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아마 정치학 사전에서 가장 남용되는 단어일 것이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반동적인 정치인들 ― 부시·체니·블레어·대처·베를루스코니 ― 이 거의 모두 민주주의를 신봉한다.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정권들이 민주 정부를 자처한다. 예컨대, 이집트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가 이끄는 집권당의 이름은 민족민주당이고, 동유럽의 옛 스탈린주의 일당 독재 국가들도 민중민주주의 체제를 자처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결코 사기꾼이나 기회주의자로 치부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도 떠올릴 수 있다. 넬슨 만델라는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법정에서 선언한 뒤 27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마찬가지로, 미국 남부의 거리와 감옥에서 운동을 펼치다가 마침내 목숨을 잃은 마틴 루터 킹도 [흑인들의] 민주적 참정권을 위해 투쟁한 사람이었다. 칼 마르크스도 헌신적인 민주주의자였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죽어갔다는 것이다. 이런 전통은 영국 내전 당시의 수평파에서부터 차티스트들,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 제2차세계대전 때의 레지스탕스, 1990년대의 한국 노동자들을 거쳐 오늘날 버마의 승려들과 파키스탄의 변호사들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영국처럼 흔히 민주주의 체제로 생각되는 사회에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국의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 대신 ‘민주주의’에 대해 물어 봐도 그들은 관심 없다는 반응을 보이거나 누가 집권하든 ‘저들’은 모두 똑같다는 확신과 경멸을 나타낼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민주주의’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철학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서 발전한 정치적 이상이자 제도였다. ‘민중의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했지만 현대의 민주주의는 유럽의 봉건제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비롯한 것이다.

미사여구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에 유럽의 압도적인 질서는 봉건제였다. 봉건제 사회는 영주·귀족(세습 대지주)과 농민으로 분열된 사회였다. 이들 사회는 소규모 공국(公國)에서 대제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지만 그 지배자는 이런저런 제후·왕·황제였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영토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을 대표했고 흔히 신이 주신 권리에 따라 지배하고 있노라고 주장했다. 당시는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았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전혀 없었다. 나머지 세계의 대부분 지역, 예컨대 중국과 인도 등에도 유럽과 마찬가지로 비민주적인 체제가 존재했다.

그러나 봉건 질서 안에서 점차 새로운 계급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도시의 상인이나 소규모 수공업자가 된 장인들이었다. 흔히 그들을 ‘부르거’(시민)라고 불렀고, 마르크스가 사용한 ‘부르주아지’라는 용어는 여기서 유래했다.

봉건제 하에서 부르주아지는 아무리 부유하고 교양이 있어도 귀족에게 이등시민 취급을 당했고 정치 권력을 거부당했다. 부르주아지는 귀족과 국왕의 전제 권력이 부르주아지 자신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발전도 억누르고 있다고 여기고 그런 전제 권력에 점차 분노했다.

마침내 부르주아지는 사회 지도층 자리에서 귀족들을 끌어내리고 그들의 지위를 대신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1642년의 영국 혁명, 미국 독립 전쟁, 1789년의 프랑스 혁명 같은 혁명과 전쟁이 일어났고, 그보다 작은 전투들이 수없이 벌어졌다.

그러나 상인과 수공업자 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전쟁과 혁명을 수행할 수 없었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그들은 도시 빈민과 농민 등 ‘민중’을 동원해야 했다. 사회 하층민들이 스스로 들고일어난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곳에서 부르주아지는 책략을 써서 하층민들의 지도자가 돼야 했다. 그렇게 하려면 대중에게 뭔가를 제시할 정치 철학이 필요했다.

이런 투쟁들 속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와 미사여구 ― 법치, 평등권, 언론의 자유, 대의제, 상속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책임지는 정부 ― 가 탄생했다.
그러나 처음에 민주주의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재산이 없는 사람들이 투표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재산을 폐지하는 데 투표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책임지는 정부는 좋지만, 정부가 부르주아지에게 책임져야지 노동 대중에게 책임져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난 것은 맞지만, 흑인 노예와 ‘원주민’과 여성과 십중팔구 공장 노동자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거인 요정이 일단 병에서 뛰쳐나오자 그것을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다. 노동계급의 힘이 커지자 그들은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민주주의를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대중 조직인 차티스트들은 ‘1인 1표’ 문제에 집중했다.

그 뒤 19세기 말쯤 영국의 부르주아지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노동자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하더라도 그들이 부르주아지를 제거하는 데 투표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사실, 자신의 자본가 사장에게 투표하도록 일부 노동자들을 설득할 수도 있었다. 그 때 이후 정치적 반동 세력과 사기꾼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한다고 자처하기 시작했다.(그러면서도 ‘때때로’ 민주주의가 없어지기를 속으로 은근히 바란다.)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

이로부터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과거에도 민주주의라는 사상 자체가 잘못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민주주의는 노동 대중의 현실적 필요와 무관하다? 이런 결론은 재앙적 오류일 것이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과 많은 나라들에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문제는 민주주의 자체가 잘못이라거나 심지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나라의 민주주의가 너무 너무 제한적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그동안 들어 왔던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이다. 정치적 민주주의에 더해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도 필요하다.

자본가 계급은 정치적 민주주의[만]으로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권력의 결정적 지렛대가 의회나 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첫째, 기업과 은행의 이사회실에 있고 둘째, 국가의 상설 기구, 특히 군대에 있기 때문이다. 기업과 은행의 이사회실은 자본가 계급이 직접 소유하고 있고, 군대 같은 국가의 상설 기구는 수많은 경제적·사회적·이데올로기적 끈으로 자본가 계급과 연결돼 있다. 그리고 이것이 뜻하는 바는 자본가 계급이 의회를 잡담 장소로 만들어버릴 수 있고 정부를 자신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전 세계의 개량주의 정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런 식의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 라고 부른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노동자 민주주의, 즉 진정한 대중의 권력을 뜻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려면 민주주의를 정치적 영역에서 생산의 영역으로, 나아가 사회 생활의 다른 영역들로 확대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공장·콜센터·학교·병원 등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군대·법원·행정부처에서도 민주주의가 실현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와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하지 않으면 위에서 말한 어느 것도 성취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혁명으로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건설해서 노동계급이 사회를 운영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 덕분에, 그리고 1956년의 헝가리 혁명과 1979년의 이란 혁명 같은 다른 혁명들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국가의 핵심 기구가 소비에트 ― 작업장 집회에서 선출되고 언제라도 소환될 수 있는 대의원들을 바탕으로 한 노동자 평의회 ― 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지극히 제한적일 뿐 아니라 수많은 노동 대중을 소외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울 가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영국판 〈조선일보〉]이 시장을 지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언론의 자유 덕분에 사회주의 신문도 발행될 수 있다. 심지어 잡담 장소로 전락한 의회도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연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선출된 노동당 정부가 아예 선출되지 않은 정부보다는 낫다. 부자들의 재산을 지켜주는 법치가 극단적인 탄압을 막아줄 약간의 보호 장치 구실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계급이 민주주의 요구를 위한 투쟁을 주도해야 하고 단지 정치적 민주주의,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오히려 노동계급은 ‘민주주의’ 투쟁을 사회 혁명으로 변모시켜야 한다. 그런 사회 혁명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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