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가 “경제적 요인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거나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비판은 학술 세계에서 주로 나타나는 이론적 반박이다. 사회학자·역사가·정치철학자 등이 이런 주장을 널리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들 자신의 필요에 딱 맞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사상으로 먹고사는, 또는 먹고산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상의 역사적 구실을 경시하는 듯한, 따라서 자신 같은 사람들의 구실을 경시하는 듯한 이론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직업적 이데올로그가 사상의 힘이 결국은 세상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에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는 더 협소한 직업적 이해관계도 얽혀 있다. 즉, 직업적 이데올로그는 “정교하고” “복잡한” 이론이나 “더 많은 연구·개발이 필요한” ― 따라서 많은 연구 자금과 출판 기회가 뒤따르는 ― 문제들을 더 좋아하고, 그래서 분명한 주장을 매우 싫어한다. 청년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는 역사의 수수께끼가 해결된 것이고,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수수께끼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를 원하는 전형적인 학자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기겁할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박이 유행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반박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해야 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거나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한다는 주장이 모두 틀렸거나, 기껏해야 ‘부정확하다’는 말로 시작하고 싶다.

《독일 이데올로기》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마르크스 역사 이론의 출발점은 ‘경제’나 ‘경제적 동기’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 ― 생물학적으로 결정되고 역사적으로 발전된 ― 와 그런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의 조직화이다. 마르크스는 생산의 조직화가 역사에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단지 생산의 조직화가 토대나 기초이고 역사에서 다른 모든 것은 이 토대나 기초에 의존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필요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의 이 근본 입장은 진리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음식과 집 등을 구할 수 없는 인간은 모두 죽을 것이고, 사회 성원 다수의 필요를 적어도 어느 정도 충족시키는 사회적 생산을 조직할 수 없는 사회는 결코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이런 전제조건을 부인하는 것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지배계급과 그들의 이데올로그 들은 그런 전제를 회피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킬 물질적 노동을 항상 다른 사람들이 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그 다른 사람들(노예·농민·노동자)을 사회적으로 지배하고, 그래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한다는 말과 비슷한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말하는 인간의 필요는 다양하다. 그것은 공기처럼 아주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것부터 그보다 약간만 덜 절박한 음식·옷·집 같은 것까지, 그리고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상호작용(보살핌·언어·사회화 등)과 사랑과 섹스(둘 다 인류의 생존과 개인의 정서적 교감을 위해 꼭 필요하다)와 미술·음악 등을 위한 ‘정신적’ 필요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런 필요 중에서 어느 것이 ‘경제’에 해당하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공기가 ‘경제적’ 필요인가? 그와 동시에 경제, 즉 생산의 사회적 조직화가 없으면 이런 필요 가운데 공기를 제외하고(사실, 공기조차 논쟁의 여지가 있다) 어느 것도 지속적으로 충족될 수 없다. 예컨대, 물질적 생산이 없으면 미술도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미술을 위해서는 벽·종이·화포(畵布)·연필·붓 등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미술가가 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투여할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직화된 생산이라는 이 경제적 토대와 마르크스가 ‘상부구조’라고 부른 정치·법률·철학·종교·예술 등은 서로 어떤 관계일까? 우리가 보았다시피, 경제가 다른 모든 것의 필요조건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가 모종의 기계적이거나 절대적인 의미에서 다른 것들을 결정할까? 마르크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주로 경제가 다른 것들을 조건짓거나 그 형태를 좌우한다고 했지 엄밀하게 결정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토대가 상부구조를 조건짓는다는 말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제약하기도 하고 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제약

첫째, 사회의 경제 수준이 이데올로기나 상부구조 수준에서 가능한 것을 제약하거나 제한한다. 예컨대, 현대 예술과 현대 문화 일반이 봉건적인 또는 중세의 경제적 토대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정치적 민주주의 ― 의회제 정부, 보통선거권 등 ― 도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도시와 노동계급의 발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둘째, 경제 발전은 변화의 강력한 동력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봉건제 태내에서 초창기 부르주아지의 발전은 개신교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를 성장시킨 동력이었다. 그래서 개신교는 가톨릭과 봉건 귀족의 동맹에 도전하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나중에 산업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로 발전하자 제국주의 ― ‘거대’ 열강끼리 세계를 분할하는 ― 를 향한 매우 강력한 동력이 형성됐다. 그리고 이 제국주의는 전쟁으로 나아가는 거대한 압력을 만들어냈다.

불확실

따라서 종교개혁이든 제1차세계대전이든 그것은 우연한 역사적 사건도 아니었고 주로 이데올로기 때문에 벌어진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사건들은 중대한 ‘경제적’ 원인,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발전에서 비롯한 원인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못박은 것이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된 뒤 1914년 8월에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난 것 등은 결코 경제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이런 역사적 방법을 오늘날의 문제, 예컨대 미국의 이란 공격 가능성에 적용해 보자. 한편으로 미국이 이란을 공격할 매우 강력한 동력이 존재한다. 세계 경제 제국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미국은 군사적 지배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 특히, 결정적으로 중요한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군사적 지배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재앙 때문에,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전에 이란에서 한판 크게 벌여 상황을 반전시키고 싶은 유혹이 생겨났다.

그러나 근본적 제약 조건들(미국도 어쩔 수 없는)과 함께 이란에서 군사적으로 패배할 현실적 가능성, 중동을 엄청난 혼란에 빠뜨리며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위험, 국내외에서 대규모 반발에 부딪힐 가능성 등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도 존재한다.

따라서 이란 공격의 원인과 동기는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이지 이데올로기나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란 공격이 순전히 경제적으로만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불확실하다. 그것은 아마도 미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의 판단과 성격, 중동과 미국과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강력한 저항 같은 요인들에 달려 있을 것이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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