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5월, 프랑스에서는 1천2백만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벌어졌다. 드골 정권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노동자들의 이 투쟁이 다이너마이트라면, 투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학생들의 반란이었다.

당시에 적어도 절반 정도의 학생들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명문학교인 고등사범(ENA)과는 달리 일반 대학의 학생들은 졸업 후 안정된 취업도 보장받기 어려웠다.

특히 투쟁의 발단이 됐던 파리 교외의 낭테르 대학은 빈곤한 지역에 급히 부실하게 세워진 대학이었다. 도서관과 실험실이 늘 학생들로 꽉 차고, 정식 교수와 강의실도 부족한 상태여서 학생 75퍼센트가 교육과정을 제때 마치지 못할 정도였다.

점거

1960년대 초부터 프랑스 정부가 벌이는 알제리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부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은 이보다 더 광범했다. 1968년, 대학생 8명이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해 대표적인 미국계 기업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파리 사무실을 습격했다가 체포되자, 이에 항의하는 낭테르 대학의 학생들이 대학 본부를 점거했다.

낭테르 대학 총장은 휴교령을 내렸고, 이 조처에 분노한 학생들은 거리로 나왔다. 낭테르 대학 학생들은 소르본 대학 학생들과 연대집회를 열었다.

경찰은 이 대열을 폭력으로 진압했고 수백 명의 학생들을 체포했다. 대학교수연합은 학생들의 투쟁을 옹호했고, 파업에 돌입했다. 한 여론조사를 보면, 파리 인구의 80퍼센트가 학생들의 요구 ─ 학교 시설 증설, 여학생 기숙사에 남학생 방문 허용, 대학 운영에 학생 참가 ─ 를 지지했다.

교육부 장관은 이 파업을 “불법”이라고 선언했고, 체포 학생들을 투옥시키거나 벌금형에 처했다. 그러나 저항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학생들은 소르본 대학과 상시에 부속학교도 점거했다. 노동자들을 포함해 토론에 참가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대학을 개방했고, 그들은 그 곳에서 어떠한 문제든 토론할 수 있었다.

대형 강당에서 열린 소르본 점거 총회에는 매일 밤 5천 명 이상이 참가했고, 강당은 터질 듯했다. 모든 사람들은 발언을 할 수 있었고, 발언 시간은 최대 3분이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발언을 하기 위해 줄을 섰다.

수많은 ‘실행위원회’들도 등장했다. ‘점거대책위원회’, ‘언론위원회’, ‘선전위원회’, ‘학생-노동자 연락위원회’, ‘외국인[이주] 학생 차별 폐지 위원회’ 등이 구성됐다.

경찰의 폭력 행위에 대한 기록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위원회부터 자율적 시험 체제의 의의를 연구하는 위원회까지 다양했다. 여러 공간·집기 들의 분배를 담당하는 위원회도 구성돼, 여러 위원회들이 사무실로 쓸 공간과 집기를 배분해 주기도 했다.

어떤 대강당은 간이식당이 됐고, 어떤 대강당은 탁아소가 됐다. 학생들은 응급치료소와 숙소를 만들고, 청소당번도 정해 순서대로 청소를 했다.

1968년 5월 당시 프랑스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스무 살 미만의 청소년들도 대학생들처럼 중고생 행동위원회를 구성했다.

동맹 휴업

중고생들은 24시간 동맹휴업을 하고 시위에 참가했다. 일부 교사들이 교실 문을 잠그고 열세 살 학생들을 학교에 가두려고도 했지만, 그들은 학교를 점거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학부모와 함께!

대학생들은 소르본에서 가까운 오데옹 극장도 점거했다. 이 극장에서는 매일 7천여 명이 모여 대규모 토론을 벌였다. 라땡 지구에 사는 노동자들은 영화나 연극을 보러 극장에 가듯, 운동을 접하기 위해 오데옹 극장에 갔다.

학생들은 프랑스의 거의 모든 대학을 점거했고, 학생들의 용기와 기지는 곳곳에서 빛났다. 바리케이드를 건설하고, 시위 부상자들을 돌보고, 붉은 기가 달린 오토바이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또, 학생들은 공장으로 찾아가 노동자들에게 연대와 파업을 호소하고, 파업 노동자들과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학생과 노동자 모두 “드골은 물러나라”고 외쳤다. 요구는 다양했지만, 이들의 분노는 드골 정부에 대한 반대로 모아졌다.

학생들의 반란과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지가 확산되기 시작하자 정부는 대학 평준화와 대학 운영 학생 참가를 약속했다. 학생들의 저항이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번지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처럼 단호하게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노동자들은 1천2백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파업으로 드골 우파 정권을 벼랑 끝으로 내몰 수 있었다.

반(反)이명박 시위와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한국의 청소년·학생 들도 40년 전 68 반란 때 프랑스 청소년·학생 들과 같은 구실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