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진ㆍ예슬의 비극적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동 성범죄에 큰 분노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한편, 우익 언론과 이명박 정부는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부추겨 사회 통제를 강화하려 한다. 존 몰리뉴의 이번 칼럼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끔찍한 범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모든 나라에서 때때로 특정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 이런 범죄가 성(性) 관련 범죄일 경우 사람들은 특히 불안해 하는 경향이 있고, 어린이가 피해자나 가해자일 때는 훨씬 더 불안해 한다.

자본주의 언론은 항상 이런 비극적 사건들을 좋아한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언론은 오래된 공식에 따라 충격적·선정적 보도를 쏟아낸다. 적어도 처음에는 피해자를 가족과 이웃의 사랑을 받은 훌륭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반면에, 용의자나 피고인은 ‘사악한 괴물’처럼 묘사한다. 그러다가 피해자 가족의 결함이 드러나면, 언론은 그 가족의 사생활도 낱낱이 파헤쳐 가차없이 웃음거리로 만든다.

물론 언론이 그런 짓을 하는 주된 동기는 신문을 더 많이 팔아먹거나 시청률을 올려서 이윤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언론과 언론을 통제하는 지배계급은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동기도 갖고 있다. 우리는 그런 이유를 알아야 하고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

타고난 악마

우리 지배자들에게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이고 따라서 위로부터 통제될 필요가 있다고 우리가 믿는 것이 대체로 이롭다. 인간 본성의 고유한 결함들 때문에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오래된 기초이다. 그래서, 끔찍한 범죄가 발생하면 그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악하다는 메시지를 언론이 사람들에게 주입하기 아주 좋은 기회가 된다.

또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또는 전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성(性)이 근본적으로 나쁜 것이고 엄격하게 통제되지 않으면 사회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한 것이라고 치부한다. 이런 견해는 연쇄강간·연쇄살인·아동학대 사건처럼 성을 폭력이나 범죄와 연결시킬 수 있는 경우 더욱 강화된다.

지배계급은 또, 우리가 우리끼리 서로 두려워하기를 바란다. 외부의 적(테러리스트나 공산주의자), 이주노동자, ‘무서운 십대’나 학교 폭력 써클(조직 폭력배), 연쇄살인에 맛들여 수풀 속이나 오솔길에 숨어 있는 남자를 두려워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더 많이 두려워할수록 우리의 자신감은 줄어든다. 우리가 이웃과 직장 동료들을 두려워할수록 지배자들에 맞서 단결하기는 더 힘들어진다. 우리가 더 원자화되고 고립될수록 우리의 저항력은 약해진다. 범죄에 대한 두려움, 특히 흉악 범죄에 대한 두려움은 일반적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지배자들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쉽게 이용될 수 있다.

그리고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의 전반적 지적 수준이 낮게 유지되는 것을 선호한다. 그들은 우리가 사회 구조나 인간의 행동을 일관되게 또는 정교하게 인식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타고난 악마’가 존재한다는 도덕주의적·미신적 관념이 대중 속에서 널리 퍼지면 아주 좋아한다. 정작 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성범죄는 그런 관념을 부추기는 아주 좋은 재료이다. 슬픔에 빠진 친척들이 그들의 감정을, 증오심과 복수심을 마구 터뜨리도록 대중 매체들이 얼마나 자주 부추기는지 살펴보라.

마지막으로, 흉악 범죄가 발생하면 항상 히스테리컬한 분위기에서 당국의 ‘강경 대처’나 ‘강경 대응’ ─ 형량 강화, 사형제 부활 따위의 ─ 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리고 때때로 지배계급은 이런 요구를 수용하거나 이런 요구와 상황을 이용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한다.

그렇다면, 언론과 지배계급의 이런 반응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는 이런 흉악 범죄들(아동 성추행·살해, 연쇄강간·연쇄살인 등)이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한다. 전체 범죄발생률이나 범죄가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에 미치는 실제 영향은 언론 보도가 시사하는 것보다 더 낮거나 미약하다. 특히, 가장 끔찍한 범죄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실제로, 범죄보다는 실업, 물가인상, 집세 인상, 사회복지 삭감, 질병, 교통사고, 가정 내 사고, 전쟁, 기후변화 따위가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과 복지를 훨씬 더 크게 위협한다.

히스테리

둘째, 그런 사건들은 항상 피해자, 피해자 가족, 가해자 가족에게 끔찍한 개인적 비극이고, 사실은 가해자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 중 언론의 사생활 공개나 선정적 보도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끔찍한 범죄의 가해자도 ‘괴물’이나 ‘타고난 악마’는 아니다. 타고난 천사가 없듯이 ‘타고난 악마’는 없다. 심지어 히틀러도 ‘타고난 악마’는 아니었다. 그런 생각은 어리석고 반동적인 관념이다. 범죄의 가해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모두 겪는 소외·억압·착취의 끔찍한 압력에 짓눌려 망가지고 부서지고 산산조각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소외·억압·착취의 압력은 우리 모두의 삶을 어느 정도 일그러뜨린다.

구체적 사실들을 무시한 채 모든 범죄를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만병통치약 같은 범죄 이론이나 해결책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는 생물학적 또는 ‘유전적’ 설명보다는 사회적·심리학적 설명에 훨씬 더 무게를 둬야 하고, 초자연적·미신적 설명에 철저하게 반대해야 한다. 이 말은 빈곤이나 실업이나 그와 비슷한 객관적 결핍 때문에 사람들이 강간·살인·아동학대를 저지른다(그런 요인들이 마치 유아사망률을 높일 수 있듯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그런 사회적 요인들이 어떻게 개인의 특수한 경험 ─ 가족 내에서의 또는 어린 시절의 ─ 과 맞물려서 인간성의 붕괴 가능성을 증대시키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언론이 부추기는 온갖 증오와 히스테리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확고하게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복수를 부르짖는 것에 반대한다. 복수는 피해자에게 이롭지도 않고 복수를 감행하는 사람들을 타락시킬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형량을 강화하라거나 더 가혹한 새 법률을 제정하라는 요구에도 반대한다. 그런 조처들이 범죄 억제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 분명히 흉악 범죄들은 비이성적이고, 따라서 이성적 계산으로 예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지배계급이 그런 조처들을 다른 목적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법률이나 경찰·법원·감옥의 권력을 강화하는 조처는 모두, 비록 겉보기에는 극소수의 ‘악한들’을 겨냥한 것일지라도, 사실은 국가의 전반적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국가는 노동계급의 친구가 아니라 적이고, 국가 자신의 주장과 달리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기구가 아니라 착취를 보증하는 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유별나게 끔찍한 범죄가 발생한 뒤 도덕적 공황 상태에서 강행된 조처들은 국가가 다른 경우나 다른 적들 ─ 산업 현장의 투사들이나 정치적 반대자들 ─ 을 상대로 적용할 수도 있다.

요컨대, 그런 끔찍한 범죄들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즉 그런 범죄를 만들어 내는 사회, 병들고 폭력적이고 성차별·인종차별적이고 착취와 소외로 점철된 사회를 끝장내는 것뿐이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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