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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촛불시위의 잠재력과 과제

이명박의 정치 위기가 거의 말기적인 증상을 보이며 “임기 초 레임덕”이라는 말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그는 이미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은 셈이다. 취임 1백 일도 안 된 새 대통령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퇴진”을 요구하고 있고, 집권당 정치인들조차 “국가적 위기”에 대해 공공연히 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맞불〉은 이미 지난해 대선 결과 논평 기사에서 선거상의 변화가 반드시 사회 세력 관계의 진정한 변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하면서, 오히려 이명박은 오래지 않아 심각한 위기에 휘말려들 것이라고 전망했다.(최일붕, ‘이명박 당선의 모순과 정권의 불확실한 앞날’, 〈맞불〉 70호, 2007. 12. 24.)

우리가 그렇게 전망한 근거는 세계 경제가 “747” 이명박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고, 만일 그 때 부패 문제 따위가 불거지면 경제난과 맞물려 폭발적 저항이 일어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책 연구기관 KDI와 삼성경제연구소 등 재벌 싱크탱크들이 대부분 올해 경제성장률을 4퍼센트대로 낮춰 잡고 있는 가운데 공식적으로 이명박 정부 자신이 경제가 하강 국면에 진입했음을 선언했다.

최근 경상수지는 지난해 12월 이래 5개월 내리 적자를 기록했는데, 그 중 1∼4월의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67억 8천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적자 규모인 37억 4천만 달러의 1.8배에 이르렀다(한국은행이 5월 30일 잠정 발표한 “4월 중 국제수지 동향”). 이는 “IMF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90억 달러 적자 이후 최대 수준이다. 경상수지는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특히 중요한 지표이다. 1960년대 공업화 이래로 한국 경제가 주요 침체를 겪을 때마다 바로 이 지표가 적색 신호를 보냈다.

경상수지 적자를 잡는답시고 이명박 정부는 고환율(원화 약세) 정책을 추구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기름값과 물가가 급등했다. 물가는 4.9퍼센트나 올랐는데, 이는 7년 만에 최고치이다. 이로 말미암아 서민 대중의 생활고가 더 악화했다.

물가 폭등

필자는 지난해 다함께 여름 포럼 ‘맑시즘 2007’의 폐막식 연설에서 역사적으로 금리 상승의 조건보다는 물가 상승의 조건 하에서 대중 투쟁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는 경향이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현재의 활발한 대중 투쟁에는 물가 상승도 무시 못 할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권의 부패한 본질은 “고소영”(측근 정치와 정실 인사)과 “강부자”(편법 부동산 투기 축재자 등용) 들을 새 정부 요직에 임명하던 때 이미 드러났다. 특히 강부자 내각과 청와대 비서실은 이명박 정부가 평범한 대중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고, 이들의 삶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을 것임을 대중에게 통감케 했다.

여기에 더해 대운하 강행은 이명박 정부의 독선과 오만, 비민주성을 밝히 드러냈고, 공기업 민영화 등 일련의 신자유주의 정책 시행 계획이 하룻밤 자고 눈을 뜨면 발표되는 등 실로 정신을 차릴 수 없으리만큼 공세가 잇달았다.

그리하여 경제 침체와 ‘자유’ 시장에 대한 서민 대중의 두려움이 급증했다. 특히 자영업자의 두려움이 클 것이다. 내수 경기 부진으로 장사가 되지 않아 소득이 감소한 데다 향후 경기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5월 발표된 통계청 “가계조사” 자료).

그러나 가장 큰 두려움과 위기감을 느꼈던 것은 청소년이었던 듯하다. 과도한 걱정으로 불안해하는 등의 증세를 보이는 ‘불안장애’를 겪는 청소년이 계속 늘고 있을 만큼 청소년의 스트레스는 심각하다. 2006년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안명옥 의원은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불안장애로 치료를 받은 환자 실적을 제출받아 분석하고는, “극심한 경기침체 등으로 인해 사회적 불안 요소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불안장애로 인한 증상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메디컬투데이 / 뉴시스〉 2006년 10월 24일치).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경제와 경쟁 드라이브 교육이 가하는 이중의 스트레스에 짓눌려 불안에 쩐 청소년들이 인간광우병(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콥병) 공포에 특히 민감했던 듯하다. 이런 두드러지게 절박한 공포심 때문에 정부와 우파 언론·학자 등은 처음에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 참가자들을 “괴담”에 귀가 얇은 십대쯤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석균·박상표·우희종·송기호 등 훌륭한 지식인들이 정부와 우파 언론의 거짓말을 낱낱이 들춰내며 운동의 대의를 옹호한 결과 이내 정부와 우파 언론은 군색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명박 정부는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밀리는 것을 탄압으로 만회하려 했다. 정부의 교육 관료는 학교 관리자들을 사주해, 야비하게도 청소년 참가자들을 협박해 집안에 가둬두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운동은 청년의 참가 증대로 그 구성이 바뀌기 시작했다. 청년은 “사실상 백수 3백5만 명”이라는 현실로 집약되는 대량 실업의 제물이다. 이들의 다수는 아마 2002년 말 효순·미선 사망 사건 항의 촛불시위를 지지하고, 노무현에게 투표했다가 이후 환멸을 느끼고, 지난해 말 대선에는 기권했을 것이다. 어쩌면 소수는 이명박에게 투표했을지도 모른다.

이들 청년층의 운동 참가 잠재력은 사실 2002년 말 촛불 시위와 2004년 노무현 탄핵 반대 시위에서 이미 드러났다. 그러나 이들의 일부가 여전히 지니고 있는 약점을 경찰과 우파 언론이 이용해 운동을 이간시키고 분열시키려 하고 있으므로 이 문제를 이하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겠다.

사회단체의 개입은 시민의 자발성을 훼손하는가?

실업이나 비정규직의 처지, 정치적 경험 부족, 노무현 등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에 대한 환상이 깨지며 느낀 배신과 환멸의 경험, 패배감 등에서 미처 다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단결과 다양성, 자체적인 힘, 공동의 대의를 견지하고 있음 등을 느끼게 되면 이런 단결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져서 독자적인 정치적 주장, 정치 행동, 정치 조직 등에 의구심을 갖게 되기 쉽다.

그런 독자적 정치단체가 마음 속으로는 운동에 진정한 관심도 없으면서 자기네 자신의 잇속을 위해 운동을 낚아채 자기 나름의 아젠다에 꿰어맞추려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만도 하다.

‘주류’와 ‘개혁 사기꾼들’의 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기존 좌파 정당들이 집권 후 스탈린주의적 독재를 했거나(옛 소련과 현 북한 등), 개혁의 이름으로 급진적 변화 염원을 주류 정치권에 매어놓아 변화의 잠재력을 약화시켰기(서구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공산당) 때문에 이런 의심은 어느 정도는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한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지적했듯이 “순수한” 기계적 자발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순전히 자발적인 듯한 운동도 초보적인 리더십과 조직은 있게 마련이다.

온라인 필명 ‘안단테’가 처음 이명박 탄핵 운동을 발의한 것은 리더십이 아니었던가?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 문화제 초창기에 무대(민주노총 방송차)와 확성기, 이명박이 궁금해 한 그 많은 촛불 구입 비용 등은 저절로 마련됐던가?

이명박 정권의 공안 기관들과 〈동아일보〉 따위 우익 언론이 “배후” 어쩌고 하기 시작했을 때는 광우병 쇠고기 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야말로 바로 그 “배후”였다. 특히 나눔문화, 일부 네티즌 그룹들, 다함께, 참여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진보연대, 한국청년단체협의회, 환경정의 등(가나다 순)이 능동적으로 주요 조직자 구실을 자임했다.

어떤 운동이든 중립적인 정치적 공간을 형성하지 않으며, 또 자체 내의 단선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운동의 국면이 바뀔 때마다 참가자들은 투쟁 방법 등을 놓고 선택을,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단결만큼이나 견해 차이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운동이 처음 일어날 때는 단결이 자발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단결은 계속 자발적이지 않다. 단결은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싸워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단결을 의식적으로 쟁취하지 않으면 단결은 결정적 물음에 부딪힌 운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특정한 정치적 입장이 각각의 물음과 대결해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운동의 단결이 보장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운동은 분열로 실패하게 된다.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시작된 대안세계화운동이 2001년 7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카를로 줄리아니를 총격 사망케 한 경찰 폭력에 부딪혔을 때 이탈리아의 재건공산당 리폰다찌오네가 그 즉시 전 당원에게 제노바 총집결을, 또 지지 노조들에게 항의성 하루 총파업을 호소해, 다음날 30만 명이 제노바 도심을 관통하는 항의 행진을 하지 않았다면 대안세계화운동은 금세 사그러들었을 것이다.

또, 두 달 뒤인 9·11 직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발의해 전쟁저지연합을 통한 반전 운동을 구축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SWP가 1년여 뒤 유럽사회포럼이 열린 피렌체에서 리폰다찌오네와 노동조합들과 협력해 1백만 반전 거리 행진 시위를 주도하지 않았다면, 1천5백만 명에서 3천5백만 명 사이 규모로 다양하게 추산되는 이듬해 2·15 국제 공동 반전 행동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반전 운동의 전통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한국에서도 9·11과 2·15 사이에 다함께와 참여연대, 보건의료단체연합 등이 주축이 돼 소규모나마 반전 운동을 구축하지 않았다면, 이라크전 개전 반대 시위와 이후 한국군 파병 반대 운동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2003년 7월 26일 열린 한반도평화포럼에서 박순성 교수는 “처음에 다함께가 반전 운동을 일으킨 것이 기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성장하는 운동이 무릇 그렇듯이 촛불 문화제에도 중요한 선택의 순간, 결정의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일부 온라인 그룹들의 호소로 거리 행진이 소규모로 시작됐을 때(5월 24일) 촛불 문화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광범한 대중 정서가 이미 있었다.

그러나 이 소규모 행진은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처장의 무대 위 호소가 없었다면 순식간에 5천 명으로 불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운동을 실제로 주도하는 사회단체들이 당당히 그 구실을 공개적으로 자임하려 하지 않고 “순수성”과 “자발성” 담론에 위축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사흘째 계속되던 날(5월 26일)은 중대한 고비였다. 만일 경찰 탄압과 경찰과 언론의 순수성·자발성 논리에 계속 움츠러든다면 거리 행진은 지속되지 못할지도 모를 위기였던 것이다. 그리 된다면 운동 자체가 급속히 사그러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처음에 운동을 발의했던 온라인 그룹의 일부가 대책회의를 비난하며 별도의 행진을 고집해, 운동은 분열이라는 가장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만일 바로 이 때(5월 26~28일), 다름 아닌 바로 이 때 일부 정치단체가 과감하게 구호 선창을 하며 행진을 선도해 집회 참가자 거의 전체를 거리 행진에 동참케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한때 2만~3만 명이 명동 주위를 행진하며 광범한 대중의 분노와 자신감이 존재함을 시위하지 않았다면 과연 운동이 이후 10만 명 참가 규모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을까?

마르크스 이후의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게오르크 루카치는 그가 “레닌의 현실정치”라고 부른 전략·전술의 핵심 요소가 적시성(適時性)이라고 지적했다. 뒤늦어서도 너무 일러서도 안 된다.

물론 고시 강행으로 분노가 매우 커졌겠지만, 마녀사냥과 국가 탄압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 없이 단지 분노만으로는 거대한 대중 운동이 일어나기 힘들다. 5월 26일보다 너무 늦지 않은 때, 마녀사냥과 국가 탄압을 감내할 태세가 돼 있는 소수가 과단성 있게, 단호하게, 용감하게 대중의 바램을 흡수하지 않았다면 대중의 에너지는 “피스톤 실린더 안에 들어가지 않은 증기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을 것이다.(트로츠키)

물론 “원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고 증기에게 있듯이 운동의 원동력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중요한 점은 용의주도한 계획·조직·리더십과 대중의 자발성을 서로 대립시키지 말고 조화시키는 것이다.

엥겔스는 군사 전략·전술의 중요한 발전은 모두 전투의 압박 속에서 분투하는 전선의 사병들이 고안해 냈다면서, 훌륭한 장교라면 사병들이 고안한 것을 취하고 전군(全軍)에 보편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교육자는 그 자신이 교육받아야 한다.”(마르크스의 ‘포이어바하에 대한 테제들’가운데 셋째 테제 중에서)

피억압자들의 해방은 분명 그들 자신의 행위이다. 그들 가운데 가장 능동적이고 가장 의식적인 소수는 다수를 대행하지 않으면서 다수를 돕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바람직한 리더십은 일방적이고 하향식이지 않은 쌍방향식, 대화식이다.

바로 지금 리더십이 필요하다

리더십, 즉 지도·지도부·지도력이 불필요할 뿐 아니라 해롭다는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엥겔스 시대의 아나키스트들이 편 주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그동안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됐던 것이다.

게다가 역사는 1960~70년대 미국의 ‘민주사회지지학생들’이나 이탈리아의 ‘계속투쟁’(로타 콘티누아)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자발성주의자들이 흔히 비민주적·권위적 조직 구조로 180도 전환하곤 한다는 점도 보여 주었다.

이번 촛불 시위에서도 자발성주의자들은 그렇게 변모할 조짐을 자주 보여 주었다. 거리 행진 대열이 경찰의 봉쇄에 직면한 데다 대열 규모도 준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 다같이 토론해 보자는 대책회의 활동가나 방송차의 마이크를 뺏는 따위의 행동이 그것이다. 뒤로 돌아서 다시 거리 행진을 하자든지 아니면 경찰에 연행되자든지 무엇이든 자신이 하고 싶은 주장이 있으면 시위대 전체가 모인 그 자리에서 하면 될 것인데 말이다.

자발성주의자들의 정치적 성격이 모호한 것은 더 큰 문제였다. 모든 언론이 그 나름의 목적과 의도에서 자발성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누구든 자발성론자가 될 수 있고, 또 자발성론자 흉내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익이든, “구관이 명관”이라며 김대중이나 노무현에게 향수를 느끼며 민주당이나 문국현을 지지하는 서글픈 중년 남성 댓글 폐인이든, 심지어 경찰에 고용된 “알바”든 누구든 다함께를 질시하는 종파주의자와 함께 한 목소리로 다함께를 음해하고 중상 모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온갖 방향으로부터의 다함께 비방 캠페인을 우리가 현 대중 운동 속에서 하는 능동적 구실에 대한 찬사로 여긴다. 정치에서는 아무의 공공연한 비판과 반대도 받지 않는 3류가 되기보다는 온갖 명예훼손과 인신공격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일류가 되는 게 더 낫다.

또한, 우리는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세계가 진정한 투쟁의 장임을 잘 알고 있기에 온라인상의 낭비적 ‘투쟁’을 벌이기보다는 현실의 정치 투쟁에 몰입했다.

우리가 안타까워했던 것은 주요 대책회의 간부들이 거리 행진을 계획하기 시작할 때 이 가상 세계의 소동과 한줌밖에 안 되는 일부 자발성주의자들의 비민주적 항의에 휘둘려 한동안 갈팡질팡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혼란스런 태도는 5월 31일 조직 좌파가 대부분 참가한 10만 명의 집회로 간단히 반증됐다.

그럼에도 일부 대학교에서는 자발성주의자들과 우파 대학생들이 총투표를 거치지 않은 그 어떤 결정도 무효라는 초(지나친) 민주주의 입장을 표방하면서, 총학생회나 중앙운영위원회의 동맹휴업 호소를 저지하려고 협공하고 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등 이명박의 비민주적·억압적·착취적 정책 패키지를 사회 성원 대다수가 반대하는데 특별히 대학생들만 그렇지 않을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다는 말인가?

이명박으로 표상되는 온갖 친재벌 서민말살 정책 꾸러미를 하나하나 따로따로 물리칠 수는 없다. 역사상 피억압자의 패배는 모두 그 패인이 각개격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신자유주의 운동가들은 운동의 요구를 확대해야 한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라는 단일 쟁점을 넘어 대운하, 경쟁 몰이 교육, 보건의료 민영화, 공공서비스 민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기름값 상승, 물가 상승 등등의 쟁점으로 확대해야 한다.

앞서 필자가 강조했듯이 이 운동이 단지 미국산 쇠고기 문제와만 관계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근저에 경제난·생활난에 대한 불만,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 등이 쇠고기 문제를 계기로 바야흐로 분출하기 일보직전인 것이다.

이것이 현실화할 것인가는 비종파적인 좌파가 얼마나 현장 ─ 산업 현장만이 아닌 캠퍼스 현장, 지역사회 현장, 거리 현장 ─ 에서 정열적으로 주장하고 조직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학생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거리로 나오면 시위에 참가한 개별 시민으로서의 노동자들이 크게 고무돼 직장에 돌아가 동료들에게 행동을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꼭 광우병 위험 쇠고기 관련 요구를 중심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다. 그 요구가 포함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그들 자신의 고유한 요구를 위해 싸우면 된다. 그 요구가 자기 직장에 국한한 요구인지 아니면 산업이나 계급 전체에 해당하는 요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다 같이 싸운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적 의미의 정치 투쟁이다. 1987년 7~9월 산업 노동자 쟁의는 한 뭉치의 연쇄적 경제 파업들로 전개됐다. 하지만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열사가 경찰 탄압으로 숨진 8월 중순 때쯤은 전국의 수천 작업장이 동시에 파업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 권력 문제가 제기될 뻔하던 때였다.

혹심한 탄압으로 심각하게 제기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반신자유주의 투사들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자율적으로 “각자 알아서” 싸우지 말고 다 함께 싸우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경찰력을 전국 각지에 분산시켜 운동이 각개격파를 모면할 수 있다.

그리고 투쟁의 진정한 과녁이 무엇인지도 분명해야 한다. 《CSI 라스베가스》의 한 에피소드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하겠다. “이 연쇄살인마는 잡히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게요.” 이명박도 그가 지도자 노릇을 하는 동안에는 재벌천국·서민지옥 정책 추진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설사 6월 노동자 투쟁이 말 그대로 계급적인 투쟁이 되지 못하더라도 비교적 활발하게 일어난다면 7월 초 세계 지배자들의 우두머리 조지 부시의 방한 반대 운동이 크게 건설될 수 있다. 물론 부시가 북미관계를 일시적으로 개선하는 시늉을 해 운동 내 자주파 지도자들을 헷갈리게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럼에도 남한 피억압민 속에 기반을 두고 있는 좌파민족주의자들이 그의 방한을 그냥 보아넘기기에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비록 이명박을 권좌에 남겨두더라도 이렇게 상반기 투쟁이 활력 있게 전개된다면 그 성과 위에 진정한 진보 정치연합체를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참여연대, 진보연대 등을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포괄적·상시적 공동전선 말이다. 지금 서민 대중 속에서 확산되고 있는 이명박 시장주의 드라이브에 대한 공포와 위기감에 대해 대안과 희망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이 진정한 진보, 즉 착취·억압·천대·부당함과 억울함 등이 완화된, 살 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다.

그런 희망을 대중이 “자발적으로” 가지려면 온갖 언론의 자발성·순수성 주장과 정반대로 오히려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갖고, 그것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응답하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