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파주의라는 말은 운동 내에서 가장 많이 오용·남용되는 용어다. 특히, 혁명적 정치의 독자성을 위해 민주노동당의 공식 기구나 조직과는 별도의 조직을 건설하는 당 안팎의 사회주의자를 일부 당 관료가 부정적으로 언급할 때 자주 쓰던 말이었다. 하지만 종파주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 소책자는 1980년대 중엽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종파주의뿐 아니라 초좌파주의·아나키즘·신디칼리즘 등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와는 다른 정치 조류에 대해 쓴 평론들을 모아 번역한 것이다. 거의 20년 전에 이미 번역했던 것을 원문과 한 문장 한 문장 대조하면서 전면적으로 다시 번역했다. 초판의 오역과 어색한 표현을 바로 잡았을 뿐 아니라 당시의 말투와는 다른 요즘 말투를 반영했다.

종파주의와 초좌파주의

종파주의는 다른 진보 운동 단체와 공동 활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만을 드러내는 경향을 가리킨다. 진보 운동 단체 간에는 ‘진보’로 분류될 만큼의 공통성이 있고, 이 공통성 덕분에 일부 구체적 쟁점을 둘러싸고 공동 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종파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영예를 계급 운동과의 공통성에서 보지 않고, 그 운동과 자신을 구별해 주는 특수 표지에서 본다.”(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좌파가 패배와 사기 저하와 고립을 겪으면 종파적 경향을 띠기 쉽다고 했다. 옛 소련과 일체감을 느꼈던 한국 좌파도 소련이 몰락한 1991년부터 노동법 대파업 직전인 1996년까지 그러한 사기 저하를 겪는 동안 종파적 경향을 내재화했다.

대파업, 정권 교체, 경제 공황으로 두드러진 1997년 이후 벌어진 정치·사회적 격변 속에서 마침내 개량주의가 운동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종파주의도 강화됐다.

하지만 개량주의자들을 비난만 해봤자 도무지 개량주의를 극복할 수 없는 법이다. 개량주의적 방식의 한계를 실천에서 입증해야 한다. 즉, 개량주의자들과 공동 활동을 해야 한다.

꼭 소그룹만이 종파주의 경향을 띠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 집권 전야에 독일 공산당은 10만 명이 훨씬 넘는 당원을 자랑했으나 사민당을 파시즘의 일종(“사회파시즘”이라는)으로 규정하리만큼 초좌파적이었고, 따라서 종파적이었다.

초좌파주의는 원칙적으로 일체의 타협을 배격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본주의 하의 선거 참여는 말할 것도 없고 개량주의 단체들과의 공동전선도 거부하고, 심지어 개량주의적 지도부 하의 노동조합 속에서 활동하는 것도 거부한다.

그러므로 초좌파주의는 종파주의의 가장 경직되고, 가장 비협력적이고 가장 일관된 형태다. 초좌파의 고전적 사례는 1920년대 독일과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좌파 공산주의”(레닌이 “유아적 난맥상”이라고 부른 것)이다. 한국에 존재하는 사례들은 너무 미미해서 언급할 가치가 없다.

아나키즘과 신디칼리즘

아나키즘은 반권위주의, 무강제주의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낱말이다. 강제적 수단은 강제 없는 미래 사회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지 못하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나키즘의 입장이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다수의 의지를 소수에게 강제하는 것(이것이 민주주의 아닌가?)에 반대한다.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다수가 소수에게 사회주의를 강요할 수 없다”고 했다.

이와 똑같은 견해를 표명하며 마르크스를 비판한 바쿠닌에게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노동계급이 기존 자본주의 국가 기관들을 해체하더라도 옛 지배계급과 투쟁하는 일이 남아 있으므로 노동계급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어 사용할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는 강제적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바쿠닌은 1870년 9월 리용 시청을 장악하고 “국가 폐지”를 선포했다. 그러나 바쿠닌 일파가 분쇄되는 데는 국민방위군 두 개 중대로 충분했다.

아나키즘은 마르크스주의와 무계급/무국가 사회라는 이상을 공유하지만, 그것을 이룰 수단과 방법 문제에서는 정당 부정론 같은 비현실적 이상론에 기댄다.

아나키즘의 최신 형태는 각종 자율주의이다.

아나키스트와 자율주의자는 거의 다 사회 변화에서 노동계급 투쟁이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극소수는 이를 인정하고 노동자 운동 속에서 활동한다. 이들이 바로 신디칼리스트다. 신디칼리즘은 우리 나라에서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로 불렸다.

지금은 노동자주의라는 용어가 더 유용하다. 노동자주의는 첨예한 정치 문제를 회피하고 그 대신 생산 현장에서 발휘될 수 있는 노동자의 힘을 압도적으로 강조하는 운동이다.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노동자주의는 정치의 주도권을 개량주의에 넘겨주게 된다.

중간주의

끝으로, 중간주의는 개량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명확하고 분명한 진술·결정·구별을 회피하는 조류이다. 즉, 어중간함, 동요,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기가 중간주의의 주된 특성이다. 중간주의 단체는 때로는 좌경화하고 때로는 우경화한다. 카멜레온 같은 이 변신은 때로 매우 급속하게 이뤄지지만,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없다. 고전적인 예는 칼 카우츠키와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빅토르 아들러, 오토 바우어, 칼 레너 등)이고, 비근한 예는 민주노동당 의견그룹 ‘전진’이다. 후자는 북핵 실험, 보안법에 따른 ‘일심회’ 탄압, 사회연대전략 등의 문제들에서 보듯이 사실상 좌파 개량주의라고도 할 수 있으리만큼 우경적인 중간주의이다.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낱말을 잘못 선택해 서투르고 부적합하게 사용하는 일은 놀라우리만큼 이해를 방해한다. …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모두 부지불식간에 이해를 좌우하고, 완전히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고, 더 나아가 흔히 사람들을 공허한 논쟁 … 속에 빠뜨리곤 한다.”

이러한 일이 되도록 덜 일어나고 우리의 이해가 증진되고 명확해지도록 이 소책자는 도움을 줄 것이다.

《잘못된 운동 조류》

던컨 핼러스 외 지음 | 최일붕 옮김
다함께 펴냄 | 2천 원
구입 문의: 02)2271-2395
http://www.alltogeth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