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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노조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 사회 정의를 구현시키려면 ‘노동자들의,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항상 새로운 결속 운동’이 필요하다. 노동의 주체에 대한 사회적 지위 격하,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그리고 빈곤과 기아 지역의 증가는 이러한 결속이 현실적으로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요청한다. 교회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태도를 분명히 한다. 교회는 이를 자신의 사명이며 봉사요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성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는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노동자의 권리 추구를 단순히 … 최대 이윤이라는 기준에 의해 운용되는 경제 체제의 결과라고만 운명지울 수는 없다. 그와는 반대로, … 노동자의 객관적인 권리에 대한 존중은, … 전체 경제를 형성하는 ‘타당하고 근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
“… 교회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존엄성과 권리를 천명하고 그러한 존엄성과 권리가 침해되는 상황들을 고발하여, 위에 언급한 변화들
파업권도 인정하고 있으나 단서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정당한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파업 혹은 작업 중지…
“올바른 조건과 정당한 한도”를 넘는 파업이란 “특히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남용”되는 파업이지만, 또한 “근본적인 공동체 봉사” 또는 “사회의 공동선
추상적 공문구들 틈에 슬그머니 끼워 넣은 이런 단서에 근거해 가톨릭은 전국의 산하 병원에서 일어난 파업을 “사회의 공동선”에 거슬러 “남용”되는 파업으로, 그러한 파업을 조직한 노조를 “집단 이기주의자들”로 규정하고는, 한사코 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심지어 직권중재 같은 “적절한 입법 수단을 통해서라도
그러나, 공동선과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경쟁과 이윤 축적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시장 논리이다. 병원 노동자들은 바로 이 신자유주의에 저항함으로써 공동체를 구출하고 공동선
병원의 소유자가 개인이든, 가톨릭 같은 단체이든, 아니면 국가이든, 소유권에 관계 없이 그 동안 의료 서비스는 시장 원리에 의해 지배돼 왔고 악화돼 왔다. 국립 병원이 “민영화”된 경우 이 점은 더욱 분명하다.
의료 서비스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갖춰야 할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바로 양질의 노동력이 유지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임금 수준을 유지 또는 향상하려는 노력을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런 노력이 파업으로 나타날 경우, 환자의 일부 또는 전부가 크고 작은 불편을 겪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패 여부를 떠나 파업을 겪은 병원이 미래의 갈등 재연을 우려해 어느 정도 의료 서비스 개선에 나선다면 장기적으로는 환자에게도 좋은 일이다. 아무의 희생도 없이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야 가장 좋겠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이고, 현실 세계에서는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학자 슘페터는 “공동선의 내용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공동선이 “특정인들의 선”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가령 1990년대 중·후반 동안 꾸준히 미국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을 악화시킨 빌 클린턴이 대선 후보 시절인 1992년 11월 4일에 한 연설에서 “우리에겐 새로운 공동체 정신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그 “공동체”는 미국인 전체를 뜻하지 않고 단지 미국의 상층 중간계급 이상 사회 상층부만을 뜻했다.
부유층과 권력층이 아닌 평범한 계층의 환자들과 병원 노동자들의 공동선은 교황과 사제들이 위선적으로 입에 올리곤 하는 공동선과 다르다. 우리의 공동선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는 연대, 이를 위한 자기 희생과 영웅적 용기, 그리고 비정한 이윤 논리와 시장 원리가 지배하지 않는 공동체이다.
교황의 수구 행적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가 1986년 초 민주 항쟁에 의해 타도되기 전까지 교황은 마르코스 부부와 친한 필리핀 주재 교황청 대사 토르필리아니를 통해 반정부적인 하이메 신 추기경에게 압력을 넣으려 애썼다. 마르코스가 퇴진한 직후 로마로 소환된 하이메 신 추기경은 바티칸으로부터 “쓰레기처럼 취급당했다.” 바티칸 방문중인 가톨릭중앙의료원 노조원들도 비슷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왜 그런지를 이 글에서 보여 주고자 한다.
1920년 폴란드 태생인 카롤 보이티야는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되기 전에 폴란드 크라코프의 대주교를 지낸 적이 있다. 올바르게도 그는 폴란드 연대노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의 총파업이 혁명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으로까지 고양되자 그것이 좌초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덕분에 야루젤스키 장군이 군사 쿠데타로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한 가톨릭 학자
카롤 보이티야는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를 지지해 은밀하게 결성된 가톨릭 극우 평신자 단체인 오푸스 데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탈리아판 오푸스 데이라 할 수 있는 ‘친교와 해방’을 지원해 왔다. ‘친교와 해방’은 기독교민주당내 우파 및 마피아와 밀접하게 연계돼 있는 일부 사제들의 지도를 받는 극우 단체이다.
1980년대에 어떤 제3세계 나라 추기경이 자기 나라 상황이 극우가 묘사한 바와 다르다고 말했을 때 교황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런 불평은 그만두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중미 방문을 몇 개월 앞둔 1982년 10월, 교황은 미국 중앙정보국
1980년대 중엽의 주미 교황청 대사 피오 라기 대주교는 아르헨티나에 배치돼 일하던 1976년,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들을 축복해 주고 그들의 야수적 탄압을 정당화해 줬다. 군부는 1983년 물러날 때까지 적어도 몇 천 명을 고문으로 살해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씨아 마르케스는 교황의 “정신 구조”가 냉전적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1982년 미국 가톨릭 주교들이 당시 대통령 레이건의 핵무기 증강 계획에 반대하는 문서를 발표하려 했을 때 국무 장관 조지 슐츠와 부통령 조지 부시
전통적으로 바티칸은 냉전주의 집단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은 바티칸의 풍부한 정보망과 연결된 특수 부서를 만들었다. 그 부서는 바티칸과 협력해 나찌 전범들이 주로 남미에 은신처를 찾는 일을 도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중세 “그리스도교 왕국”으로의 복고를 꿈꾸는 가톨릭 전통주의자 또는 “가톨릭 근본주의자”이다.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두 보프가 지적하듯이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권력 유지와 권위를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한다. 미국의 진보적 가톨릭 신학자 찰스 커랜은 바티칸이 나머지 성원들을 “말 못 하는 양들” 취급을 한다고 비판했다. 한 예로, 교황이 되자마자 요한 바오로 2세는 평신자, 특히 여성들이 성체성사 준비와 성체 분배를 돕고 교리와 성서를 가르칠 수 있었던 네덜란드 가톨릭 교회에 그러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해 그 주교들을 굴복시켰다.
이탈리아에서 낙태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있었을 때, 투표를 앞두고 교황은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은 누구든 파문당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행히도, 투표자의 다수인 3분의 2가 교황의 협박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교황은 이혼과 피임에도 반대하는 전통적인 가톨릭의 입장을 고수해 왔다.
“인권”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다시피 했는데도 이제 그를 자유주의자로 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최근인 1999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옌데 정부를 1973년에 군사 쿠데타로 전복하고 장기 집권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 학살한 칠레 독재자 피노체트가 영국에서 가택 연금돼 있는 동안 그를 옹호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이기는커녕 교황은 반동적이고 교활한 늙은 여우에 지나지 않는다.
교황권의 성격
교황권은 역사가 오래 됐고 그 동안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고대 로마의 노예제 사회로부터 봉건제를 거쳐 현대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이러저러한 생산양식이 명멸했어도 교황권은 여태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교황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흥성하고 있는 제도이다. 이러한 연속성 때문에 흔히 사람들은 다른 모든 제도처럼 교황권도 사회와 함께 변천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로마 가톨릭이 처음에 형성된 건 서기 2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기간이지만, 확립의 결정적인 계기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313년 밀라노 칙령이었다. 성직 관료는 쇠퇴하는 로마 제국을 받쳐 준 몇 안 되는 효과적 버팀목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몰락하고 있는 체제를 성직자들이 구원할 수는 없었고, 교황권과 교회는 누구든 최대의 세력을 가진 집단이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호구가 됐다. 문명의 쇠퇴는 교회의 몰락과 병행했다.
서기 1000년경 로마 가톨릭은 완전히 무너져 버린 제도가 돼 있었다. 기혼 농민 사제, 성직에 임명된 봉신
이후 몇 세기 동안 유럽 사회는 극적으로 변했다. 도시가 등장하고, 교역과 수공업 생산이 증대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이주가 늘고, 농업이 발전했다. 군주정이 등장하고, 왕권의 보호를 받는 정부가 들어섰다. 이 모든 것들 덕분에 서유럽은 세계의 고립되고 낙후한 지역으로부터 번영하고 발전하는 사회로 변모했다.
서기 1046년부터 개혁파 교황들이 등장해 성직자 집단을 조직된 기구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사제는 결혼이 금지됐고, 주교가 강요하는 규율에 효과적으로 종속됐다. 수도원도 교황의 통제를 받게 됐다. 주교들은 교황의 후원을 받아 군주에게 성직상의 특권을 요구하거나, 왕권의 보호를 받는 정부에 권세 있고 유능한 행정 각료로 입각했다.
교황권은 전성기의 봉건 사회와 밀접하게 연관됐다. 그리고 봉건 사회가 계속 변함에 따라 다시 쇠퇴하게 됐다.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세속 문화와 세속 교육이 등장했다. 한편, 고위 성직자들은 부패로 되돌아갔고, 하급 성직자들은 무지와 미신으로 되돌아갔다.
1500년경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 지방 일부 지역의 봉건 권력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으로 말미암아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은 ― 다시금 교황의 지도를 받으며 ― 살아남았다.
프로테스탄트
그러나 이제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권력은 변화에 저항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사상 투쟁에서 드러났다. 갈릴레이가 물질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자 로마는 그를 비난하고 박해했다.
18세기에 교회는 천동설을 처음으로 부정한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을 조용히 금서 목록에서 제외함으로써,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돈다고 가르치는 어처구니없는 지적 부조리에서 이럭저럭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갈릴레이에 대한 비방과 중상을 옹호했다. 그의 사상이 “당시에는 위험했다”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이처럼 봉건 사회의 유산인 교황권이 어떻게 21세기까지 살아남았을까? 봉건적인 채로 남아 있지 않음으로써 그럴 수 있었다. 가톨릭 교회와 교황권 지지 국가들은 19세기에 등장한 국민 국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가 1870년경에 패배하면서 가톨릭 교회는 세속의 일들에 간섭하지 못하게 됐고, 권력도 박탈당했다. 하지만 오늘날 교황은 거액을 투자하는 자본주의 투자가이다. 그리고 이 금융 투기에서만큼은 바티칸은 매우 ‘자유주의적’이다.
1864년 교황 비오 9세는 자유와 민주라는 사상을 포용한다는 이유로 가톨릭 자유주의자들을 비난했다. 그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8년 뒤에 치러진 비오 9세의 장례식은 군중의 공격을 받았다. 민병대가 도착해 군중을 저지함으로써 가까스로 관이 티베르 강물로 던져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후임 교황 레오 13세는 1891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이 자유주의적이 됐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비오 9세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반동적이기 이를 데 없는 사상에 역행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바티칸은 새로운 사상에 그다지 개방적이지 않았다. 가령 바티칸은 교황 무오류설을 비판한 한스 큉은 물론 “정치신학”을 주창한 요안 밥티스트 메츠, 심지어 칼 라너조차 기피 인물로 낙인찍었다. 라너는 다른 종교에도 “익명의 그리스도”가 숨어 있으므로 다른 종교로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암시했다.
1960년대 이후 바티칸의 공식 결정과 평신자 사이에 차이가 벌어져 왔다. 1980년대 초 보수화 분위기 속에서조차 미국의 기혼 가톨릭 신자의 85퍼센트가 1968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재천명한 피임 금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로마와 일부 지역 성직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벌어지기도 했다. 중미와 브라질의 사제 중 다수가 해방신학을 지지했다. 반면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멕시코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개막식 석상에서 해방신학을 비난했다.
오늘날 교황권은 가톨릭 교회가 활동하는 모든 사회에서 보수 세력과 동맹함으로써 생존하고 있다. 비오 12세 하의 교황권은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지지했다. 비오 12세가 되기 전의 에우게니오 파첼리 추기경은 히틀러가 독일 제3제국 총리에 취임한 해인 1933년, 교황청 국무부 장관으로서 히틀러와 “제국 협약”을 맺었다. 이 때 히틀러는 이렇게 선언했다. “국제 유대인 집단에 대항한 긴급한 투쟁에서 특히 중요할 신뢰권
보수 세력과의 동맹은 때때로 고난도의 교묘한 수완이다. 왜냐하면 가장 반동적인 세력은 때때로 패배하고 교황의 정책은 생존자 쪽에 서려 애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야만적인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등과 같은 복잡한 책략이 필요했다. 아프리카
교회는 또한 모든 계급 사회에 “민중의 아편”을 위한 시장이 있고 교회는 그 시장이 어디 있는지 알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다.
여성이 가장 쉬운 타깃인데, 극도의 저임금 노동에 매여 있는 제3세계 여성들일수록 피임과 낙태에 대한 교회의 반동적 입장에 동화시키기가 더 쉽다.
하지만 중미와 브라질에서처럼 가톨릭이 자유와 독립과 사회 정의를 위한 피억압자·피착취자의 투쟁과 밀접하게 연관될 수가 있다. 그 동안 교황권은 가톨릭을 그러한 투쟁에서 떼어놓느라 열심이었다. 하지만 현지의 하급 사제들은 그다지 열심이지 않을 수 있고,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평신자들은 흔히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과 권리를 지키는 것을 따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곤 한다.
교황권은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여러 차례 책략을 써서 적응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적응할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계급 없는 사회이다. 모든 보수적 세력, 지배하고 착취하는 계급, 억압 따위를 퇴치할 때만 유럽산 민중의 아편, 가톨릭은 차츰 있으나마나 한 것이 돼 가고 교황권도 사라질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어떤가?
11세기에 교황권이 가톨릭 교회의 재편에 착수할 때와 거의 같은 때에 교회의 권위를 대중이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 때에야 비로소 가톨릭 교회의 권력에 두드러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부터 교황권, 중세 사상, 성직자 독신 제도 등을 신랄하고 대중적인 말투로 비판하고 때로 중상·비방했다.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부패, 불합리한 사상, 아무에게도 전혀 쓸모 없다는 점 등을 들춰 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전혀 딴판일 수 있음을 성서에 바탕을 두고 보여 줬다. 좀더 합리적이고, 평신도에게 좀더 의미 있고, 일상 생활과 좀더 관련성 있고,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를 자처하는 사제들의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인 주장이 없는 그리스도교가 가능함을 그는 보여 줬다.
루터는 그에 앞선 이단자들이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았다. 즉, 그는 유럽 전역의 다양한 사회 계급들에게 매력을 주는 사상을 설파함으로써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한 계급들 가운데 신흥 부르주아지가 있었다. 이 신흥 상공업자들은 도시를 관리하면서 교역과 수공업 생산을 통해 이윤을 얻고 있었는데, 욕심 많고 간섭하기 좋아하는 성직자들과 불명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그들의 사상을 싫어했다. 루터는 또한 봉건 귀족의 호감도 샀다. 그래서 그는 중세 독일 제국을 분할하고 있던 지방 제후들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루터는 가톨릭 교회에 맞선 투쟁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했기 때문에도 성공할 수 있었다. 농민과 도시 수공업자와 노동자가 자기의 사상에 의존하기 시작하자 루터는 교회와 성직자는 표적인 반면에 봉건 지주와 신흥 상공업자에게는 해를 끼쳐서는 안 됨을 분명히 했다.
1525년, 경제적 고통을 겪어 온 데다 영주와 제후의 권력 강화에 부딪힌 독일 농민들이 참다 못해 기존 사회 질서에 반대하는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루터의 반동은 극단적으로 폭력적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영주와 농민을 똑같이 비난하더니 일단 농민군이 진격하기 시작하자 영주들에게 농민을 “찔러 죽이고, 때려 죽이고, 살해하라”고 말했다. 농민이 “신앙심 없고,
제네바로 이주한 프랑스 변호사 장 깔뱅의 개신교 사상
하지만 깔뱅은 그러한 정치 행동이 특히 크리스쳔 국가 관료들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도시민과 수공업자와 농민뿐 아니라 반동적이고 퇴영적인 일부 귀족도 깔뱅의 대의를 수용했다.
영국의 깔뱅 파인 청교도들은 찰스 1세와 국교회
깔뱅 파는 가톨릭 못지 않게 엄격히 “이단”을 색출해 박해했다. 스페인 출신의 망명자 미겔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한다 해서 제네바에서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영국 수평파의 일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만인의 구원을 위해 죽었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받았다. 깔뱅 파는 자파 소속의 “선민”만을 위해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믿고 있
근면·절약·투자라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봉건 사회의 옛 위계제를 허무는 데 일조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농민·수공업자·임금노동자 같은 생산자들에게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새로운 형태의 착취에 순종하는 것을 뜻했다. 신앙이 개인의 “양심”에 호소해 그를 순응하게 만드는 데는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오늘날 개신교의 요새는 미국이다. 1997년 당시 미국인의 85.2퍼센트가 그리스도교 신을 믿는다고 답변하고 있으며, 3분의 1 이상이 근본주의 신앙
우리 나라에서도 그리스도교의 주류는 가톨릭이나 자유주의적 개신교가 아니라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개신교이다. 복음주의는 근본주의보다 온건한 보수주의라 할 수 있으나, 근본주의자들도 복음주의자를 자처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는 갈수록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개신교를 믿다가 비종교인이나 타종교인이 된 사람 수가 무려 1천만 명이 넘는다
교황권은 봉건 사회가 몰락해도 반동을 이용함으로써 ― 또 그럼으로써만 ― 존속할 수 있었던 반동적·기생적·억압적 제도이다. 그러나 개신교도 착취와 억압을 이용해 왔고, 가톨릭보다 덜 기생적이라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