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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천주교(로마 가톨릭) 산하인 가톨릭중앙의료원의 파업 사태는 처음에는 임금 문제(사학연금 부담 문제) 때문에 촉발됐으나 나중에는 병원측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아 장기화하고 있다. 최일붕이 가톨릭의 노동조합 윤리를 평가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발행)은 노동조합과 노동자 권리를 원칙상 인정하고 있다.

“… 사회 정의를 구현시키려면 ‘노동자들의,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항상 새로운 결속 운동’이 필요하다. 노동의 주체에 대한 사회적 지위 격하,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그리고 빈곤과 기아 지역의 증가는 이러한 결속이 현실적으로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요청한다. 교회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태도를 분명히 한다. 교회는 이를 자신의 사명이며 봉사요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성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는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노동자의 권리 추구를 단순히 … 최대 이윤이라는 기준에 의해 운용되는 경제 체제의 결과라고만 운명지울 수는 없다. 그와는 반대로, … 노동자의 객관적인 권리에 대한 존중은, … 전체 경제를 형성하는 ‘타당하고 근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

“… 교회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존엄성과 권리를 천명하고 그러한 존엄성과 권리가 침해되는 상황들을 고발하여, 위에 언급한 변화들[“현대의 경제 구조 및 노동 분배 구조를 재정립하게 하고 재조정하게 하는 것”]을 이끌어 인간과 사회의 참된 진보를 보장하는 것이 자신의 직무라고 생각한다.”

파업권도 인정하고 있으나 단서(“올바른 조건과 정당한 한도 내에서는”)를 달아 놓았다.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정당한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파업 혹은 작업 중지…[는] 올바른 조건과 정당한 한도 내에서는 합법적인 것이라고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인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은 ‘파업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따라서 파업에 참여했다고 하여 어떠한 개인적인 처벌이나 규제를 받아서는 결코 아니 된다.”

“올바른 조건과 정당한 한도”를 넘는 파업이란 “특히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남용”되는 파업이지만, 또한 “근본적인 공동체 봉사” 또는 “사회의 공동선[이라는] 요구에 상반되”게 “남용”되는 파업도 포함한다. “… 필요하다면 적절한 입법 수단을 통해서라도 그러한 봉사는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한다[.]” 파업을 “남용”하는 노조는 “이기주의 집단 또는 계층”이다.

추상적 공문구들 틈에 슬그머니 끼워 넣은 이런 단서에 근거해 가톨릭은 전국의 산하 병원에서 일어난 파업을 “사회의 공동선”에 거슬러 “남용”되는 파업으로, 그러한 파업을 조직한 노조를 “집단 이기주의자들”로 규정하고는, 한사코 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심지어 직권중재 같은 “적절한 입법 수단을 통해서라도 [근본적인 공동체] 봉사[를] 어떤 경우에도 보장”하기 위해 가톨릭은 경찰력에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동선과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경쟁과 이윤 축적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시장 논리이다. 병원 노동자들은 바로 이 신자유주의에 저항함으로써 공동체를 구출하고 공동선(공동체 봉사라는)을 구현하려 하고 있다.

병원의 소유자가 개인이든, 가톨릭 같은 단체이든, 아니면 국가이든, 소유권에 관계 없이 그 동안 의료 서비스는 시장 원리에 의해 지배돼 왔고 악화돼 왔다. 국립 병원이 “민영화”된 경우 이 점은 더욱 분명하다.

의료 서비스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갖춰야 할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바로 양질의 노동력이 유지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임금 수준을 유지 또는 향상하려는 노력을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런 노력이 파업으로 나타날 경우, 환자의 일부 또는 전부가 크고 작은 불편을 겪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패 여부를 떠나 파업을 겪은 병원이 미래의 갈등 재연을 우려해 어느 정도 의료 서비스 개선에 나선다면 장기적으로는 환자에게도 좋은 일이다. 아무의 희생도 없이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야 가장 좋겠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이고, 현실 세계에서는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학자 슘페터는 “공동선의 내용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공동선이 “특정인들의 선”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가령 1990년대 중·후반 동안 꾸준히 미국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을 악화시킨 빌 클린턴이 대선 후보 시절인 1992년 11월 4일에 한 연설에서 “우리에겐 새로운 공동체 정신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그 “공동체”는 미국인 전체를 뜻하지 않고 단지 미국의 상층 중간계급 이상 사회 상층부만을 뜻했다.

부유층과 권력층이 아닌 평범한 계층의 환자들과 병원 노동자들의 공동선은 교황과 사제들이 위선적으로 입에 올리곤 하는 공동선과 다르다. 우리의 공동선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는 연대, 이를 위한 자기 희생과 영웅적 용기, 그리고 비정한 이윤 논리와 시장 원리가 지배하지 않는 공동체이다.

교황의 수구 행적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가 1986년 초 민주 항쟁에 의해 타도되기 전까지 교황은 마르코스 부부와 친한 필리핀 주재 교황청 대사 토르필리아니를 통해 반정부적인 하이메 신 추기경에게 압력을 넣으려 애썼다. 마르코스가 퇴진한 직후 로마로 소환된 하이메 신 추기경은 바티칸으로부터 “쓰레기처럼 취급당했다.” 바티칸 방문중인 가톨릭중앙의료원 노조원들도 비슷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왜 그런지를 이 글에서 보여 주고자 한다.

1920년 폴란드 태생인 카롤 보이티야는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되기 전에 폴란드 크라코프의 대주교를 지낸 적이 있다. 올바르게도 그는 폴란드 연대노조(솔리다르노쉬)를 지지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의 총파업이 혁명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으로까지 고양되자 그것이 좌초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덕분에 야루젤스키 장군이 군사 쿠데타로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한 가톨릭 학자(지아니 B 보쪼)가 지적한 바로는, 1981년에 완성된 교황 회칙 〈노동하는 인간〉은 폴란드에서 연대노조 투쟁이 한창이던 당시 상황을 배경으로 읽을 때 가장 잘 읽힌다.

카롤 보이티야는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를 지지해 은밀하게 결성된 가톨릭 극우 평신자 단체인 오푸스 데이(‘신의 과업’이라는 뜻의 라틴어)를 은밀하게 지지했다. 교황이 되자 1982년 이 단체를 교황의 직속 기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올해 10월 6일 교황은 마침내 오푸스 데이 창설자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1902년∼1975년) 신부를 성인품에 올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탈리아판 오푸스 데이라 할 수 있는 ‘친교와 해방’을 지원해 왔다. ‘친교와 해방’은 기독교민주당내 우파 및 마피아와 밀접하게 연계돼 있는 일부 사제들의 지도를 받는 극우 단체이다.

1980년대에 어떤 제3세계 나라 추기경이 자기 나라 상황이 극우가 묘사한 바와 다르다고 말했을 때 교황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런 불평은 그만두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중미 방문을 몇 개월 앞둔 1982년 10월, 교황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부국장 버논 월터스 장군을 만나고 나서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좌파 정부에 반대한다는 뜻으로 산디니스타 정부내 사제 각료 네 명의 사임을 (헛되이) 요구했다. 1983년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의 중앙 광장에서 가진 대규모 옥외 미사에서 그는 “민중 교회”를 격렬히 비난하고, 니카라과 민중이 우익 콘트라 반군과 한통속으로 보고 있던 주교들에게 순명할 것을 훈계했다. 미사 참가자들인 군중이 항의하자 교황은 “조용히 하시오!” 하고 호통치는 것으로 일관했다. 로마로 돌아온 교황은 현대판 종교재판장 요셉 랏찡어 추기경에게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과 민중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을 쓰라고 지시했다.

1980년대 중엽의 주미 교황청 대사 피오 라기 대주교는 아르헨티나에 배치돼 일하던 1976년,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들을 축복해 주고 그들의 야수적 탄압을 정당화해 줬다. 군부는 1983년 물러날 때까지 적어도 몇 천 명을 고문으로 살해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씨아 마르케스는 교황의 “정신 구조”가 냉전적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1982년 미국 가톨릭 주교들이 당시 대통령 레이건의 핵무기 증강 계획에 반대하는 문서를 발표하려 했을 때 국무 장관 조지 슐츠와 부통령 조지 부시(현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아버지)는 교황을 만나 미국 주교들에 대해 불평했다. 바티칸의 재정 담당자 요셉 회프너 추기경은 미국 주교들을 비난하고 압력을 가해, 주교들이 초기 구상보다 훨씬 완화된 견해를 표명하게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바티칸은 냉전주의 집단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은 바티칸의 풍부한 정보망과 연결된 특수 부서를 만들었다. 그 부서는 바티칸과 협력해 나찌 전범들이 주로 남미에 은신처를 찾는 일을 도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중세 “그리스도교 왕국”으로의 복고를 꿈꾸는 가톨릭 전통주의자 또는 “가톨릭 근본주의자”이다.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두 보프가 지적하듯이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권력 유지와 권위를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한다. 미국의 진보적 가톨릭 신학자 찰스 커랜은 바티칸이 나머지 성원들을 “말 못 하는 양들” 취급을 한다고 비판했다. 한 예로, 교황이 되자마자 요한 바오로 2세는 평신자, 특히 여성들이 성체성사 준비와 성체 분배를 돕고 교리와 성서를 가르칠 수 있었던 네덜란드 가톨릭 교회에 그러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해 그 주교들을 굴복시켰다.

이탈리아에서 낙태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있었을 때, 투표를 앞두고 교황은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은 누구든 파문당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행히도, 투표자의 다수인 3분의 2가 교황의 협박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교황은 이혼과 피임에도 반대하는 전통적인 가톨릭의 입장을 고수해 왔다.

“인권”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다시피 했는데도 이제 그를 자유주의자로 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최근인 1999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옌데 정부를 1973년에 군사 쿠데타로 전복하고 장기 집권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 학살한 칠레 독재자 피노체트가 영국에서 가택 연금돼 있는 동안 그를 옹호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이기는커녕 교황은 반동적이고 교활한 늙은 여우에 지나지 않는다.

교황권의 성격

교황권은 역사가 오래 됐고 그 동안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고대 로마의 노예제 사회로부터 봉건제를 거쳐 현대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이러저러한 생산양식이 명멸했어도 교황권은 여태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교황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흥성하고 있는 제도이다. 이러한 연속성 때문에 흔히 사람들은 다른 모든 제도처럼 교황권도 사회와 함께 변천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로마 가톨릭이 처음에 형성된 건 서기 2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기간이지만, 확립의 결정적인 계기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313년 밀라노 칙령이었다. 성직 관료는 쇠퇴하는 로마 제국을 받쳐 준 몇 안 되는 효과적 버팀목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몰락하고 있는 체제를 성직자들이 구원할 수는 없었고, 교황권과 교회는 누구든 최대의 세력을 가진 집단이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호구가 됐다. 문명의 쇠퇴는 교회의 몰락과 병행했다.

서기 1000년경 로마 가톨릭은 완전히 무너져 버린 제도가 돼 있었다. 기혼 농민 사제, 성직에 임명된 봉신(封臣)에 지나지 않는 주교, 광대한 소유지를 경작시키며 안락하게 살아가는 수도사들, 세상을 등진 은자, 떠돌이 설교자 들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고대 철학과 원시적 자연 숭배를 뒤범벅해 놓은 종교를 믿고 있었다. 한편, 교회의 상부에 있는 로마 주교들은 많은 재산과 부패와 타락한 행동으로 유명했다.

이후 몇 세기 동안 유럽 사회는 극적으로 변했다. 도시가 등장하고, 교역과 수공업 생산이 증대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이주가 늘고, 농업이 발전했다. 군주정이 등장하고, 왕권의 보호를 받는 정부가 들어섰다. 이 모든 것들 덕분에 서유럽은 세계의 고립되고 낙후한 지역으로부터 번영하고 발전하는 사회로 변모했다.

서기 1046년부터 개혁파 교황들이 등장해 성직자 집단을 조직된 기구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사제는 결혼이 금지됐고, 주교가 강요하는 규율에 효과적으로 종속됐다. 수도원도 교황의 통제를 받게 됐다. 주교들은 교황의 후원을 받아 군주에게 성직상의 특권을 요구하거나, 왕권의 보호를 받는 정부에 권세 있고 유능한 행정 각료로 입각했다.

교황권은 전성기의 봉건 사회와 밀접하게 연관됐다. 그리고 봉건 사회가 계속 변함에 따라 다시 쇠퇴하게 됐다.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세속 문화와 세속 교육이 등장했다. 한편, 고위 성직자들은 부패로 되돌아갔고, 하급 성직자들은 무지와 미신으로 되돌아갔다.

1500년경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 지방 일부 지역의 봉건 권력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으로 말미암아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은 ― 다시금 교황의 지도를 받으며 ― 살아남았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에 뒤처지게 된 교황권은 성직자를 다잡아 훈련시켰고, 가톨릭 교회는 절대 군주와 새로운 자본주의 상공업자들 모두에게 유용함이 입증됐다. 절대 군주는 토지 소유 계급을 대리해 유럽의 대부분을 통치했고, 신흥 상공업 자본가들은 규율 있고 순종적인 노동인구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권력은 변화에 저항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사상 투쟁에서 드러났다. 갈릴레이가 물질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자 로마는 그를 비난하고 박해했다.

18세기에 교회는 천동설을 처음으로 부정한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을 조용히 금서 목록에서 제외함으로써,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돈다고 가르치는 어처구니없는 지적 부조리에서 이럭저럭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갈릴레이에 대한 비방과 중상을 옹호했다. 그의 사상이 “당시에는 위험했다”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이처럼 봉건 사회의 유산인 교황권이 어떻게 21세기까지 살아남았을까? 봉건적인 채로 남아 있지 않음으로써 그럴 수 있었다. 가톨릭 교회와 교황권 지지 국가들은 19세기에 등장한 국민 국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가 1870년경에 패배하면서 가톨릭 교회는 세속의 일들에 간섭하지 못하게 됐고, 권력도 박탈당했다. 하지만 오늘날 교황은 거액을 투자하는 자본주의 투자가이다. 그리고 이 금융 투기에서만큼은 바티칸은 매우 ‘자유주의적’이다.

1864년 교황 비오 9세는 자유와 민주라는 사상을 포용한다는 이유로 가톨릭 자유주의자들을 비난했다. 그가 〈오류 교서〉에서 열거한 자유주의자들의 여든 가지 “오류”에는 종교적 관용, 세속 교육, 다수결, 정교분리 등이 포함됐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비밀 결사, (성서 보급을 위한)성서공회, 자유주의적 성직자 단체”가 하나로 뭉뚱그려져 비난받았다. 비오 9세는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해 엄격한 교리를 확정했고, 교황 무오류설을 주창했다. 요즘의 신부들도 믿고 있는 이 교리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 근대 문명에 대한 반동에 지나지 않았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8년 뒤에 치러진 비오 9세의 장례식은 군중의 공격을 받았다. 민병대가 도착해 군중을 저지함으로써 가까스로 관이 티베르 강물로 던져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후임 교황 레오 13세는 1891년 〈노동헌장〉 반포를 통해 권위주의적 이미지를 불식시켜 보려 했다. 그가 인정한 노동자 권리에는 최저생계비 임금, 어지간한 근로조건, 노동조합 결성권 등이었다. 〈노동헌장〉은 또한 사유재산이 신이 준 법률이라고 선언하는 한편, 노동자들이 권리를 위해 투쟁할 권리는 아무 데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노동헌장〉은 계급 투쟁을 명시적으로 비난했다. 그 “헌장”은 실제로는 사용자들과 정부가 이러한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의무를 다하라는 호소였다. 가톨릭 사용자와 가톨릭 정부조차 전혀 열의를 가지고 이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이 자유주의적이 됐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비오 9세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반동적이기 이를 데 없는 사상에 역행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바티칸은 새로운 사상에 그다지 개방적이지 않았다. 가령 바티칸은 교황 무오류설을 비판한 한스 큉은 물론 “정치신학”을 주창한 요안 밥티스트 메츠, 심지어 칼 라너조차 기피 인물로 낙인찍었다. 라너는 다른 종교에도 “익명의 그리스도”가 숨어 있으므로 다른 종교로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암시했다.

1960년대 이후 바티칸의 공식 결정과 평신자 사이에 차이가 벌어져 왔다. 1980년대 초 보수화 분위기 속에서조차 미국의 기혼 가톨릭 신자의 85퍼센트가 1968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재천명한 피임 금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로마와 일부 지역 성직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벌어지기도 했다. 중미와 브라질의 사제 중 다수가 해방신학을 지지했다. 반면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멕시코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개막식 석상에서 해방신학을 비난했다.

오늘날 교황권은 가톨릭 교회가 활동하는 모든 사회에서 보수 세력과 동맹함으로써 생존하고 있다. 비오 12세 하의 교황권은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지지했다. 비오 12세가 되기 전의 에우게니오 파첼리 추기경은 히틀러가 독일 제3제국 총리에 취임한 해인 1933년, 교황청 국무부 장관으로서 히틀러와 “제국 협약”을 맺었다. 이 때 히틀러는 이렇게 선언했다. “국제 유대인 집단에 대항한 긴급한 투쟁에서 특히 중요할 신뢰권(圈)이 창출됐다.” 바티칸은 아직까지도 이 당시의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비오 12세는 홀러코스트, 즉 유대인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을 때 “[유대인들은] 제 앞가림을 할 줄 안다”고 냉소적으로 말했고, 나중에는 홀러코스트가 “과장됐다”고 말했다.

보수 세력과의 동맹은 때때로 고난도의 교묘한 수완이다. 왜냐하면 가장 반동적인 세력은 때때로 패배하고 교황의 정책은 생존자 쪽에 서려 애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야만적인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등과 같은 복잡한 책략이 필요했다. 아프리카(특히 짐바브웨)의 백인 식민주의에 대한 지지로부터 가장 보수적인 흑인 세력 지지로 전환하는 것도 고난도 기술이었다. 그리고 노동자 저항을 무마한 대가로 교황권을 존중해 준 일부 동유럽 스탈린주의 정권(특히 폴란드 야루젤스키 정권)과의 공생 관계도 들 수 있다.

교회는 또한 모든 계급 사회에 “민중의 아편”을 위한 시장이 있고 교회는 그 시장이 어디 있는지 알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다.

여성이 가장 쉬운 타깃인데, 극도의 저임금 노동에 매여 있는 제3세계 여성들일수록 피임과 낙태에 대한 교회의 반동적 입장에 동화시키기가 더 쉽다.

하지만 중미와 브라질에서처럼 가톨릭이 자유와 독립과 사회 정의를 위한 피억압자·피착취자의 투쟁과 밀접하게 연관될 수가 있다. 그 동안 교황권은 가톨릭을 그러한 투쟁에서 떼어놓느라 열심이었다. 하지만 현지의 하급 사제들은 그다지 열심이지 않을 수 있고,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평신자들은 흔히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과 권리를 지키는 것을 따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곤 한다.

교황권은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여러 차례 책략을 써서 적응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적응할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계급 없는 사회이다. 모든 보수적 세력, 지배하고 착취하는 계급, 억압 따위를 퇴치할 때만 유럽산 민중의 아편, 가톨릭은 차츰 있으나마나 한 것이 돼 가고 교황권도 사라질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어떤가?

[편집자 주] 가톨릭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교회(개신교)도, 그것도 가장 진보적 교단이라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소속의 권호경 목사도 노동 쟁의의 과녁이 돼 있다. 천주교와 기장은 김대중과의 동맹 덕분에 민주 개혁 세력으로 여겨졌었고, 바로 이런 인상을 이용해 김대중과 CMC와 CBS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 인상은 잔영일 뿐임을 최일붕이 들춰 낸다.

11세기에 교황권이 가톨릭 교회의 재편에 착수할 때와 거의 같은 때에 교회의 권위를 대중이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 때에야 비로소 가톨릭 교회의 권력에 두드러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부터 교황권, 중세 사상, 성직자 독신 제도 등을 신랄하고 대중적인 말투로 비판하고 때로 중상·비방했다.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부패, 불합리한 사상, 아무에게도 전혀 쓸모 없다는 점 등을 들춰 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전혀 딴판일 수 있음을 성서에 바탕을 두고 보여 줬다. 좀더 합리적이고, 평신도에게 좀더 의미 있고, 일상 생활과 좀더 관련성 있고,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를 자처하는 사제들의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인 주장이 없는 그리스도교가 가능함을 그는 보여 줬다.

루터는 그에 앞선 이단자들이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았다. 즉, 그는 유럽 전역의 다양한 사회 계급들에게 매력을 주는 사상을 설파함으로써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한 계급들 가운데 신흥 부르주아지가 있었다. 이 신흥 상공업자들은 도시를 관리하면서 교역과 수공업 생산을 통해 이윤을 얻고 있었는데, 욕심 많고 간섭하기 좋아하는 성직자들과 불명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그들의 사상을 싫어했다. 루터는 또한 봉건 귀족의 호감도 샀다. 그래서 그는 중세 독일 제국을 분할하고 있던 지방 제후들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루터는 가톨릭 교회에 맞선 투쟁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했기 때문에도 성공할 수 있었다. 농민과 도시 수공업자와 노동자가 자기의 사상에 의존하기 시작하자 루터는 교회와 성직자는 표적인 반면에 봉건 지주와 신흥 상공업자에게는 해를 끼쳐서는 안 됨을 분명히 했다.

1525년, 경제적 고통을 겪어 온 데다 영주와 제후의 권력 강화에 부딪힌 독일 농민들이 참다 못해 기존 사회 질서에 반대하는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이 사건은 엥겔스의 《독일 농민 전쟁》에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혁명적 프로테스탄트 설교자 토마스 뮌처의 고무를 받은 농민들은 착취와 억압에 맞선 투쟁과 성서의 메시지를 밀접하게 연관시켰다. 그들은 평등, 고정 지대, 농민 의회 등을 요구했고, 많은 도시민들과 농촌 수공업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루터의 반동은 극단적으로 폭력적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영주와 농민을 똑같이 비난하더니 일단 농민군이 진격하기 시작하자 영주들에게 농민을 “찔러 죽이고, 때려 죽이고, 살해하라”고 말했다. 농민이 “신앙심 없고, [하나님 앞에서]위증하고, 거짓말하고, 불순종하는 악한과 무뢰한들로서 [하나님에 의해] 벌로 육체와 영혼을 몰수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농민은 그 뒤 실제로 대량 학살당했다.

제네바로 이주한 프랑스 변호사 장 깔뱅의 개신교 사상(오늘날의 장로회가 계승자를 자처하고 있다)이 16세기 중엽의 사회 변혁에 더 적합한 관점을 제공했다. 그가 통치한 제네바에서 그의 개혁은 신흥 상공업자들과 밀접하게 연관됐다. 깔뱅도 지배자들에 대한 반란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루터보다 더 효과적으로 가톨릭 반대 정치 행동을 정당화했다. 크리스쳔 시민은 학정과 불경스러움을 퇴치하는 사회 개혁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깔뱅은 그러한 정치 행동이 특히 크리스쳔 국가 관료들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도시민과 수공업자와 농민뿐 아니라 반동적이고 퇴영적인 일부 귀족도 깔뱅의 대의를 수용했다.(이 점은 명화 “여왕 마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프랑스 농민이 가톨릭 영주에 맞서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 프로테스탄트 귀족은 이에 강력히 반대한다는 뜻을 깔뱅 파 의회에서 표명했고,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혁명은 유산됐다. 또, 리용 시 인쇄공들은 처음에 깔뱅주의를 지지했으나, 파업중에 배신자들을 구타한 것을 프로테스탄트 관리들이 비난하자 깔뱅주의를 버렸다.

영국의 깔뱅 파인 청교도들은 찰스 1세와 국교회(성공회)내 고교회파(高敎會派)에 반대하는 투쟁을 주도했다. 고교회파는 로마 가톨릭의 교의(敎義)와 전례(典禮)와 의식(儀式)을 상당 부분을 고수하려 했던 국교회내 권력자들이었다. 그런데 청교도들 안에서 정말로 급진적인 사상이 등장하려 할 때마다 청교도 지도자들은 그것을 억누르곤 했다. 가령 모든 청교도들(장로회·조합교회·침례회)이 철저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수평파를 비난했다.

깔뱅 파는 가톨릭 못지 않게 엄격히 “이단”을 색출해 박해했다. 스페인 출신의 망명자 미겔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한다 해서 제네바에서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영국 수평파의 일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만인의 구원을 위해 죽었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받았다. 깔뱅 파는 자파 소속의 “선민”만을 위해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근면·절약·투자라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봉건 사회의 옛 위계제를 허무는 데 일조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농민·수공업자·임금노동자 같은 생산자들에게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새로운 형태의 착취에 순종하는 것을 뜻했다. 신앙이 개인의 “양심”에 호소해 그를 순응하게 만드는 데는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적어도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대항하는 16∼17세기 가톨릭 자체의 “대항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그랬다.) 개신교는 평신도를 직접 겨냥했기 때문이다. 공장이 거의 없고 자본가들이 수공업자와 농민의 노동으로부터 이윤을 취하는 사회에서 개신교는 노동자 개개인의 마음 속에 ‘마음의 경찰관’을 들여보내 노동 규율과 정규적인 생산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요새는 미국이다. 1997년 당시 미국인의 85.2퍼센트가 그리스도교 신을 믿는다고 답변하고 있으며, 3분의 1 이상이 근본주의 신앙(성경 무오류설을 믿는)을 고백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1980년대 이래로, 특히 지난해 9·11 이래로 더 극성을 부리고 있다 한다. 정치적으로 반동적인 개신교 근본주의는 상당수 부시 정부 각료들(특히 법무 장관 존 애슈크로프트와 부통령 딕 체니와 국방 장관 도널드 럼스펠드와 국무 장관 콜린 파월을 포함한다)의 후원을 받고 있다. 근본주의는 또 가톨릭처럼 동성애와 낙태와 미혼모에 반대하고 가정 가치관을 수호한다. 근본주의적 교계 지도자(가령 ‘기독교연합’ 총재 팻 로버트슨 같은 자)들은 미국 사회의 언저리에 있는 인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피억압자 운동의 주적에 포함된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리스도교의 주류는 가톨릭이나 자유주의적 개신교가 아니라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개신교이다. 복음주의는 근본주의보다 온건한 보수주의라 할 수 있으나, 근본주의자들도 복음주의자를 자처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는 갈수록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개신교를 믿다가 비종교인이나 타종교인이 된 사람 수가 무려 1천만 명이 넘는다(각각 8백만 명과 2백만 명). 물론 새로 개신교인이 되는 사람도 계속 생겨나지만, 전체 성장은 둔화하고 있다. 성장의 위기에 직면한 개신교는 갈수록 종파주의적이 돼 가고 있고, 신비주의적이 돼 가고 있고,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 성장 둔화가 질적 미성숙을 낳고, 질적 미성숙이 성장 둔화를 부채질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다. CBS 권호경 사장과 재단이사회의 경우도 이런 추세의 일부가 된 옛 진보적 성직자 이미지의 잔영일 뿐이다.

교황권은 봉건 사회가 몰락해도 반동을 이용함으로써 ― 또 그럼으로써만 ― 존속할 수 있었던 반동적·기생적·억압적 제도이다. 그러나 개신교도 착취와 억압을 이용해 왔고, 가톨릭보다 덜 기생적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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