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과 맞서 싸울 수 없는가

김인식

대통령 선거 투표일을 한 달 남짓 남겨 둔 지금, 각종 여론 조사에서 우파 정치인인 이회창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 이미 한나라당은 집권당처럼 행세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한나라당을 “집권 야당”이라고 꼬집는다. 일부 국가 기구와 대기업들은 권력 추를 따라 신속하게 이동하고 있다. 10월에 검찰은 이회창 아들들의 병역 비리를 무혐의 처리했다. 대기업들도 한나라당에 구애를 보내고 있다. 10월 29일 한나라당은 후원회에서 1백18억 원을 거둬들였다. 이토록 많은 후원금이 걷힌 것은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후원금을” 냈기 때문이다.

이회창은 김대중 정부의 돌이킬 수 없는 정치 위기에 기대어 톡톡히 반사 이익을 챙겼다. 반면, 김대중 정부에 대한 대중의 환멸과 분노가 너무나 커, 노무현의 선거 전망은 몹시 불투명하다. 여기에 노무현 자신의 실책 ― 자유주의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특징인 동요와 두 길 보기 ― 이 더한층의 사태 악화를 불렀다는 점을 덧붙여야겠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초 김대중 정부가 치유 불능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황을 틈타 세력을 확대했다. 지난해 8월과 10월의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와 올해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승리했다. 최근의 여론 조사들을 보면, 이번 대선도 그 연장선에 놓일 것 같다.

 

노-정 후보 단일화 논의 효과

그런데 전통적인 수구적 보수 정당의 재집권 전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정치적 풍향계가 오른쪽으로만 돌아가 한국 ‘사회’가 보수화한다고 걱정한다. “이회창이 되면 …” 공안 정국이 조성돼 “노동 운동이 계속 후퇴”하게 될 것이라는 게다.

‘개혁과 통합을 위한 노동연대’의 박태주 씨가 이런 견해를 대변한다. 박태주 씨는 이로부터 노무현 지지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려 한다. 그러나,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회창 집권이 동반할 일반적 탄압을 우려하는 정서는 비교적 광범하게 퍼져 있다. 지난 11월 노동자 대회에서 많은 노동자들은 이회창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한편, 장차 있을 이회창의 공격에 잔뜩 긴장했다. 이런 정서가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에 대한 지지와 연호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한나라당의 집권이 구체제의 복귀를 뜻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얼마간 진실이다. 이회창은 주5일 근무제 도입과 공무원 노조 설립을 “시기상조”라며 반대한다. 또,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부정하는 국가보안법을 유지하겠다는 자세다. 남북 문제에서도 수구 냉전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한나라당 지도부의 다수파는 군사 독재자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 출신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회창의 집권을 1980년대 군사 독재 시대로의 회귀라고 여길 법도 하다. 박태주 씨 말마따나, “이회창이 되면 김대중 정권 하의 노사, 노정 갈등 수준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것이다.”

이회창의 ‘수구화’ 경향을 막아야 한다는 대중의 정서가 초기에 기댄 것은 노무현이었다. 그래서 노무현이 한순간 ‘반이회창’의 상징 인물로 부각됐다. 정치적 휘발성이 어찌나 강한지 정몽준조차 느닷없이 ‘반이회창’ 대변자 노릇을 하는 인물로 잠시 떠올랐다 이내 가라앉았다.

그러나 노무현은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지금은, ‘반이회창’ 투쟁의 핵심 세력인 노동 계급의 지지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재벌 후보인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에 매달리고 있다. 재벌의 후원을 받는 한나라당을 재벌 2세인 정몽준이 어떻게 일관되게 반대할 수 있겠는가.  

노-정 후보 단일화 논의는 노무현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 개혁을 바랐던 그 지지자들을 심각하게 동요하게 만들고 있다. 이는 가뜩이나 이회창의 집권 전망 밝음과 노무현의 집권 전망 불투명에 어깨가 쳐진 그 지지자들이 노무현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박태주 씨도 노무현이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를 하면 노무현 지지를 거둬들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노-정 후보 단일화는 노무현의 “개혁성”이 허상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회창과 노동자 운동

그러나 이회창의 집권이 “진보 정당의 물적 토대가 붕괴되는 상황”(박태주), 달리 말해 노동 운동의 대규모 패배로 자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회창이 좋아서가 아니라 김대중이 싫어서’라는 정서가 팽배하다. 따라서 이회창이 대중의 생활 조건을 공격한다면 아래로부터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회창이 채택할 게 뻔한 (행여 노무현이 되더라도 마찬가지인) 신자유주의 공격은 이미 김대중 정부가 지난 5년 동안 밀어붙이다 총체적 위기에 빠진 계획이다.

더욱이 김대중 정부의 위기는 두 가지 상반된 그림을 만들어 냈다 ― 사회 상층부의 ‘수구화’ 경향 재촉과 아래로부터의 저항. 전자의 발전을 이회창이 대변하고 있다. 후자의 정치적 표현체는 민주노동당이다. 최근에 이회창이 여론 조사에서 선두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오히려 민주노동당 지지가 확대되고 있다. 이회창의 수구화 경향에 제동을 걸기에는 노무현이 오락가락해서 신뢰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한나라당과 처음 맞닥뜨리는 게 아니다. 노동자들은 이미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정부에 도전해 승리한 경험이 있다. 1996년 연말과 1997년 연초 민주노총 노동자들은 노동법 개악 반대 파업을 벌여 신한국당의 김영삼 정부를 굴복시킨 바 있다. 이 파업의 여파로 신한국당은 집권 연장에 실패했다. 노동자 대중 파업의 유탄을 맞은 장본인이 이회창이었다.

더욱이 신한국당의 집권 연장을 좌절시킨 기층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사라졌다는 증거는 없다. 김대중 정부 초기에 55만 명으로까지 줄어들었던 민주노총 조합원 수는 이제 65만 명에 이르고 있다. 11월 초에는 2만 명 규모의 철도노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했다. 여기에다 7만 명 규모의 전국공무원노조가 민주노총의 참관 조직이 됐다. 파업 작업장 수도 지난 5년 동안 꾸준히 증가했다. 1999년 1백29곳, 2000년 2백50곳, 2001년 2백35곳이 파업을 벌였다. 올해에는 8월 초 현재 2백42곳이 파업을 벌였다.

이탈리아 노동 운동은 우파 정부의 집권이 곧 노동 운동의 침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다. 지난해 5월 우파 재벌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총선에서 승리했다. 베를루스코니의 ‘전진 이탈리아당’은 두 극우 정당(인종차별주의 정당인 북부동맹과 파시스트 정당의 후신인 민족동맹)과 연정을 구성했다. 베를루스코니의 집권은 중도 좌파의 ‘제3의 길’(사회 민주주의의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신자유주의)이 실패했음을 뜻했다.

베를루스코니는 광대한 미디어 제국을 소유하고 있는 억만장자다. 그는 더 많은 사기업화, 규제 폐지, 기업 세금 감면을 밀어붙이려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이미 베를루스코니와 맞서 승리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베를루스코니가 1994년 선거에 승리해 총리가 됐지만, 7개월 만에 사임해야 했다. 거대한 노동자 투쟁의 물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를 물러나게 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전투성은 여전했다. 지난해 선거 전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베를루스코니가 고용 안정과 임금을 공격한다면 “뜨거운 여름”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뜨거운 여름”은 1969년 이탈리아를 뒤흔든 대중파업과 정치적 격변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고는 현실이 됐다. 지난해 7월에 이탈리아 제노바에서는 30만 명이 모여 G8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올해 4월에는 베를루스코니의 노동법 개악(노동시장 유연화)에 항의해 1천만 명이 총파업을 벌였다. 우파 정부는 이런 투쟁들 때문에 집권한 지 1년도 채 안 돼 쩔쩔매고 있다.

요컨대, 노동자 운동이 어떤 상태에서 우파 정부를 맞이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반이회창 정서가 광범한데도 이회창의 집권 전망이 유력하다는 사실은 그만큼 한국 정치의 양극화가 첨예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회창에게 수구 보수 정치인이라고 낙인찍고 이 자의 반노동자적 본질을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유주의 정부에 대한 환멸이 워낙 심해, 일부 노동자들은 이회창이 강력한 해결책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얼마간 해결해 주리라는 심정으로 기다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회창이 아닌 다른 대안을 제공할 때 이런 노동자들을 이회창에게서 떼어 낼 수 있다.  

국제 자본·전쟁·우익에 맞선 전투적 운동이 국제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002년 3월 베를루스코니에 맞선 3백만 이탈리아인들의 시위, 지난 봄 스페인 유럽연합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50만 명의 거리 행진, 11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벌어진 1백만 명 규모의 반전 행진 등.

지난해 12월 아르헨티나 반란 때 한 시위 참가자는 시위대의 물결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벽이 무너지는 것 같다. 신자유주의의 벽이 무너지고 있다.”

이런 생각은 낡은 질서가 점점 흔들리고 있다는 광범한 정서를 보여 준다. 정치 양극화는 그런 결과 가운데 하나다. 낡은 질서를 뭔가 더 나은 것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즉각적 위협 ― 전쟁, 신자유주의, 주류 정치의 우경화 ― 에 맞서 저항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2002년 민주노동당의 선거 도전은 그런 시도 가운데 하나다. 가장 좋기로는, 노동자 대중 투쟁이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이 최대한 효과적이려면 정치적 감수성이 더 민감해져야 한다. 조직, 운동의 단결, 지도력 제공의 문제는 이회창 집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시급한 문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