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이주노동자나 난민 문제는 세계 많은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의제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정치 의제이다.

그 이유는 주로 두 가지다. 첫째, 지난 10여 년 동안 세계화와 전쟁의 결합으로 아마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주의 물결이 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2차세계대전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물결이었을 것이다. 둘째, 그 물결의 영향을 받은 대다수 나라의 지배계급들이 이주노동자나 난민 문제를 주요 정치 의제로 삼고 있다.

이들 지배계급이 이 엄청난 인구 이동에 직간접 책임이 있음에도(빈곤·실업·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게 만들거나 노동력 부족을 메우려고 이주노동자들을 수입함으로써) 이들은 이주 현상이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널리 퍼뜨리려 애쓴다.

구체적 사정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지배계급이 주장하는 일반적 취지 ― 정치인들의 발언을 통해 드러나고 수많은 신문·방송 기사를 통해 보완되는 ― 는 근본적으로 어디서나 똑같다. 이주노동자들은 그들을 “받아들인” 나라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은 항상 “그들”이 너무 많다고 주장한다. 즉, “그들”은 항상 이미 미어터질 것 같은 나라에 마치 침략군처럼 엄청나게 많이 몰려들거나 몰려들 태세라는 것이다. 또, “그들”은 항상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아가서 “우리 나라” 노동자들을 실업자로 만들 뿐 아니라 우리의 집도 슬그머니 가로채서 우리 시민들을 위한 집이 부족하게 만든다.

“우리”와 “그들”

[또, 지배계급은 이렇게 주장한다.] 그들의 존재는 공공 서비스에 대한 온갖 압력을 가중시킬 것이다. 그들의 아이들은 우리말을 모르거나 너무 많은 언어로 말을 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때때로 그들은 병에 걸릴 것이고, 그리 되면 그들이 병상을 차지한 채 희귀한 자원을 소모해서 병원에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들은 또, 외국에서 여러 질병을 들여와 퍼뜨릴 가능성도 크다. 특히, 이주노동자나 난민 들은 흔히 절도·마약·매춘·흉기난동 등의 범죄를 비롯한 갖가지 악행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당국은 여전히 자국민보다 그들에게 특혜를 베푸는 데 여념이 없는 듯하다.

설사 이 모든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와 다른 그들의 “낯선” 문화, 즉 언어(그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힘들게 만드는)와 의복과 음식(이 때문에 그들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과 종교(그들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등등 때문이다. 문화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거나 뒤섞여 살기가 힘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모름지기 사회주의자라면 이런 주장들을 논박하고 이런 주장들이 반동적인 쓰레기임을 폭로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자는 이 주제를 다룰 때 반드시 등장하는 [지배계급의] 과장과 신화, 순전한 거짓말을 논박할 구체적 사실과 통계에 정통해야 한다. 분명히 그런 구체적 사실들은 나라마다 경우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전체 논쟁을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이론적 요점들이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첫째는 단순한 진실인데, 인구 증가는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들의 존재가 문제라고, 인구 증가는 불행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려 한다. 분명히 이것은 모든 나라 정부와 지배계급들을 위한 완벽한 알리바이다.(실업자·노숙자·빈곤층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주장이고, 진실을 정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정말로 인구 증가 때문에 실업자나 노숙자가 생겨난다면, 실업자나 노숙자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끊임없이 늘어났을 것이다. 사실, 일자리나 집은 그 수효가 일정하게 한정돼 있지 않다. 그리고 인구가 증가한다는 것은 일을 하거나 집을 지을 수 있는 노동자가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히려 인구 증가는 근본적으로 생활수준이 상승한 결과다. 세계 인구가 증가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아이를 더 많이 낳기 때문이 아니라 더 많은 아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거나 더 오래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더 많이 살아남거나 더 오래 사는 것은 식생활·보건의료·생활수준의 개선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경제가 확장되면 노동력 수요도 증가하는데, 이런 노동력 수요 증가는 인구의 자연 증가나 이주노동자 수입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 똑같은 이유로, 실업 증가의 진정한 원인은 경기 침체나 공황이다. 인구 규모나 이주노동자는 실업 증가와 아무 관계도 없다.

인종차별

두번째 일반적 요점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적대감과 인종차별 사이의 연관이다. 이주노동자들을 반대하거나 이주노동자들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자신들의 주장과 인종차별은 전혀 관계가 없다며 [둘 사이의 연관을] 강력하게 부인하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인종차별주의는 대략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대개 처음에는 노예무역, 나중에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반영하고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체계적 이데올로기로 발전했다. 인종차별주의는 이른바 “인종”이나 민족성의 신화적 위계 구조를 확립했다. 즉, 유럽의 백인들이 가장 우월하고, 극동 아시아인들이 그 다음이고, 남아시아인들과 아프리카 흑인들이 가장 저열하다는 것이다. 이런 위계 구조에 수많은 편견과 잘못된 고정관념이 덧붙여졌다. 예컨대, 흑인들은 게으르다거나 동양인들은 이해하기 힘들고 교활하다는 생각 따위가 그렇다. 유럽이 경제적·정치적으로뿐 아니라 문화적·이데올로기적으로도 세계를 지배하게 됐기 때문에 이런 인종차별적 위계 구조와 잘못된 고정관념들이 세계 많은 지역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유럽 밖의 사회들에서도 그랬다. 항상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그리고 이런 편견들(명시적으로 표현하든 안 하든)에 의존하거나 편견들을 이용해서 이주노동자 반대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세계 여러 나라 지배자들의 겉 다르고 속 다른 행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자국의 이윤을 지탱하기 위해 이주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이 매우 많이 필요하고, 합법이든 불법이든 이주노동자들을 분명히 받아들인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을 부추긴다. 그것은 이주노동자들을 손쉽게 속죄양으로 만들고 노동계급을 분열시켜서 얻는 이익 때문이기도 하고, 이주노동자들을 차별하고 무시하면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 ― 취업권이나 노동조합도 없이 초과 착취당하는 값싼 노동력 ― 를 계속 유지·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자들이 이주노동자나 온갖 종류의 난민들에 대해 지배자들과 정반대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분명해질 것이다. 우리가 이주의 잠재적 혜택 ― 경제적·정치적·문화적 혜택 ― 을 강조하고, 모든 이주노동자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며 “우리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고 말하면서 국내외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한 투쟁을 강조하는 이유가 분명해질 것이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