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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모양처를 강요하는 사회

지난 수십 년 동안 여성들의 삶은 크게 변해 왔다. ‘여풍당당’이니 ‘여성시대’니 하는 말은 과장이지만, 오늘날 여성들이 사회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이에 따라 여성을 어머니와 아내로만 여기는 성별 고정관념도 바뀌고 있다.

그러나 기성 체제는 완고하게 전통적 여성상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지난 11월 초 한국은행이 내년 상반기에 발행할 5만 원권 화폐 도안에 들어가는 인물로 신사임당을 선정해 발표한 것이 단적인 예다.

그동안 한국은행의 새 화폐 도안 계획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는데, 사상 최초로 여성이 지폐 도안에 들어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 여성은 바로 ‘현모양처’의 대명사인 신사임당이었다.

역사적 인물로서 신사임당이 정말 현모양처였는가 하는 점은 논란거리다. 어떤 여성학자들은 신사임당이 19년간 친정 부모를 모시며 남편을 처가살이시켰다는 점 등을 들며 신사임당을 전형적인 현모양처로 묘사하는 것은 각색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가 신사임당을 유명한 성리학자 율곡 이이를 훌륭하게 키워낸 어머니로 교과서에 소개하면서부터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상징이 됐다. 이것은 한국은행이 신사임당 선정을 통해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효과를 기대”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여성차별 기획

터무니없게도, 한국은행은 신사임당 선정이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의식 제고와 여성의 사회참여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여성단체들이 공동성명을 내며 반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은행의 이번 결정은 성별 고정관념을 부추기는 “구시대의 여성차별 기획”이다. 한국은행은 신사임당을 이렇게 소개했다.

“남편 이원수를 격려하여 벼슬길로 나아가게 하고 항상 정도를 걷도록 내조하는 등 높은 덕과 인격을 쌓은 어진 아내의 소임을 다”했고, “사랑과 엄격한 교육으로 네 아들과 세 딸을 모두 훌륭하게 길러냈”다. “특히 … 셋째 아들 이이를 조선의 대학자로, 맏딸 매창과 넷째 아들 이우를 시·그림에 뛰어난 예술가로 성장시켜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를 보여 주었다.”

한국은행뿐 아니라 각종 신문, 잡지, 드라마, 광고 등에서도 늘 어머니와 아내로서 헌신하는 여성상을 예찬한다.

이런 여성상은 여성들의 실제 삶과 맞지 않다. 한국은행의 망상과 달리, 오늘날 대다수 여성들은 집 밖에서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임금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은 현재 6백40만 명 가량으로 전체 노동자의 42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 중 다수는 기혼 여성이다.

그럼에도 전통적 여성상에 대한 강조는 여성들에게 엄청난 압박감을 준다. 남편과 자녀의 뒷바라지보다 자아 실현을 우선시하는 여성, 자아 실현을 위해서 ‘심지어’ 결혼을 거부하는 여성들은 ‘이기적’이라고 비난받게 된다.

전통적 여성상을 강조하는 것은 여성의 노동을 가치절하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많은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일하지만 여성의 노동은 가계를 보조하는 것쯤으로 여겨진다. 여성 노동이 ‘부차적’이라는 생각은 여성들에게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주는 것을 정당화한다.

여성 임금이 남성 평균임금의 64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뉴코아·이랜드 투쟁 과정에서 이들 여성들의 임금이 70∼80만 원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놀란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여성 노동자 다섯 명 중 한 명은 한 달에 채 65만 원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고 있다.

여성 가장

가장은 으레 남성이라고 여기는 통념과 달리, 오늘날 여성 가장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여성 가구주는 전체 가구주의 20퍼센트를 넘어섰다. 하지만 여성 임금이 이렇게 낮다 보니, 여성이 가장인 가구는 빈곤의 나락에 떨어지기 십상이다. 여성가장 가구의 6분의 1이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

전통적 여성상은 육아와 자녀교육 부담을 순전히 개별 가족, 특히 여성들의 책임으로 떠넘긴다. 오늘날 입시 경쟁이 강화하면서 유능한 자녀교육자로서 여성상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를 보여 주려면, 사실 ‘대치동 입시전문가 엄마’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노동계급 여성들을 더욱 가혹하게 옥죄는 압박이다. 생계비를 벌기 위해 바둥거리는 노동계급 여성들이 어찌 강남의 ‘입시전문가 엄마’를 따라잡을 수 있으랴.
개인들이 짊어지는 양육비 부담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출생부터 대학 졸업까지 자녀 1명에게 들어가는 총양육비는 지난해 평균 약 2억 3천2백만 원(한국보건연구원)이었다.

값싸고 믿을 만한 보육시설이 부족해 어린 자녀를 둔 여성은 자식의 미래를 위해 직장을 포기할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 중 일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전업주부’가 된다.

그러나 자식이 커가면서 늘어나는 교육비 때문에 ‘전업주부들’은 쥐꼬리만 한 임금을 받으며 다시 청소부로, 가사도우미로, 텔레마케터로, 보험모집원으로 나선다.

남녀평등을 약속하는 정부가 국책은행을 통해 여성차별 관념을 퍼뜨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사와 양육에 들어가는 막대한 부담(돈, 시간, 에너지)을 개별 가정의 여성들에게 떠넘기고,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겪는 차별(임금, 불안정 고용, 승진 누락 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바로 이것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현모양처 상이 여성들에게 강요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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