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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금기 깨기:
인간답게 죽을 권리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지난 12월 4일 한국사회 근대 1백 년 금기 깨기 일환으로 인간답고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존엄사법 제정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존엄사법은 회복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권리를 환자 본인과 가족들에게 보장하는 것이다.

존엄사법 제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동기는 단순하다. 인간답게 살 권리만큼 인간답게 죽을 권리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들에게 이 공약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암 같은 치명적 질병 때문이건 사고 때문이건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온갖 기계 장치에 의존해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그러나 누가 보기에도 명백히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끔찍하고 안타까운 경험이다.

또 그것은 환자 자신과 주변 모두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 준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론 조사에서 3분의 2가 넘는 사람들이 존엄사 합법화를 지지한다.

사실 심폐소생술 거부도 존엄사의 한 예인데, 이는 임종을 집에서 맞고 싶은 고령환자의 경우 대부분 인정돼 왔다. 말기암환자나 전신화상환자 등의 경우 환자 본인과 의사와 가족이 동의한 치료중단(존엄사)도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사회적 금기 때문에 환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정신적경제적 고통을 줄여 줄 존엄사법 제정은 필요하다.

그러나 존엄사법 제정에 반대하는 의견도 많다. 2002년 의사협회가 의료윤리지침에 존엄사를 인정하는 조항을 넣으려다 실정법에 어긋난다는 반발에 부딪혀 무산된 바 있다.

2005년 미국 여성, 테리 시아보의 죽음을 둘러싸고도 세계적으로 존엄사에 대한 찬반 논쟁이 거세게 벌어졌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결국 고귀하게 죽을 권리를 요구한 시아보 남편의 손을 들어줘 그녀는 식물인간 상태가 된 지 15년 만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부시와 교황청은 생명에 대한 공격이자, 생명의 창조자인 하느님에 대한 공격이라며 이를 규탄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수십만 명을 살해한 부시는 물론이고 국가 살인(전쟁, 사형 등)에 대해 종종 침묵해 온 교황청의 위선은 정말 역겨운 것이었다.

게다가 존엄사는 살인과 아무 관계가 없다.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정지한 것 자체가 이미 생물학적으로는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기계로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게 된 것은 반길 만한 일이다. 그런 사람들 중 일부는 잠시 시간을 버는 것만으로도 원래의 기능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의학은 뇌사와 영구적 식물인간 등 되돌릴 수 없는 여러가지 상태를 인정하고 있다.

현대 의학이 어떻게 사람이 정말로 되돌릴 수 없는 상태인지 판단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몇 가지 환상과 신비주의를 벗겨내고 나면 인간의 생명은 다른 자연현상들과 근본에서 다르지 않다. 생물학의학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어떻게 지구가 도는 것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다.

안락사

권영길 후보의 공약인 존엄사(소극적 안락사)뿐 아니라 적극적 안락사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은 남용과 실수 발생은 불가피[하므로] 극소수를 위해서 원조 자살을 합법화했다가는 다수의 집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과 지각을 무디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1994년 뉴욕 시 생명과 법에 관한 특별조사반 보고서)

그러나 안락사를 인정하면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해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지난 2000년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나 몇몇 나라들에서 안락사가 사망률에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매거릿 바틴, 〈의료윤리저널 Journal of Medical Ethics〉 2007:33:591-597, BMJ Publishing Group Ltd & Institute of Medical Ethics.)

질병 때문에 죽기를 원하는 사람에 대해 단순히 치료만 중단하면 흔히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비관해 자살하는 현실을 볼 때, 이런 환자들이 비교적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돕는 행위를 불법화해서는 안 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길 꺼리고 안락사를 금기시하는 언론과 정부의 태도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는 안락사에 대한 온갖 끔찍한 상상이 난무한다.

그러나 실제 대부분의 적극적 안락사는 몇몇 장치를 이용해 환자 스스로 약물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럴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의사가 직접 주입하기도 한다.

안락사의 여러 형태 중 가장 판단하기 어려운 것은 비자발적인 적극적 안락사다. 의식은 잃었지만 숨을 쉬고 기본적인 생명 활동은 유지하는 경우에 이뤄지는 안락사나 치매 노인, 장애 아동에 대한 은밀한 안락사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 중 일부는 명백한 살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악의적인 살인과 궁지에 몰린 개인의 고통스런 선택을 구별해야 한다.

게다가 비록 그들의 행동이 무척이나 잔인해 보일지라도 대부분의 경우에 진정한 문제는 사람들을 잔인한 선택으로 내모는 빈약한 사회보장 제도와 생명보다 이윤이 우선인 체제다.

따라서 이런 경우를 이유로 안락사 합법화에 반대하기보다는 네덜란드처럼 몇 가지 단서 조항들로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편이 낫다.

존엄사 합법화는 권영길 후보의 지적처럼 무상의료 정책과 병행돼야 한다. 그것이 안락사 합법화의 전제가 되선 안 되지만 앞서 말한 사례처럼 병원비 때문에 치료중단을 강요당하는 비극적 현실 자체가 안락사 합법화에 반대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우매함과 악한 본성을 국가가 나서서 통제해야 한다는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개인의 삶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억압을 정당화할 뿐이다.

미국의 안락사 합법화 운동의 주요 슬로건인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는 충분히 가능할 뿐 아니라 사회 운동 진영 전체가 지지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