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가 〈디워〉를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공 덕분에 백무현의 만화 《전두환》도 화제다.

심지어 헌책방에서나 찾을 수 있었을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넘어 넘어》)도 시중 대형 매장에 다시 등장했다. 특히 《넘어 넘어》는 386세대 운동권의 광주항쟁 입문서였는데, 생생한 현장 기록이 빼어나다. 일독을 권한다.

〈화려한 휴가〉는 등장 인물의 이름 정도를 빼면 당시 항쟁을 거의 사실에 가깝게 그렸다. 글 몇 편보다 영화 한 편이 진실을 훨씬 효과적으로 전달할 때가 있듯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계엄군의 잔인함에 전율했을 것이다.

사실, 당시 계엄군의 만행은 영화보다 훨씬 잔악했다. 여고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내기, 화염방사기로 시위하던 시민들을 불태워 죽이기, 탱크로 깔아 죽이기, 피범벅이 된 시민을 트럭에 매달아 끌고 다녀 죽이기 …. 만약 이런 장면을 다뤘다면 아마 ‘화려한 휴가’는 ‘19금’ 영화가 됐을 것이다.

어쨌든 〈화려한 휴가〉는 당시 광주의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오월의 노래’ 가사처럼 관객들은 묻는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1979년 10월 26일, 죽을 때까지 집권하겠다던 박정희 유신독재가 막을 내렸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술 취한 박정희의 머리통에 권총을 발사했다. 어쨌든 죽을 때까지는 집권했으니 박정희의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그의 생각보다는 기간이 짧았지만 말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은 돌출성 해프닝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체제의 위기가 반영돼 있었다. 해마다 10퍼센트 넘게 성장하던 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로 타격을 받았다. 1979년 성장률은 6.5퍼센트로 떨어졌고 물가는 22퍼센트나 올랐다.

박정희의 개발독재 덕분에 소수 재벌들은 배를 불렸지만, 선성장 후분배 논리에 허리띠를 졸라맸던 노동자·서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동안 박정희는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해 독재가 필요하다고 강변해 왔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래로부터 불만이 조금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979년 8월 위장폐업에 맞선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처절한 농성투쟁이 있었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김경숙 씨가 사망했고, 이는 곧 여야 간 정치 쟁점으로 비화했다. 10월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부마항쟁)가 벌어졌다. 시위는 봉기에 가까울 정도로 격렬했고 박정희는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풀고서야 가까스로 진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배계급의 일부는 더는 기존의 지배 방식이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봤다. 김재규는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지배체제 전체가 붕괴하지는 않았지만 권력은 진공 상태가 됐다. 최규하가 임시 대통령이 됐지만 실권은 여전히 군부에 있었다. 군부는 유신체제가 갑작스럽게 붕괴해 아래로부터 저항이 폭발할 것을 두려워해 권위주의적 지배를 유지해야 한다는 데는 일치했다. 그런데 그 방향은 서로 달랐다.

형식상의 명령 계통을 지휘했던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옛 여권은 아래로부터 압력을 의식해 유신체제를 조금씩 완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긴급조치 폐지 등 몇몇 유화 조처가 취해졌다. 그러나 전두환과 그 지지 세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사조직 ‘하나회’를 기반으로 조심스럽게 군부 내에서 지지 세력을 모았다. 그리고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로 정승화 세력을 제거했다.

그 뒤 전두환은 조심스럽게 정권 장악을 향해 움직였다. 충정 작전을 준비해 아래로부터 저항을 제압할 계획을 세우고, 언론사를 대상으로 ‘K공작’을 펼쳐 새로운 ‘King’ 전두환을 국가 지도자로 부각했다. 3월 중순 주한 미대사 글라이스틴은 이렇게 보고했다. “[전두환은] 일개 보안 장교라기보다는 국가 지도자처럼 각계각층과 활발히 접촉하고 있다. 그는 직접, 아니면 민간인을 전면에 내세워 권력을 잡기 위해 시간을 버는 듯한 인상이다.”

4월 14일에는 편법으로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해 군대뿐 아니라 국가 기구의 모든 정보망을 장악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야당의 대응은 꾀죄죄했다. 김영삼은 신군부와 흥정을 잘 하면 자기가 대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김대중은 전두환의 등장을 심각하게 우려했지만 이를 반대하는 재야·학생 운동을 자제시키기 급급했다. 군부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의 집권 음모가 명백해지자 학생들은 항의 시위에 나섰다. 5월 15일 서울역에는 10만 명이 모여 “계엄철폐”를 외쳤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도부는 격론 끝에 시위를 접고 사태를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다. 《만화 전두환》에서는 이것이 결정적으로 광주 항쟁의 비극을 부른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의 정치·조직 등 준비 정도와 경험 수준을 봤을 때 이는 과도한 비판이다.

당시 전두환의 반동 쿠데타를 학생들만의 시위로 막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노동자 계급의 광범한 참가가 관건이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노동자 계급은 1980년 3월 유화 국면 속에서 그동안 억눌려 온 불만을 터뜨렸다. 사북 탄광 노동자처럼 폭발적인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잔인한 노동통제 때문에 그들은 투쟁의 경험, 조직, 정치, 자신감 등 모든 면에서 여전히 취약했다. 아직 그들에게는 경험과 시간이 좀더 필요했다.

요약하자면, 당시 전두환의 계엄 확대와 광주 학살은 유신독재 체제 붕괴를 비집고 아래로부터 저항이 폭발하기 전에 선수를 쳐 반동적 억압을 다시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전두환은 5월 17일 학생 시위가 소강인 틈을 타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제 형식면에서도 계엄 통수권은 대통령에서 전두환에게 넘어 왔다. 전두환이 명실상부한 권력자가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전두환은 5월 17일 하루에만 6백여 명이 넘는 재야·학생운동 지도자·언론인 등을 체포했다. 김대중은 날조된 내란 음모죄로 체포됐다.

전국 수준에서 민중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해 보고 당했지만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됐다. 광주에서만 시위가 멈추지 않은 데는 한 가지 요인이 있었다. 군부독재는 분열지배 전략의 일환으로 호남을 의도적으로 차별하는 술책을 썼고 호남인들은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런 군부가 김대중을 체포한 것이 광주 시민들을 더 분노케 한 것이다.

전두환은 광주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될까 봐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그는 광주를 초기에 잔인하게 짓밟아 본보기를 보여 주려 작심했다. 공수부대의 짐승 같은 야만 행위는 그 결과다.

5월 18일 아침 광주 전남대 앞에는 공수부대가 배치됐다. 그들은 철심이 박힌 박달나무 곤봉으로 학생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전두환의 “화려한 휴가”가 시작된 것이다.

시내 중심가인 금남로에서도 공수부대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 공수부대원들은 미친 사냥개처럼 골목골목을 누비며 사냥감을 물어뜯었다. 살인 폭력에 항의하는 노인들, 부녀자들도 계엄군의 “인간 사냥”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다.

계엄군은 곤봉으로 머리와 얼굴을 골라 집중적으로 두들겼다. 희생자들 대부분이 얼굴이 짓이겨져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아예 대검으로 사람들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희생자들 모두 두 군데 이상 칼에 찔렸다.

분노한 시민들은 더는 지켜보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시민들은 본격적인 항쟁에 돌입했다. 행동강령은 하나였다. “도청으로! 도청으로!”

항쟁은 완전히 자생적이었다. 시위대 다수는 일용직, 구두닦이, 영세 작업장 노동자, 택시 기사 등 평범한 미조직 하층 노동자들이었다. 모든 위대한 대중 항쟁의 서막처럼 평소에 멸시당하고 천대받은 사람들이 역사의 전면에 당당하게 나선 것이다.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10대 특유의 열정 때문인지, 무수한 희생을 내면서도 자신들의 몸 전부를 아무 두려움 없이 공수대의 돌격 전면에 내던졌다.”(《넘어 넘어》)

공수부대와의 일진일퇴는 그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저녁에는 택시와 버스 수백 대의 기사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며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시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쇠파이프, 각목, 식칼 등 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손에 들고 뒤를 따랐다.

시민들은 광주 MBC도 공격해 불태워 버렸다. 당연했다. 시민들은 “정확하게 보도하라”고 절규했지만 언론은 “사망자 없음”, “폭도” 운운하거나 아예 연예 프로그램만 방송했던 것이다.

5월 21일, 항쟁은 절정에 올랐다. 계엄군은 광주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렸다. 그러자 그들은 야만의 강도를 높였다. 오후 1시 도청 앞,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것을 신호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시작됐다. 계엄군의 연발 사격에 시민들 수십 명이 픽픽 쓰러졌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인근 군부대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기 시작했다. 곧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공수부대는 광주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해방 광주’는 시민들이 직접 운영했다. 비록 ‘해방 광주’가 파리 코뮌이나 소비에트처럼 대안권력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니만, 민중이 사회를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평소 남남이던 이들 사이에 연대의 정신이 충만했다.

그러나 이런 시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계엄군이 곧 다시 진입할 것이 분명했다. 항쟁의 지속 여부를 둘러싸고 한동안 항쟁 지도부를 자처했던 ‘수습위원회’는 마비됐다. 상층 중간계급이 주류인 ‘수습위원회’는 시민들에게 무기 반납을 종용했다.

항쟁 지속을 결정한 사람들은 도청을 거점으로 마지막 저항을 결의했다. 그들은 모두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명을 버려 대의를 지키기로 했다.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5월 27일 새벽 3시 시민군은 마지막 가두 방송을 했다. 당시 박영순 광주 송원전문대 보육과 2학년 학생이 시내를 돌며 호소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때 거의 모든 광주 시민은 깨어 있었다. 그리고 애절한 여학생의 부르짖음을 오랫동안 기억했다.”(《넘어 넘어》)

도청에서 시민군은 끝까지 저항했다. 한 층 한 층 계엄군에게 점령당해 막다른 사무실까지 몰렸지만, 시민군은 방문을 잠그고 책상과 캐비넷으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저항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도청을 “접수”하고 “진압”을 완료했다.

미국은 “우리는 한 주요한 도시에서 전체적인 무질서와 혼란상태가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허용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며 전두환의 학살 완료를 치하했다.

〈조선일보〉도 기뻐했다. “지금 오직 명백한 것은 광주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될,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안전이 확고하게 보장되는 조건과 환경의 보호를 받게 됐고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항쟁이 시작되자마자 짐 싸서 도망갔던 광주의 부자들은 이 말을 듣고 진심으로 안심했을 것이다.

시민군은 물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광주의 경험으로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급진화했다. 한 사회학자의 관찰처럼, “역설적으로 한국 노동계급운동은 전두환 정권 첫 1년 동안 더 강해지고 성숙해졌다. 표면적으로 정치적 안정이 유지됐지만 그 이면에서는 학생·노동자·재야집단 들이 1980년의 패배에 대해서, 광주 학살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미래전략에 대해서 숙고했다.”(구해근,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한편, 광주 항쟁이 있은 지 27년이 지난 2007년 〈화려한 휴가〉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 전두환과 함께 화려한 휴가를 즐겼던 조중동, 보수우익들, 한나라당은 이 영화가 혹시나 자기들의 대선 승리를 해꼬지할까 봐 심기가 불편할 것이다.

그렇다고 노무현과 범여권이 광주 항쟁 정신 계승 운운하며 이 영화를 반길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학살자의 후예들과 대연정 하자던 노무현, 광주를 털고 가자던 손학규, 한나라당과 온갖 개악 연정을 해 왔던 범여권은 광주 항쟁 정신의 배신자들일 뿐이다.

그 때 광주 도청의 투사들이 보여 준 불굴의 투지를 계승해 민주주의와 진정한 해방을 향한 투쟁에 매진하는 게 우리가 광주를 잊지 않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