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대학에 가면 자유가 있지 않나요?” 중고등학생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지만, 이제 그런 것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새벽같이 시흥 집에서 출발하면 8시 반에 학교에 도착해요. 낮 1시까지 수업을 들은 후 15분 만에 밥을 먹고 3시까지 알바 하러 학원에 출근해야 하죠. 밤 11시까지 강의를 하고 나서 집에 오면 12시고. 이런 상황에서 학교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죠. 저는 여섯 과목을 듣는데 3월에만 발표를 2개 했어요. 4월에 레포트 2개를 냈고, 일주일 후까지 레포트를 4개 더 내야 해요. 아직 발표가 3개 더 남았고요.” 연세대 3학년인 이재빈 씨의 생활이다.

‘88만 원 세대’ 대학생들은 이제 낭만은커녕 방황할 시간조차 없다. 빡빡한 학사 일정과 입학부터 시작되는 살인적인 경쟁은 등록금, 실업난과 함께 학생들에게 커다란 스트레스다.

경쟁 강화는 대학의 기업화와 관계 있다. 노무현은 “대학은 산업”이라며 이를 추진했고, 이명박은 아예 기업이 원하는 바에 맞춘 대학 교육을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영어 강의 의무화·상대평가제

‘글로벌 경영’의 선두주자로 불리는 고려대의 경우 이미 몇 년 전부터 ‘수요자 중심 교육을 위한 기업·대학 공동 포럼’을 열어 기업들로부터 대학 커리큘럼에 대한 조언을 받고 있다. 대학의 “수요자”는 기업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대학은 점점 ‘기업 맞춤형 교육’ 위주로 변해 가고 있다.

고려대는 ‘기업·대학 공동 포럼’에서 삼성의 요청을 받아 모든 학생이 한자 인증 2급을 따야만 졸업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었다. 수강 학생이 21명 이상인 모든 수업이 상대평가가 됐고, 전체 강의의 34퍼센트가 영어로 하는 강의가 됐다. 모든 학생이 다섯 과목을 영어로 들어야 졸업할 수 있다. 졸업을 위해서는 6백50~8백50점이 넘는 토익 점수를 따야 한다.

각 대학에서 ‘글로벌 경쟁력 강화’의 대표적 수단으로 각광받는 영어 강의 의무화는 특히 조기유학·어학연수 등을 하지 못한 ‘국내파’ 학생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킨다.

“영어 강의 때문에 룸메이트는 매일 밤을 샜어요. 숙제도 너무 많고. 그런데도 워낙 [외국에] 살다 온 사람이 많아서 학점은 잘 안 나왔어요.” 고려대 2학년인 김민정 씨의 말이다.

취업, 토익·영어 강의 의무화 등으로 대학생들의 월 평균 영어 사교육비는 31만 원이나 된다. 알바로 이 돈을 충당하는 학생들도 43.9퍼센트나 됐다.(〈위클리조선〉1994호)

졸업 요건이나 학과 선택 요건에 토익 점수가 포함된 것도 부담을 늘린다.

“영어 놓은 지 5년이 됐는데 졸업 때문에 토익을 봤어요. 졸업 제한 점수보다 1백 점이 모자랐어요. 순전히 졸업 때문에 토익 학원을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고려대 4학년인 최혜미 씨의 말이다.

성균관대 4학년인 조승수 씨가 전하는 상황은 더 심하다. “성균관대 1학년인 학부생이 2학년 때 경영학과를 선택할 수 있으려면 토익 8백50점을 넘겨야 해요. 1학년 때부터 도서관에서 토익 책을 끼고 살게 되는 거죠.”

이런 부담을 더욱 파괴적으로 만드는 것은 상대평가제다. 상대평가제는 각 학점별로 학생 수를 정해놓고 일렬로 줄 세우는 제도다. 고려대 4학년인 김종희 씨는 “상대평가여서 학생들이 기를 쓰고 출석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평가 기준이 더 필요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레포트도 덩달아 많아지는 거죠. 결국 과제가 강의를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돼 버려요. 수능처럼 말이죠” 하고 토로했다.

계급 장벽

같은 4학년인 한 학생은 “상대평가니까 친구들끼리도 경쟁의식이 심해요.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노트 빌려달라고 하니까 ‘나는 원래 노트 안 빌려줘’하고 단칼에 거절했어요. 이해는 가면서도 좀 서운했죠. 이제는 그냥 노트 빌려달라는 소리를 안 해요” 하고 말한다.

더구나 이런 경쟁 속에 뒤처지는 것은 결국 돈 없는 학생들이다.

“생활비를 대려고 매달 평균 과외를 2~3개씩 하다 보면 자기 전 새벽 3시까지 과제랑 레포트를 하고 다음날 내는 식이예요. 과외 안 하고 학원 다니고 쉬고 자기관리 하는 애들은 아침 일찍 와서 똑바로 들을 수 있겠지만, 두 번 과외 뛰고 밤에 과제하고 아침에 와서 제정신으로 수업 듣기란 참 힘든 일이에요.”

“기업에 원서 낼 때 보면 평균 평점 3.7~3.8점 정도로 다 비슷해요. 결국 차이가 나는 것은 자격증, 시험, 어학연수 같은 것들인데 이런 것들은 죄다 돈이거든요. 결국 돈에서 갈리는 거죠.”


‘88만 원 세대’ 대학생들의 희망 찾기

대학의 신자유주의 ‘개혁’ 칼바람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더 시리다. 등록금과 생활비 때문에 알바를 하는 학생들은 영어 강의와 학점에서 뒤처진다. 토익, 한자인증 같은 졸업 요건을 채우려면 또다시 알바를 해야 하고 졸업이 늦어진다. 그러다가 취업문에 서면 이미 저만치 뒤처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우선 등록금 부담을 없애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등록금이 연평균 가계 소득의 12분의 1(한 학기 1백50만 원)을 넘지 않도록 하는 ‘등록금 상한제’를 발의한 상태다. 이것이 조속히 도입돼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핀란드나 덴마크처럼 무상교육을 쟁취해야 한다.

진정한 학문 탐구를 위해서는 ‘기업 맞춤형 교육’이 사라져야 한다. 대학은 자유로운 학문 탐구의 장이지 ‘신입 사원 생산지’가 아니다. 강제 영어 강의와 강제 토익 등은 사라져야 하고 영어가 필요한 학생들을 위해서는 자유롭게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내실 있는 영어 강의를 많이 개설해야 한다.

내실 있는 학문 탐구를 위해서는 상대평가가 맨 먼저 사라져야 한다. 대신 정규 교수를 대폭 확충해서 강의당 학생 수를 확 줄여야 한다.

1968년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학생과 교수들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종종 한국에 비해 훨씬 나은 교육 환경으로 묘사되는 프랑스의 교육제도도 1968년의 엄청난 대중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다. 학생들이 시작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1천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총파업으로 번졌다. 그 결과 프랑스는 대학 서열화가 크케 완화됐다. 현재 프랑스의 대학 등록금은 15만~30만 원 수준이다. 대학생들은 대부분 정부의 장학금을 받는다.

우리도 희망은 있다. 2005년 고려대에서 삼성 회장 이건희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한 것은 대학의 기업화를 상징적으로 보여 줬지만 많은 고려대 학생들은 이에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후 고려대는 7명에게 보복성 출교 처분(입학 기록조차 삭제하는 최고 징계)을 내렸다.

그러나 이건희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고 학생들을 출교시킨 총장 어윤대는 학내 반발을 사 재임에 실패했다. 그는 교수들의 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복학을 위한 천막농성과 수십 개 시민·사회·학생 단체들의 광범한 지지 여론이 약 2년 동안 이어졌고, 결국 출교생들은 올해 전원 학교로 돌아왔다. 이것은 대학의 기업화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줬다.

광우병 쇠고기 반대 시위가 이명박 정권을 흔들어 놨듯이, ‘88만 원 세대’의 잠재력은 대학의 기업화와 파괴적 경쟁 강화도 뒤흔들고 막아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