시작된 공격과 이틀 동안 지속된 진압 작전으로 첫날에만 1백 명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빈민층 출신인 사원 부설 기숙학교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가족과 친척 들은 사원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참극을 지켜봐야 했다. 사원 안에 두 아들이 있다는 바드샤 레흐만은 로이터 뉴스 기자에게 “그[파키스탄 대통령 무샤라프]가 달러 때문에 우리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파키스탄의 친미 군사정권 독재자 무샤라프는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들에 더 강경하게 대처하라는 미국의 요구도 들어주고 국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도 강화하기 위해 이번 유혈 참사를 저질렀다.

공격 직전에 정부 고위 관리들과 사원 지도자들 사이에 타협이 이뤄졌지만 무샤라프는 끝내 이를 무시하고 무력 진압을 명령했다.

부시는 무샤라프가 “이 극단주의자들에 맞서 싸우는 전쟁에서 강력한 동맹 상대”라며 “그에게 감사한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이 극단주의자들”은 사실, 파키스탄 정권과 미국 자신이 그 지역에서 추구한 정책들의 부산물이다.

1960년대 이후 파키스탄의 역대 군사정권은 ‘붉은 사원’을 적극 후원하고 그 대가로 정치적 지지를 얻었다.

1970년대 말에 집권한 지아 울 하크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서 싸우던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통로로 ‘붉은 사원’을 이용하며 그 대가로 지금의 ‘붉은 사원’ 부지를 제공했다. 미국 CIA와 손잡고 오사마 빈 라덴 등 무자헤딘을 적극 지원한 파키스탄 비밀경찰 ISI의 본부 건물이 ‘붉은 사원’ 근처에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붉은 사원’과 파키스탄 정부의 유착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샤라프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을 지원하자 ‘붉은 사원’을 비롯한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무샤라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2004년 ‘붉은 사원’ 지도자는 아프가니스탄 접경 지대인 북서변경주(州)에서 알카에다와 전투중에 사망한 파키스탄군 병사들은 이슬람 식 장례를 치를 자격이 없다는 파트와(명령)를 내렸다. 5백 명의 무슬림 학자들이 서명한 이 명령에 군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올해 초 무샤라프 정부는 ‘붉은 사원’이 불법으로 토지를 점거하고 그 위에 기숙학교를 지었다며 이를 철거하려 했다. 기숙학교 학생들은 이에 반발해 도서관을 점거하고 오히려 샤리아(이슬람 율법)의 강제 시행을 요구하며 DVD 판매점을 공격하고 안마시술소의 중국인 여성들을 납치해 중국 정부의 거센 항의를 사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대법원장 해임을 계기로 대중적 민주화 운동이 갑자기 분출하며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했다. 미국 주류 정치권에서도 무샤라프의 통치 능력에 대한 회의가 제기됐다.

오사마 빈 라덴

그래서 무샤라프는 반정부 운동에 본때를 보여 주고 미국 지배자들에게 파키스탄에서 자신만이 정치적 대안임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무샤라프가 ‘붉은 사원’ 사태를 핑계로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피해 가려 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파키스탄의 정치적 불안정과 위기를 더 심화시키고 더 많은 충돌을 부를 공산이 크다.

이미 ‘붉은 사원’을 지지하는 수백 명이 파키스탄과 중국을 잇는 주요 고속도로를 봉쇄한 채 시위를 벌였다. 대부분 지방의 이슬람 기숙학교 학생들인 시위대는 무샤라프 정권에 맞서 성전(지하드)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공격 하루 전에는 아프가니스탄 접경 지대인 북서변경주의 바자우르에서 주민 약 2만 명이 손에 총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붉은 사원’ 봉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며 “무샤라프에게 죽음을!”, “미국에 죽음을!”이라고 외쳤다.

‘붉은 사원’ 학살 사건은 ‘테러와의 전쟁’이 정치적 불안정과 위기를 심화시켜 끔찍한 참극을 부른 또 하나의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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