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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게재] [알렉스 캘리니코스 방한 강연 ②:
반란의 라틴아메리카

우고 차베스 프리아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오랜 암 투병 끝에 2013년 3월 6일 병원에서 숨졌다. 〈레프트21〉은 2008년 1월 20일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방한해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좌파 정부들’이라는 주제로 대중 강연한 것을 그대로 녹취한 것을 재게재한다. 이 글은 〈레프트21〉의 컨텐츠 제휴 단체인 ‘다함께’가 2008년 3월 31일 발행한 〈맞불〉에 실린 글이다.

시애틀 시위 이후로 발전한 세계적인 반신자유주의·반전 운동이 가장 멀리 나아간 곳은 라틴아메리카다.

특히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세계적 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는 지난해 UN 총회에서 차베스가 부시를 악마로 묘사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또, 차베스가 권장한 노움 촘스키의 책은 아마존 1위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차베스라는 인물의 중요성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된다. 지난해에 나는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카이로 회의에 참석하러 이집트에 갔는데, 거기에 참석한 이집트 활동가들은 이슬람주의자이든 세속적 민족주의자이든 라틴아메리카가 반제국주의 투쟁의 본보기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도전이 특히 두 라틴아메리카 나라에서는 단지 상징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는 ‘21세기 사회주의’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고,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입(收入)을 상당 부분 사회복지에 지출했다. 그리고 볼리비아의 좌파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는 당선 직후 볼리비아의 천연가스를 국유화했다.

21세기 사회주의

모든 것이 사유화돼야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국유화는 구시대적 발상이고 사회주의는 죽은 사상이라는 통념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는 단순히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례다.

그럼에도 두 좌파 정부 모두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특히 차베스는 지난해 12월의 국민투표에서 자신의 새 헌법이 부결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더 깊이 다루기 전에 지난 수십여 년에 걸친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좀 살펴보도록 하자.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에는 라틴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내전에 휩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곳곳에서 좌파들이 득세했고 1959년에는 그 유명한 쿠바 혁명이 일어났다. 사실, 쿠바 혁명보다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같은 곳에서 일어난 노동자 대중 투쟁이 더 중요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 반란과 반혁명 그리고 다시 새로운 저항으로

그러나 좌파들의 이러한 약진은 미국을 등에 업은 라틴아메리카 지배자들에게 처참하게 분쇄당한다. 나라마다 쿠데타가 일어났고 극도로 억압적인 정권들이 좌파를 고문하고 탄압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1973년과 1976년에 일어난 쿠데타가 가장 악명 높은 사례들이다. 심지어 과테말라에서는 1980년대 초에 군대가 원주민 농민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만 명을 학살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반혁명은 당시의 세계경제 위기와 상호작용했다. 1982년에는 소위 ‘외채 위기’가 멕시코에서 시작됐다. 갑자기 라틴아메리카 각국은 그동안 서구 은행으로부터 빌려왔던 돈을 갚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IMF와 세계은행 같은 국제 금융 기관과 미국,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지배자들은 이 외채 위기를 이용해 모종의 경제적 반혁명을 수행했다.

오늘날 우리가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것이 그 반혁명의 실체다. 즉, 그들은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공공부문을 허물고 시장을 외국 상품과 자본에 개방시켰다. 그 결과 전 대륙에 걸쳐 고통과 가난이 급증했다. 일례로 볼리비아의 광업이 붕괴하면서 역사상 가장 투쟁적인 노동자 운동에 속했던 볼리비아 광원 운동이 사실상 파괴됐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저항의 주기가 시작됐다. 1994년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봉기가 그 발단이었다. 그 봉기는 멕시코와 캐나다와 미국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하는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발효하는 날에 일어났다.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타이밍이었다.

사파티스타 봉기에 뒤이어 라틴아메리카 각지에서 일어난 투쟁들은 규모가 훨씬 컸다. 예컨대 2001년 말 아르헨티나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경제 위기의 여파로 어마어마한 대중 반란이 일어났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반감을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증상은 중도좌파 정부들의 잇따른 집권이다. 지난 10년 동안 베네수엘라·브라질·우루과이·칠레·볼리비아·에콰도르에서 좌파 대통령이 당선했다. 이들 정부의 대다수는 막상 행동으로는 ‘사회적 자유주의’를 추구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업고 집권했는데도 이들은 전임자들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답습했다. 룰라 대통령의 사례가 가장 시사적이다.

룰라는 브라질 노동자당 지도자이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1970~1980년대의 거대한 노동운동을 통해 탄생한 대중적 좌파 정당이다. 룰라는 극빈층 출신으로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것으로 손꼽히는 브라질 노동자 운동을 이끈 진정한 노동계급 인사였다. 그러나 2002년 10월에 브라질 대통령이 된 후로 그는 자신의 과거를 배신했다. 그는 전임자들이 추진한 것과 매우 비슷한 정통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을 실행했다. 비록 대외 정책에서는 미국과 더 각을 세웠지만, 아이티에 브라질 군대를 파견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부시 정부와 협력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반적인 그림에 비춰 봤을 때 차베스와 모랄레스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그들은 다른 좌파 정부들보다 훨씬 급진적인 정책들을 폈고, 그 때문에 룰라 정부와 상당한 마찰을 겪었다. 모랄레스가 볼리비아의 천연가스를 국유화했을 때 피해를 본 외국 기업들 가운데는 브라질 기업도 있었다. 룰라는 볼리비아 민중이 이처럼 자기 나라 자원을 스스로 통제하려 한 것에 맞서 브라질 기업을 편들고 나섰다.

그렇다면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는 왜 다른가? 어째서 모랄레스와 차베스는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좌파 정부들에 비해 그토록 급진적인가? 근본적으로는, 차베스와 모랄레스가 자기 나라 대중 운동과 맺고 있는 관계 때문이다.

사실, 신자유주의에 맞선 빈민들의 대중 운동은 베네수엘라보다 볼리비아가 앞서 있다. 물 사유화에 반대하는 코차밤바 지역의 강력한 대중 투쟁이 있었고, 코카 재배농(코칼레로스)들의 운동도 있다. 코카 재배농들은 다른 수많은 전쟁과 함께 “마약과의 전쟁”도 치렀던 미국의 관점에서는 또 다른 “악의 축”이다. 하지만 볼리비아 코카 재배 농민의 다수는 실직한 광원들이다. 그들은 일자리를 잃은 뒤 입에 풀칠이라도 할 요량으로 코카 재배를 시작했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시장 논리를 충실히 따른 셈이다. 코카인은 국제 시장에서 고가에 팔리는 상품이다. 따라서 볼리비아나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코카를 재배하는 극빈자들은 지극히 합리적인 경제 주체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정부들을 종용해 코카 재배농들을 박멸하려 해왔다. 이에 맞서 볼리비아에서는 엄청난 저항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에보 모랄레스가 코칼레로스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급진적

엘알토는 볼리비아의 빈민들이 밀집해 있는 거대한 슬럼 도시로서, 수도인 라파스가 내려다보이는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다. 코칼레로스 운동이 한창일 때 바로 엘알토에서 거대한 시위들이 터져나왔다. 특히 2003년과 2005년에는 엘알토의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해 라파스로 향하는 교통을 차단했다. 그 때마다 우파 대통령이 한 명씩 사임했다. 2년 사이에 대중 운동이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볼리비아처럼 하면 좋을 것이다.

특히 2005년의 제2차 봉기 때는 천연가스 자원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핵심 쟁점이었다. 도로 봉쇄 운동을 주도한 단체의 핵심 요구는 천연가스 국유화였다. MAS(사회주의운동당) 지도자인 모랄레스는 사실 대중 운동의 오른쪽에 있었고 국유화를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 운동의 힘이 그를 왼쪽으로 밀어붙였고, 또 권좌로 밀어올렸다.

이에 비해 차베스는 본인이 훨씬 더 많은 주도력을 발휘했다. 그가 1999년 처음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대중 운동의 직접적 결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로지 베네수엘라 빈민들의 조직적인 지원 덕에 생존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고비는 2002년 4월, 우파들이 부시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차베스 축출을 위한 쿠데타를 감행했을 때였다.

쿠데타 세력은 주요 경제단체 회장을 신임 대통령으로 내정해 두기까지 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의 쿠데타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빈민 대중에게 색다른 환영을 받았다. 판자집으로 뒤덮인 고산 지대에서 빈민들이 쏟아져 내려와 대통령궁을 포위한 채 차베스의 석방을 요구했다.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찍은 다큐멘터리 한 편이 이 과정을 생생히 보여 준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대통령궁 바깥에서 가해지는 압박이 거세질수록 점점 불안 초조해지는 쿠데타 세력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차베스는 빈민들의 지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래서인지 그는 빈민들과의 관계를 공고히 다지려 했다. 그는 부시에게도 약간은 감사해야 한다. 부시 그 멍청이가 이라크를 침공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유가 폭등을 초래했고, 고유가 덕분에 차베스는 대중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훨씬 더 많은 재원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 관료와 대중 운동 사이에서

그러나 차베스와 모랄레스는 그들이 대중 운동과 맺고 있는 관계에도 불구하고 모두 자본주의 국가를 관장하고 있다. 달리 말해, 그들은 위계적이고 관료적이며 부패한데다 억압적인 국가의 관리자 위치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차베스는 군부의 수장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장교를 임명했지만, 그렇다고 군부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또한 차베스와 모랄레스 모두 지배 엘리트들의 악랄한 반격에 직면했다. 가령 베네수엘라의 지배 엘리트들은 2002년과 2003년의 쿠데타 기도가 실패하자 기업주들의 폐업을 조직해 석유 산업을 몇 달 간 마비시켰다. 또, 볼리비아의 지배 엘리트들은 모랄레스가 새로운 민주 헌법을 제안한 것에 반발해, 자신들이 기반을 두고 있는 석유·가스 매장 지역을 볼리비아로부터 독립시켜 주지 않을 거면 내전을 각오하라고 협박하고 있다.

이러한 계급 대치에는 인종차별적인 면도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지배 계급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식민 세력의 후손으로서 대체로 백인들이다. 반면, 노동자들과 빈민들은 유럽에 정복당한 원주민의 후손이거나 유럽인들이 데려온 흑인 노예들의 후손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대중 운동은 인구의 다수를 이루는 원주민과 흑인의 자기 권리 찾기 운동인 측면도 크다. 이들 나라의 지배 계급은 대통령이 원주민 출신이라는 점을 끔찍이도 혐오한다.

이 자들이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중남미 대륙을 피로 물들였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반혁명을 꿈꾸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위협을 물리치려면 대중 운동을 강화하는 것밖에 없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뜻하는 바는 기존 국가를 타도하고 대체할 노동자 권력 기관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좌파들이 추구하는 정치 전략이 많은 것을 좌우한다.

차베스의 정치 성향을 보자면, 분명 그는 대통령이 된 뒤로 이데올로기적으로 많이 급진화했다. 그는 좌파 민족주의자로서 집권했지만 그동안 마르크스주의 이론서들을 여러 권 탐독했고 연설 중에 트로츠키를 자주 찬양했다. 또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생산 방식들을 실험하고 장려했다.

차비스타(차베스 지지자) 운동 내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세력들이 혼재해 있다. 그 중에는 룰라나 기타 중도좌파 대통령들이 추구해온 것과 비슷한 정책들을 쌍수 들고 반길 우파들도 있고, 쿠바의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모델로 여기는 자들도 있다.

경종

그런데 지난 몇 달 사이에 차베스 정부가 보인 행보는 국가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우익의 준동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해 차베스 지지자들은 PSUV(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라는 당을 창립했다. PSUV는 5백만 명의 당원을 보유한 어마어마한 정당으로서, 차베스의 지지 기반이 얼마나 광범한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명백히 대다수 차비스타들은 PSUV를 상부의 지시를 대중에게 하달하는 창구 정도로만 여긴다. 정당과 대중 운동의 상호작용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해, 정당이 기층 대중의 주도적 행동으로부터 힘을 얻고 교훈을 도출한다는 관점이 그들에게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차베스가 발의한 새 헌법도 비록 훌륭한 개혁 조치가 일부 포함돼 있었지만 연임 제한을 없애고 포고령으로 통치할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등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12월 2일의 국민투표에서 우파는 이 헌법에 극렬히 반대하는 캠페인을 펼쳤고 결국 승리했다. 하지만 우파는 부전승으로 이긴 것이지, 여론이 그들 편으로 확 기울어서 이긴 것이 아니다. 새 헌법에 대한 반대표 수는 2006년 대선에서 우익이 얻은 표보다 약간 더 많았을 뿐이다.

그에 반해 찬성표는 2006년 대선에서 차베스가 얻은 표보다 3백만 표나 더 적었다. 심지어 차베스의 신당인 PSUV 가입자 가운데 백만 명 이상이 반대표를 던졌다. 달리 말해 차베스가 진 것은 차베스의 지지자 중 다수가 국민투표에 불참했기 때문이다. 한 관찰자는 국민투표 결과를 “차비스타 엘리트에 맞선 차비스타 거리의 반란”으로 묘사했다.

차베스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최근에 불거진 인플레, 식료품 부족, 관료들의 부패 등의 문제들에 불만을 품고서 국민투표 불참이라는 방식으로 차베스에게 벌을 준 것이다. 이는 재앙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좌파들에게는 경종을 울리는 사태 전개다.

차베스와 모랄레스의 선택은? ─ 칠레의 교훈과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선택

불행히도 차베스는 이로부터 잘못된 교훈을 도출해 급격히 우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래 몇 차례 연설에서 혁명의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고, 자신이 출연하는 TV 프로그램에서도 그런 말을 했다.

차베스는 여러 면에서 참 훌륭한 인물이긴 하다. 그는 매주 〈헬로 대통령〉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와 핵심 현안들에 대한 생각들을 밝히며 대중과 소통하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잘못된 메시지를 소통하려 하고 있다. 그는 대자본과 타협할 필요가 있다고도 말했다. 또한 대자본과 연줄이 있는 군 장교를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특히 2002년 4월의 쿠데타 주모자들을 사면한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이는 일단 우익의 자신감을 높여줄 것이라는 점에서 위험천만한 행보이다. 우익은 ‘봐라, 우리가 차베스에게 한 방 먹이니까 저렇게 꼬리를 내리지 않느냐, 더 세게 한 방 날려보자’고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차베스의 지지자들만 사기 저하된다.

또한 자본가들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방식으로 인플레나 식료품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자본가들이야말로 그러한 문제를 초래한 주범들이다.

어떤 점에서 차베스가 하려는 일은 1972~1973년 칠레에서 일어난 일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칠레에도 좌파인 민중연합 정부가 있었다. 민중연합 정부를 이끈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도 차베스와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사회 개혁들을 시도했다. 역시나 미국과 칠레의 지배 계급은 악랄한 반격에 나섰다.

그러자 칠레 노동자들이 아옌데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코르돈’이라는 방어 조직들을 건설한 것이다. 군대 사병들도 그런 조직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아옌데는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뜯어말리고 우익에게 양보했다.

일례로 그는 정부와 우익 사이에서 중재자 노릇을 할 수 있을 듯한 인물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그가 바로 1973년 9월 11일 쿠데타를 일으키는 아우구스트 피노체트였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 “9·11 테러”로 아옌데를 비롯한 수천 명의 좌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와 비슷하게 1980년대 후반 니카라과에서도 좌파인 산디니스타 정부가 점점 거세지는 압박에 직면했다. 레이건 정부의 후원을 받은 우익 게릴라 ‘콘트라’가 산디니스타 정권을 공격했다. 이에 산디니스타는 정책을 온건하게 바꾸고 더 친시장적인 정책들을 도입하는 식으로 대응했는데, 이는 산디니스타 정부를 구원해주기는커녕 1990년 선거에서 산디니스타가 패배하는 길을 열었다.

나는 차베스가 우익 쿠데타로 제거되기 직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차베스는 엄청난 지지 기반을 가진 지도자로서, 두 차례의 대선과 우익이 조직한 한 차례의 신임투표를 버텨낸 사람이다. 부시 정부가 차베스를 그토록 증오하는 이유 하나는 그가 선거에서 승리하는 좌파라는 점이다.

부시 정부의 세계관에 따르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우익의 전유물이어야 한다. 그래서 일부 네오콘들은 ‘사실 우리가 지지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유재산, 시장 그리고 법치’라는 논조의 책을 쓰기도 했다. 그들은 민주주의 확산이 자신들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차베스 같은 ‘선동꾼’들이 민심을 현혹해서 민주주의를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혁명의 대륙

차베스가 처한 여건은 아옌데가 1972년에 처했던 여건보다 훨씬 유리하다. 모랄레스와 차베스 모두 고유가 시대에 에너지 생산국을 통치한다는 이점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에너지 가격이 한없이 오르기만 하지는 않는다.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가 지금으로서는 경제적 입지가 유리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이점일 뿐이다.

문제는 차베스와 모랄레스가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이다. 두 지도자 모두 옛 자본주의 국가의 관료와 대중 운동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들의 줄타기가 아무리 신기에 가깝다 해도(차베스의 경우 정말 신기에 가깝다)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 어느 순간 그들은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좌파들이 옳은 선택을 하길 바란다. 그들이 온 몸을 던져 노동자, 농민, 빈민 들의 자기해방을 위한 싸움에 함께하기를 바란다. 그들이 그 편을 선택했을 때, 라틴아메리카는 단지 위대한 혁명가들의 땅이 아니라 진정한 혁명의 대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은 우리의 노력이 뒷받침되고 운이 따라 준다면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청중 질의에 대한 답변과 정리

먼저, 이랜드 노동자 동지의 감동적인 연설에 감사한다. 이랜드 동지들의 투쟁 승리를 기원한다.

둘째로, 시간상의 문제도 있고, 질문에 대한 답을 모두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질문에 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노움 촘스키가 중남미에 대해 쓴 것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 하지만 차베스가 나오미 캠벨과 사귄다는 비난에 맞서 차베스를 방어하고 싶다. 차베스는 단지 나오미 캠벨의 인터뷰에 응했을 뿐이다. 정작 슈퍼모델과 결혼하겠다는 자는 프랑스의 우파 대통령이다.

더 진지한 질문으로 옮겨 가자면, 우선 쿠바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 쿠바에서는 카스트로와 그의 동료 체 게바라가 소규모였지만 영웅적인 게릴라 부대를 결성해, 1958년과 1959년 부패하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정권을 전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쿠바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됐다. 특히 체 게바라는 여러 세대 동안 영웅이 됐다.

그럼에도 사실 쿠바 혁명은 다수의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권력을 장악한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는 1969년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브라질 노동자운동 등의 부상이 중남미 대륙에서 더 중요한 시사점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데서 일말의 거리낌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좌파의 염원은 대중의 자기해방이지,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유가는 항상 오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이를 좀 먹은 덕분이겠지만 내 경험에 비춰 절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할 수 있다. 물가상승의 효과를 제거한 실질 유가가 역사상 가장 높았던 때는 이란 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980년대 초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1990년대까지 낮은 경제성장률 때문에 유가는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최근 5년 사이에나 전 세계적으로 높은 경제성장률 덕에 유가가 눈에 띄게 올랐던 것이다. 따라서 유가가 늘 오르기만 한다는 가정에 기초한 전략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바로 지난주만 봐도 미국의 경제침체 전망으로 인해 유가가 제법 하락했다.

차베스와 모랄레스가 중국, 러시아와 맺은 동맹은 단기적인 전술로서 정당화될 수 있다. 미국 제국주의와 대적하고 있는 좌파 정권으로서는 동맹국을 선택하는 데서 이것저것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1918년 독일군이 혁명 직후의 러시아를 침략했을 때, 레닌은 기꺼이 영국과 프랑스 강도들로부터 총과 음식을 빌려 쓰자고 했다. 나는 차베스가 이란 정권과의 연계를 구축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과 어쩌다 적대 관계에 놓인 자본주의 정권과 동맹하는 것만으로 혁명 전략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본다.

부패 문제로 넘어가자. 좌파가 자본주의적 이권에 의해 부패하는 것은 필연이 아니냐는 질문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 좌파의 정치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브라질의 한 사회학자는 브라질 노동자당 지도자들과 노조 관료들이 2002년에 정권을 잡기 전부터 이미 일부 브라질 자본가들과 매우 가까워지고 있었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룰라가 브라질 자본과 화해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브라질 대자본과의 타협을 수반하는, 국가를 통한 개혁의 길을 추구한 룰라와 그 동료들의 정치적 선택에서 비롯한 일이다.

나는 차베스가 부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는 부귀영화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같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자본주의 국가의 관리자 위치에 있다는 것이고, 바로 그 국가에 차비스타들의 이해관계가 너무 깊이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차비스타 관료들은 온갖 부패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한국보다도 빈곤이 훨씬 만연한 곳임을 기억해야 한다. 가난한 노동계급 출신으로 국가 관료가 된 사람들에게는 관료적 특권이나 기업인들의 뇌물이 주체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올 수 있다.

베네수엘라에 살면서 그곳에 자녀까지 둔 미국인 동지는 우리 중 누구보다 베네수엘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동지의 두 가지 반론에 답하자면, 첫째 나는 인플레이션과 식료품 부족의 원인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음을 알고 있는데, 식량부족과 인플레이션이 부분적으로는 차베스를 궁지에 빠뜨리려는 자본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고 한다. 어떻든 간에 민간 기업들에게 더 많은 경제 권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식료품 부족과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문제는 오직 경제에 대한 민중의 사회적 통제를 확대하는 방식으로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둘째, 차베스 자신도 1990년대의 쿠데타 실패 이후 풀려났었기 때문에 음모자들을 풀어 줘도 괜찮다는 식의 관점은 매우 위험하다. 이는 마치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무슨 스포츠 게임처럼 여기는 태도다. 영국에는 크리켓이라는 괴상망측한 게임이 있는데, ‘페어플레이’에 대한 집착이 이 게임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이다. 그런데 지금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크리켓 게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차베스를 풀어 줬다고 해서 차베스가 그들을 풀어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베네수엘라 지배 엘리트들은 ‘1992년에 차베스를 풀어 준 멍청이가 대체 누구야? 그 때 그 놈(차베스)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았어야 했어!’ 라고 통탄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2002년의 우익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그들은 필경 차베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았을 것이다. 이것은 권력 투쟁이다. 권력 투쟁에서는 적을 상대로 페어플레이를 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도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질문자는 국가는 변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나는 그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의아하다. 라틴아메리카의 급진 좌파 사이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슬로건이 하나 있다. 멕시코 거주 영국인 맑스주의자[존 홀러웨이를 뜻함]가 쓴 책 이름에서 따 온,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구호인데, 달리 말해 국가가 우리의 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냥 무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2005년에 멕시코에 갔을 때 볼리비아의 천연가스 국유화가 잘못된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좌파들과 토론한 적이 있다. 국유화는 국가에 의한 행위인데 우리가 왜 국가를 끌어들여야 하느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아둔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대중 투쟁이 정부에 개혁을 강요할 수 있다는 사실은 노동운동의 역사 전체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기존 국가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강압적인 기관들의 집합체로서 조직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적임자를 임명하는 것으로 차베스에 대한 군부의 반란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1973년 쿠데타가 시작했을 때 아옌데는 “피노체트 장군의 신변에 별 탈이 없어야 할 텐데” 라고 말했다. 군 최고 사령관이였던 피노체트가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피노체트가 아옌데를 살해했다. 나는 차베스가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길 바란다. 그의 장군들이 그를 죽이지 않길 바란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베네수엘라 대중과 빈민들이 기존 국가를 타도하고 그들 자신의 국가로 대체하는 것밖에 없다. 새로운 국가를 창조해야만 기층의 민주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베네수엘라 대중이 국가를 자신의 동맹으로 여기지 말고 국가와 정면대결을 불사해야 한다. 다시 말해 나는 국가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분쇄돼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차베스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를 지지하지 않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우파와 지배 엘리트, 쿠데타 세력, 그리고 부시에 대항해 우리는 차베스를 지지한다. 차베스는 영웅이다. 하지만 영웅에 기대서는 사회를 변혁할 수 없다. 차베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여는 자신을 대체할 대중운동을 건설하는 것이다. 단지 또 다른 영웅이 아니라 사회를 스스로 운영할 수 있는 대중 민주주의가 그를 대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21세기 사회주의”에 대해 언급하겠다. 차베스는 “21세기 사회주의”라는 표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20세기의 실패한 스탈린주의 정권들과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올바른 의도인 것 같다. 나는 그에 덧붙여 사회주의가 과거 어느 때보다 21세기에 더 유효하다고 확신한다.

맑스가 1848년 《공산주의 선언》을 썼을 때 산업 자본주의는 서유럽과 미국의 일부 지역에 국한돼 있었다. 그러나 현재 산업 자본주의는 진정 세계적인 체제이며 세계 인구의 다수가 도시에 살고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세계 모든 사람들을 시장 논리에 종속시키고 있으며, 이는 맑스가 예언한 자본주의의 모습이 그가 살던 19세기보다 오늘날의 모습에 훨씬 더 부합함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맑스가 꿈꾸었던 가능성, 즉 세계 노동계급이 쟁취할 국제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진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 좌파 정부의 중요성은 그들이 우리에게 그 꿈이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지 어렴풋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카라카스의 빈민들이 차베스를 구했을 때, 엘알토의 빈민들이 볼리비아의 우파 대통령 두 명을 연달아 쫓아냈을 때, 진정한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