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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가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입문 32:
마르크스주의와 예술

마르크스주의가 예술(음악·문학·회화·조각·사진·영화·드라마·무용 등 모든 창조적 예술)에 대해 뭐라고 주장하는가는 제한적이지만 중요한 문제다.

그것이 제한적인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예술가들에게 창작 비법이나 지침을 제공하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기계 조작법이나, 체스 게임 방법이나, 높이뛰기 방법이 없듯이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트럼펫을 연주하거나 교향곡을 작곡하는 방법 따위는 없다. (마르크스 자신은 젊었을 때 몇 편의 시를 쓴 적이 있지만 작품들이 그저 그래서 금세 포기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예술가들이 섹스·꿈·종교 같은 주제가 아니라 계급·전쟁·혁명 같은 특정 주제들을 다뤄야 한다거나 예술이 공공연하게 정치적이거나 헌신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는 예술을 평가하는 고정불변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기준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마오쩌둥은 중국 혁명의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시인이기도 했지만, 시인으로서 그의 장점을 좌우한 것은 혁명가나 중국 지배자로서의 장단점이 아니었다. T S 엘리엇이 반동적이었다는 이유로(그는 실제로 매우 반동적인 인물이었다) 그를 형편없는 시인으로 평가하거나 디에고 리베라가 피카소보다 더 좌파적이었다는 이유로 리베라를 더 위대한 화가로 평가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있다면 그는 예술에 대한 태도에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기 힘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진보적 소설가 에밀 졸라보다 반동적인 친(親)귀족 소설가 발자크를 더 좋아했다. 왜냐면 발자크가 당시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더 완벽하고 통찰력 있게 묘사한 더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을 둘러싸고 스탈린주의자들과 논쟁할 때 트로츠키가 주장했듯이,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은 예술을 예술의 잣대로 판단할 것을 요구한다.

창조적 노동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공한다. 첫째, 인류의 개인적·집단적 발전 과정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전반적 중요성에 대한 독특한 평가와 이해. 둘째, 예술과 문화의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 최상의 분석 방법. 셋째, 개별 예술 작품의 의미와 중요성을 분석하는 데 아주 유용한 관점.

개별 예술 작품이나 예술 일반이 혁명의 발발이나 결과를 결정적으로 좌우했다고 주장한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예술에 진지한 관심을 가졌고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예술을 즐겼다. 이 점에서 예술은 정치적 행동보다는 의약품이나 영양식과 더 비슷한 구실을 하는 듯하다. 또,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사회에 예술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예술이 사회적 필요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마르크스주의 덕분에 우리는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창조적 노동이 인간됨의 필수조건이라고 본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장하듯이, 인간은 “자신의 생존 수단을 생산하는” 노동 덕분에 다른 동물들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될 수 있다.(엥겔스가 쓴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과정에서 노동이 한 구실’도 참조하라.) 인류는 노동을 통해 주변 환경과 역사와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일상적 시기에 창조적 노동의 가능성을 박탈당한다. 그들의 노동은 소외된다. 즉,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고, 그런 노동은 그들의 삶을 손상시키고 왜곡한다.

계급 사회에서 가능한 창조적 노동 형태 가운데 하나, 즉 생산자가 통제하는 노동이 바로 예술이다.(다른 하나는 혁명적 실천이다.) 그래서 예술에서는 사상과 감정의 진솔한 소통이 가능하다. 그런 소통 방식은 철저하게 상업적인 오락·언론·광고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예술은 우리 인간과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중요하다. 심지어 그런 예술의 이데올로기가 보수적이고, 예술 세계와 문화 산업을 지배계급이 지배하고 있을 때조차 그렇다.

사실, 마르크스주의가 예술의 역사를 이해하는 핵심 명제는 주요 물질적 생산 수단을 통제하는 계급이 근본적으로 예술의 생산도 지배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마르크스주의는 종교·철학·정치·법률과 함께 예술을 사회의 상부구조 ―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이루어진 경제적 토대에 의존하고 그 토대의 제약을 받는 ― 로 보는 역사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예술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적 발전과 계급과 예술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지만 ― 그 관계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매개된다 ― 수많은 부르주아 학파의 형식주의적 예술·문학 비평처럼 그 관계 자체를 부인하거나 무시해서는 문화사의 전반적 흐름이나 주요 발전들을 이해할 수 없다.

예술과 사회

예컨대, 왜 중세 유럽의 예술은 (상대적으로) 그토록 정적이고 형식적이고 변화가 없었을까? 왜냐면 봉건제 하에서 (상대적으로) 느린 생산력 발전과 그에 따라 불변의 생산관계에 의존하는 엄격한 사회적 위계질서가 중세 유럽의 예술에 반영됐기 때문이다.

13세기 말 피렌체에서 (단테와 조토[이탈리아 화가]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티치아노에서 절정에 이르고, 그 뒤 독일·네덜란드·영국 등지로 퍼져나가 뒤러[독일의 화가이자 조각가]·브뢰헬[네덜란드 화가]·렘브란트·셰익스피어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르네상스라는 탁월한 예술적·문화적 고양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역사적 유물론은 그것이 처음에는 봉건제의 족쇄 안에서 성장하다가 나중에는 그 족쇄를 깨뜨린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역동적이지만 모순적인 자본주의 체제와 연관된 계급, 즉 부르주아지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수백 년씩 지속된 장엄한 예술 사조들(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낭만주의)이 갑자기 사라지고 모더니즘이 분출해 (인상주의·표현주의·야수파·입체파·미래파·절대주의·다다이즘 등의) 예술 운동들이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이유를 설명할 때 현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생산의 끊임없는 혁신”과 “모든 사회 조건의 부단한 교란”에 대한 대응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설명할 수 있을까?

블루스, 재즈, 리듬앤블루스, 소울, 힙합 등의 잇따른 출현과, 따라서 엘비스 프레슬리에서 에이미 와인하우스[영국의 소울·재즈·리듬앤블루스 가수]에 이르기까지 현대 대중음악의 변화 전체를 미국 흑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떼어 놓고 이해할 수 있을까?

심지어 개별 작품이나 예술가 개인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주의는 독특한 통찰을 제공한다. 존 버거는 빼어난 저작 《보는 방법》[국역: 《이미지, 시각과 미디어》, 동문선]에서 자본주의 사회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이용해 한스 홀바인[독일 화가]의 그림 〈대사들〉과 네덜란드 정물화들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도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다. 18개월 전 서울에서 나는 한국 예술가 백남준이 TV 모니터들을 쌓아 올려 만든 작품 〈다다익선〉을 보았다. 그 작품을 분석하려면 트로츠키의 불균등·결합 발전 이론이 필요하다.

제아무리 마르크스주의라 해도 예술에 대한 구체적 지식과 예술적 감수성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예술은 사회의 일부이고 사회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발전한다. 가장 풍부하게, 가장 심오하게, 가장 과학적으로 사회를 분석하는 방법인 마르크스주의는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훨씬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