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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대책위는 잘못된 전술?

가족대책위는 잘못된 전술?

정진희

가족대책위가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 대상에 올랐다. 지난 6월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는 노조의 “가족주의 전술”을 비판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5월에는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활동가 정주연이 《사회진보연대》에 가대위 투쟁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가대위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 억압에 이용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자본주의적 가족 모델과 가족 임금 이데올로기의 반여성적이고 반노동자적인 점을 간과”해 그것을 “‘합리화’시켜 줄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가족대책위는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 발전 파업, 철도 파업, 태광산업 파업, 효성 파업 등에서 가족대책위는 눈부신 활약을 했지만 결국 자신을 억압하는 데 이용됐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들이 나서는 투쟁이 가족 제도를 정당화한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얘기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파업이 착취를 정당화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임금 인상 파업도 임금 노동 자체는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노조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수용해 활용하는 가대위는 결국 자본에 이롭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간단한 사실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가대위가 결국 자본에 이롭다면 왜 자본가들은 가대위를 그토록 탄압했는가? 이런 혼란은 그가 모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다는 가부장제 이론과 모종의 계급 이론을 절충하려는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가부장제 이론은 어떤 계급 분석도 거부하기 때문에 결국 그의 주장은 가부장제 이론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다.

가부장제 이론에 따르면, 모든 남성이 여성 억압에서 이득을 얻는다. 가족은 자본가와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 유지하는 음모다. 그는 “여성에 대한 착취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자본과 남성 임금 노동자들이 공모를 이룬”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입증하는 예로 가족 임금제를 들고 있다. 남성 노동자들은 가족 임금 ― 한 명의 노동자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임금 ― 을 받기 때문에 여성을 일자리에서 쫓아내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데 찬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즐겨 하는 얘기다. 하지만 이것은 이데올로기만 볼 뿐 현실을 못 보는 얘기다. 오늘날 노동자들 가운데 ‘가족 임금’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족 전체가 먹고 살만큼 충분한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극소수의 숙련 노동자들뿐이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부정한 결탁이 있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가족임금제 요구가 처음 등장한 영국에서 19세기 내내 ‘가족 임금’에 가까운 임금을 받았던 남성 노동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많은 노동계급 여성들이 부족한 소득을 메우기 위해 가정 밖에서 노동을 했다. 이런 추세는 19세기 상반기에 보호법 ― 특정 산업에서 어린이와 여성의 취업을 금지하거나 노동시간을 줄이는 법 ― 이 통과된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19세기 기혼 여성의 노동을 연구한 영국 역사가 클레멘티나 블랙에 따르면, 기혼 여성들은 많은 산업에서 주요 노동력을 구성했다. 1860년대 섬유 산업 노동력의 3분의 1이 여성이었다.

노동자들이 가족임금제를 요구한 것은 당시 영국 노동계급이 처한 상황과 연관돼 있다. 산업 혁명의 결과, 가족 성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장시간 공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노동계급 가족은 해체 일보 직전이었다. 너댓 살 어린아이들까지 하루 12∼16시간씩, 주말도 없이 일했다. 영유아 사망률, 산모 사망률이 증가했다. 끔찍한 주거 환경, 형편없는 식사, 빈약한 의료 시설 등으로 노동계급의 삶은 매우 비참했다. 빈곤으로 노인이나 아이들은 버려지기 일쑤였다. 돌봐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은 구빈원에나 가야 했다. 구빈원의 조건은 끔찍해서 노동자들은 구빈원에 보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당시 어떤 사회 복지 시설도 없는 상태에서 가족의 해체는 노동계급에게 커다란 재앙으로 여겨졌다. 노동계급은 공장 노동의 끔찍한 조건에서 가족을 보호하기를 원했다. 가족임금제는 노동계급 전체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기됐다. 이것은 자본가들이 가족 제도를 재확립하려는 시도와 맞물려 일어났다. 자본가들은 노동계급 가족의 해체로 노동력 공급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안정적인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가족 제도를 다시 확립할 필요가 생겼다. 이처럼 가족임금제는 노동계급과 자본가들의 서로 다른 이해가 맞물리면서 등장했다. 가부장적 공모 이론은 이런 복잡한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또한 여성에 대한 모욕이다. 여성은 가부장에 속기 쉬운 존재로 취급당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을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취급하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정주연은 가대위 여성들을 한낱 ‘남성 중심’의 노조에 이용당하는 희생양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는 발전 노조 가대위 투쟁을 이렇게 평가했다. “사유화 반대라는 정치적 투쟁 문구를 내걸고 있다고 해도 가대위의 투쟁은 온정주의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투쟁의 국면에서 활용되고 있다.”그가 가대위 활동을 이렇게 터무니없게 폄하하는 데는 노동 운동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깔려 있다. 물론 이런 불신에는 어느 정도 이해할만한 측면이 있다. 많은 노조가 여성들의 요구에 무관심하거나 때때로 여성 차별에 동조해 온 게 사실이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식당 여성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는 데 동의했고 그 사건을 다룬 영상물(“밥·꽃·양”) 상영을 가로막은 게 대표적인 사례다. 많은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을 비하하는 언행을 일삼곤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주연의 가대위 비판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모든 비판은 구체적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해서는 안 된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노동 운동을 싸잡아서 비판하곤 하는데 이것은 운동의 성장과 발전보다는 종종 분열을 증폭시킨다. 많은 노조가 파업 때 가대위를 조직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전술이다. 정부와 기업주는 파업이 일어나면 흔히 가족을 협박해 파업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곤 하는데, 이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 가족을 조직하는 것이다. 남편이 파업할 때 아내는 집에서 애나 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을 무시하는 태도다.

가대위 투쟁은 여성 차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는커녕 도리어 여성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린다. 발전 파업 가대위 여성들을 보라. 누가 이들을 보고 여자는 나약하고 수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발전 가대위 여성들은 단지 아내와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투사였다. 가대위 여성들의 놀라운 용기와 투지는 발전 남성 노동자들뿐 아니라 다른 부문의 남성 노동자들에게도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남성 노동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여성 차별 의식을 깨뜨리는 것은 이렇게 단결해 싸우는 과정을 통해서다. 정주연은 가대위의 이런 장점을 깡그리 무시하고 시종일관 냉소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 억압에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될지언정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노동계급의 분리를 조장하는 가부장제 이론을 수용하는 한, 그의 무기력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