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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반란 40주년:
대중의 힘을 보여 준 1968

올해는 1968년 반란 40주년이다. 착취와 억압, 전쟁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반격에 나서서 승리할 수 있음을 입증한 1968년의 유산을 이언 버철이 살펴본다. 이언 버철은 68 반란에 직접 참가한 영국의 고참 사회주의자다. 국내 번역된 저서로 《서유럽 사회주의의 역사》(갈무리), 《삐딱이를 위한 레닌 가이드》(다함께)가 있다.

몇 년 전에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집권한 노동당 정부가 임금을 억제하고, 공공 서비스를 삭감하고, 이민 통제를 강화하고, 미국의 전쟁을 굴종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라고? 1968년 초의 영국 상황이 그랬다.

그러나 1968년은 정말 뜻밖의 해가 됐다. 그 해는 흔히 파란만장하고 때로는 기묘한 사건들, 그러나 무엇보다 세계 변혁의 가능성을 보여 준 사건들을 보며 누구나 그랬듯이 좌파들도 깜짝 놀란 한 해였다.

앞으로 몇 달 동안 언론들은 분명히 1968년을 대대적으로 다룰 것이다. [그러나] 언론 보도들은 노골적인 거짓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신화가 대부분일 것이다. 언론들은 1968년이 섹스·마약·로큰롤 ─ 그리고 “학생 반란” ─ 의 해였다고 보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68년의 진실은 우리 지배자들과 그들의 똘마니들에게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1968년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반격할 수 있음을 입증했고 때로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 줬기 때문이다.

1968년 1월에 베트남 민족해방 세력은 베트남을 점령한 미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그들은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기도 했다. 미군은 베트남인들을 대거 학살한 뒤에야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아직 패배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세계 최강대국이 굴욕을 겪었다. 이제 베트남인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영웅으로 받아들여졌다. 억압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은 베트남인들을 보며 한껏 고무됐다.

전 세계에서 베트남을 지지하는 시위들이 벌어졌다.

시위대의 다수는 학생들이었다. 그 전 20년 동안 학생들의 수가 크게 늘었다.

예전에는 대학 교육이 특권층으로 가는 경로였다. 그러나 이제는 대학교를 나와도 착취받는 화이트칼라 노동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밥 딜런의 노래처럼, “20년 동안 학교를 다녔지만, 저들은 우리를 주간 근무조로 편성한다네.”

학생들은 점점 더 분노했다.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학살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상황도 분노의 대상이었다.

과밀한 교실과 부족한 시설, 권위주의적인 학교 당국이 강요하는 잡다한 규율, 학생들의 기대와 동떨어진 낡아 빠진 교과 과정 ─ 이 모든 것들이 새롭게 등장한 학생 운동의 표적이었다.

낡은 질서는 저절로 뒤집어지거나 사멸하지 않았다. 서독에서는 학생 운동이 우파 언론의 비난과 욕설에 시달렸다. 우파 언론이 부추긴 증오 때문에 학생 지도자 루디 두치케가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다.

미국에서는 흑인 공민권 운동 지도자인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했다. 그는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멤피스로 가서 멤피스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호소하고 있었다.

공민권 운동과 노동계급 투쟁의 연계 가능성은 체제 전체에 악몽과도 같은 위협이었다.

영국에서는 좌파를 경악시킨 사건이 벌어졌다. 보수당의 주요 정치인인 이넉 파웰이 이민자들 때문에 폭력 사태가 빈발할 것이라며 이민을 비난하는 사악한 인종차별 발언을 했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이네아스가 티베르 강가에 도착해 원주민들을 죽이고 건설한 도시가 로마의 기원이 됐다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빗대서] “시뻘겋게 피로 물든” 강물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노동당 정부의 실정에 환멸을 느낀 백인 노동자들의 일부가 파웰의 주장에 동조했다. 메이데이에 런던 항만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파웰을 지지하는 행진을 했다. 그러나 저항도 있었다.

도전

항만노동자이자 국제사회주의자들(IS: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의 회원인 테리 배릿이 용감하게도 진정한 계급 쟁점들을 지적하는 리플릿을 배포했다. “이넉 파웰이 누구인가? 그는 우파 보수당 기회주의자로서 자신의 당과 자신의 계급을 돕는 일이라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는 항만노동자들의 수가 ‘너무 많다’고 거듭거듭 주장한 자다.”

배릿은 항만에 널리 퍼진 공포 분위기를 깨뜨리는 데 일조했다.

파웰의 연설은 극우파의 자신감을 부추겼을 뿐 아니라 좌파를 때리는 채찍 구실도 했다. 노동당은 대체로 인종차별 위협 앞에서 무기력했지만, 새로운 활동가들이 자극을 받아 긴급한 도전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용기를 얻었다. 파리에서 5월 초부터 시작된 학생 시위가 그들에게 용기를 줬다.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를 당국이 폐쇄했다. 5월 10~11일 밤에 학생들은 곤봉과 최루탄 가스를 쏘며 공격하는 경찰들에 맞서 싸웠다. 그들은 보도블럭을 깨뜨리고 바리케이드를 쌓으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정부가 물러서서 소르본 대학교를 다시 열고 투옥된 학생들을 석방했다. 학생들은 국가권력에 저항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5월 13일에 노조 지도자들은 하루파업으로 노동자들의 열기가 식기를 바라며 하루파업을 조직했다. 1백만 명이 파리 도심을 가로질러 행진했다.

사람들은 상징적 행동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튿날 낭트 시(市)의 쉬드아비아시옹[프랑스의 국영 항공기 제조업체]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을 무기한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며칠 만에 파업 물결이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1천만 명이 작업을 중단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 벌어졌다.

낭트에서는 노조가 물가를 통제하고 석유를 공급하는 등 도시를 운영했다. 다른 곳에서는 생필품 등의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행위원회들이 세워졌다.

정부는 국민투표를 실시하려 했지만 투표용지를 제작할 인쇄공들을 구할 수 없었다. 노동계급 권력은 추상적 문구에 불과하다고 치부했던 한 세대 사람들에게 이제 노동계급 권력은 눈앞의 현실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가 ─ 노조 지도자들과 선거 정치에 매몰된 공산당의 도움 덕분에 ─ 가까스로 통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노동계급 권력이 입증된 뒤인지라 과거로 고스란히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제 세계 권력의 중심지들이 흔들렸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내에서 거대한 격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킹의 암살 뒤에 소요 사태가 잇따랐다.

전쟁의 기획자인 린든 존슨은 대통령 재선 도전을 포기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전쟁 반대를 표명하며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던 로버트 케네디는 그의 친(親)시온주의 입장에 격분한 팔레스타인 학생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8월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장 밖에서는 경찰이 대규모 반전 시위대를 잔인하게 탄압했다.

동구권의 상황도 순조롭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알렉산드르 둡체크의 정부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약속한 바 있었다. 8월에 옛 소련군 탱크들이 프라하를 침공해 모스크바의 지배권을 회복시켜 놓았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대규모 저항에 부딪혔다.

소련은 자신의 패권을 다시 확립할 수 있었지만, 이미 동구의 “공산주의”가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폭로된 뒤였다.

전 세계의 공산당들이 소련의 프라하 침공을 비난했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획일적인 공산주의 운동의 종말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사건들이 1968년에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서로 다른 피억압 집단들이 억압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표면 아래에서는 반란들이 들끓었다.

런던시의 세입자들은 집세 인상에 반대하는 행진을 했고, 집 없는 사람들은 주택을 무단 점거하는 등 직접 행동에 나섰다. 점거 물결이 영국의 대학들을 휩쓸었다.

혼지 예술대학 학생들은 6주 동안 학교를 점거했다. 학생들은 곧바로 교육을 통제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경비들이 투입됐지만 오히려 점거중인 학생들과 사이좋게 어울렸다. 학생들은 경비들에게 차를 대접하고 경비견들에게 과자를 줬다.

울버햄프턴에서는 시크교도 버스 노동자들의 터번 착용을 금지한 조처에 항의하며 4천 명이 행진을 했다. 런던 북부의 인젝션 모울더스[플라스틱 사출성형 업체] 공장에서는 대부분 아시아계인 노동자들이 18일 동안 공장을 점거하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다.

헐 지방에서는 트롤 어부 세 명이 물에 빠진 것을 계기로 어부의 아내들이 어업의 안전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대거넘의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는 미싱 노동자들이 남녀 동일 임금을 요구하며 3주 동안 파업을 벌였다. 그것은 사실상 영국의 현대 여성 운동의 효시였다.

투쟁

10월에 북아일랜드의 데리에서는 가톨릭교도 차별에 반대하는 공민권 시위대가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경찰은 시위대에게 곤봉을 휘두르고 물대포를 쏘아댔다. 그 뒤에도 경찰은 가톨릭교도들의 밀집 지역인 보그사이드 지구를 미친 듯이 휘젓고 다녔다. 이를 계기로 투쟁의 새 국면이 시작됐다.

심지어 반동적인 크리켓[영국의 구기(球技) 경기]계(界)조차 영향을 받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영국 흑인 크리켓 선수인 바실 돌리베이라의 입국을 불허하자, 영국크리켓협회는 내부에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많았음에도 남아공 원정 경기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아공에 대한 스포츠 보이콧의 오랜 역사가 시작됐다.

비슷한 사건들이 전 세계에서 벌어졌다. 1968년 이후 거의 10년 동안 이탈리아·영국·포르투갈·폴란드·이란 등지에서는 대중적 노동계급 운동과 함께 투쟁이 지속됐다. 새 세대가 여성 운동, 동성애자 운동, 인종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 등 전투적인 운동들을 건설했다.

1968년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당시에는 흔했던 성차별·인종차별 사상이 퇴조했다. 물론 철저하게 근절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올해 내내 무식한 기자들이 분명히 되풀이할 거짓말 ─ 1968년의 삐딱이들이 의도는 좋았지만 순진했고, 그래서 곧 “현실”과 타협했다는 ─ 을 폭로해야 한다.

물론 배신자들은 있었다. 킴 하우얼스나 데이비드 트라이스먼 ‘남작’[둘 다 노동당 정치인들]처럼 현 정부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원칙들을 고수했다. 1968년에 우리는 전쟁과 인종차별, 불평등, 억압과 착취 위에 구축된 체제를 분쇄하기를 원했다. 우리는 지금도 그것을 원한다. 당시 파리 학생들의 구호처럼, “현실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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