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많은 시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독재 타도”, “정권 퇴진”을 외치는 모습에서 1987년 6월 항쟁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1980년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급진화한 대학생들이 6월 항쟁의 촉발자 구실을 했다. 이들은 각종 좌파 사상(대체로 스탈린주의로 해석된 마르크스주의)을 받아들여 광주항쟁의 교훈을 분석하고 독재를 타도할 전략을 모색했다. 정권은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전두환 정권은 상당 기간 학생 좌파들을 대중과 분리해 고립시킬 수 있었지만, 계속 성공하지는 못했다. 첫 번째 전환점은 1987년 1월 서울대 언어학과 박종철 씨의 죽음이었다.

그는 보안경찰의 잔인한 고문으로 사망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각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철아, 살아서 보지 못한 것, 살아서 얻지 못한 것, 인간자유, 해방. 죽어서 꿈꾸어 기다릴 너를 생각하며 찢어진 가슴으로 약속한다. … 이제는 끝장내리라.”(서울대 언어학과 학생들)

그러나 쇠고기 장관 고시를 강행한 이명박처럼 당시 전두환은 독재 연장 조치인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고 육사 동기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결국 민정당(한나라당의 당시 이름) 전당대회가 열리는 6월 10일 대중이 폭발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학생 투쟁이 촉발한 자생성의 폭발

많은 사람들이 대중의 놀라운 자발성을 현재 촛불시위의 특징으로 주목한다. 〈한겨레〉는 6월 항쟁과 다른 점으로 이를 들기도 한다.

그러나 미조직 대중의 폭발적 참여와 대중의 창조성·활력은 이번 촛불시위만의 특징은 아니다. 6월 항쟁도 마찬가지였다.

거리의 전투는 거의 자생적이었다. 대부분의 좌파들이 미조직 대중의 놀라운 진출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집회를 호소하기는 했지만 상징적 지도부 구실 이상을 하지는 못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기록한 어느 책의 평가처럼 “국민운동본부가 상징성과 명망으로 마련한 ‘장’에 뛰어든 민중은 그 장의 ‘실질’을 거머쥐고 투쟁을 통해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각성하는 한편, 잠재되었던 변혁성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연일 수십만~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전투를 벌이자 경찰은 통제력을 상실했다. 경찰은 곳곳에서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무장해제 당하기 일쑤였다. 전두환은 군대 투입과 양보 조처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는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였다. 대중이 결국 승리한 것이다.

노동계급의 구실

6·29 선언은 양보인 동시에 군부의 시간 벌기용 꼼수라는 성격이 동시에 있었다. 군부는 호시탐탐 반격을 노렸다.

군부가 친위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육군참모총장 박희도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출마할 경우 불행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부의 음모는 좌절됐다. 6·29 선언 열흘 뒤 이 땅에서 ‘공돌이’, ‘공순이’로 멸시받으며 숨죽여 왔던 노동계급이 깨어났다.

6월 항쟁을 7~9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분리해 학생과 ‘중산층’의 투쟁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인상적인 평가다. 당시 시위대열의 주축은 미조직 노동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6월 20~21일 성남의 시위에서 연행된 사람 중 70퍼센트 이상이 노동자였다. 당시 노동자들은 노조 같은 기초적인 조직도 없었기 때문에 개인으로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참가는 6월 항쟁의 규모, 지속성, 전투성이라는 측면에서 커다란 구실을 했다.

거리 시위에서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작업장에 돌아가 거대한 파업 물결을 일으켰다. 민주화를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만든, 결정적 쐐기를 박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이 4·19 혁명과 1980년 ‘서울의 봄’이 군부의 반동 쿠데타로 끝난 것과 달리 6월 항쟁이 그런 운명을 겪지 않은 결정적 차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노동계급의 힘은 1987년 당시보다 훨씬 강력하다. 대규모 핵심 작업장에 민주노조로 조직되고 투쟁 속에 단련된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이런 거대한 잠재력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다면 이명박을 더욱 궁지로 몰 수 있다.

자유주의 야당의 모순

군사독재 시절 김대중과 김영삼의 야당은 대중의 분노를 표출해 주는 통로 구실을 하기도 했다. 야당의 선거운동 집회는 종종 “금기의 언어가 표출된 공간이었다.”(강준만) 특히 김대중은 항쟁에 참가한 많은 노동자·민중에게 그럴듯한 대안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시 야당(통일민주당)이 대중 운동과 맺는 관계는 매우 모순적이었다. 이들은 대중 운동을 군부와 정치 협상을 하는 데만 이용하려 했다. 실제로 이들은 항쟁이 정점에 오른 6·26 대회를 여야 영수회담에 방해된다며 반대했고, 7월에 폭발한 노동자 대투쟁도 군부에게 빌미를 준다며 신경질을 내며 외면했다.

야당은 6월 항쟁의 최대 수혜자로 여겨졌지만 어이없는 권력 다툼과 분열로 노태우에게 어부지리 승리를 안겨 주기도 했다. 그해 말 대선에서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다.

오늘날 사정은 그때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더는 민주당을 진보적 대안으로 여기지 않는다. 개혁을 배신하고 광우병 쇠고기 수입과 한미FTA의 길을 튼 게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나라당의 지지율 폭락에도 민주당 지지율이 제자리걸음인 것은 이상할 게 전혀 없다. 따라서 오늘날 자유주의 야당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지키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오늘날의 교훈

6월 항쟁에서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을 정리해 보자. 먼저, 당시 학생운동이 대중적 항쟁을 촉발했듯이, 지금의 대학생들도 운동의 확대에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특히, 학생 좌파 조직들은 동맹휴업 등의 행동을 제기하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참가가 6월 항쟁에서 군부의 양보를 이끌어내고, 이후 7~9월 대중파업으로 군부의 반동 시도에 쐐기를 박았던 힘이었다. 민주노총이 파업으로 이 운동에 참가한다면 운동은 한 단계 질적 도약을 할 것이다.

오늘날의 광우병국민대책회의와 마찬가지로 6월 항쟁 당시 국민운동본부 역시 수많은 시민·사회단체가 결집한 연대체였다. 그러나 정치적 대안은 실질적으로 자유주의 야당에 의존했고, 7월에 폭발한 노동자 대투쟁을 지지하기보다는 대선에서 야당 지지에 매달렸다.

반대로 광우병국민대책회의는 현재 운동의 확대를 위해 대운하·민영화·교육 시장화·물가 폭등 문제 등으로 요구를 확대하며 조직 노동자들의 동참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런 과제를 실현하는 데 대책회의에 소속된 조직 좌파들도 기여할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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