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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혁 정치 단체와 사회운동

[편집자주] 이명박은 촛불집회의 “배후세력”에 대해 계속 얘기한다. 김대중-노무현-문국현 등 자본가들의 포퓰리스트 정치인을 지지하는 운동 내 일부 세력도 좌파 정치세력의 개입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영국 런던대학교 킹스 칼리지 유럽학 교수이자 세계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2005년 5월 방한했을 때 이 문제를 다룬 강연을 했다.

다시 한 번 남한 사회주의자와 활동가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돼 너무나 기쁩니다. 특히, 방금 자신들의 투쟁을 소개한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들과 같은 자리에서 연설할 수 있게 돼 영광입니다.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들 같은 이들이야말로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사회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끔찍하고 야만적이고 잔인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울산건설플랜트 사용자들에 맞선 투쟁에서 그들이 승리하는 데 우리가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이제 제가 강연할 ‘정당과 사회운동’이라는 주제가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 투쟁 같은 당면 투쟁들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잔인할 뿐 아니라 강력하고 교활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무찌르기 원한다면 우리는 승리에 필요한 전략을 제공해 주는 명확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오후에 제가 발표할 내용은 울산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사용자들뿐 아니라, 자본주의를 제거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략의 핵심입니다. 저는 ‘사회운동과 정당’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사회운동을 좋아하는 듯합니다. 활동가와 NGO 들은 사회운동을 건설하려 합니다. 학자들은 사회운동에 관한 거대 이론을 만들어 냅니다. 심지어 부시 정부조차 소위 ‘시민사회’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정당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듯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습니다. 세계의 주요 정당들은 부패했습니다. 남한이라고 다를까요? 열우당과 한나라당이 부패하고 억압적인 다른 나라 지배자들의 정당들과 다르다면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좌파는 좌파대로 정당을 의심하거나 정당에 적대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련·중국·북한 등 스탈린주의의 경험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 국가들이 모두 일당독재 체제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정당을 만든다면 결국 새로운 스탈린주의 괴물을 창조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때때로 이런 생각은 체계적 이데올로기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영향력이 있는 한 경향인 소위 ‘자율주의’에서 그런 생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율주의 이론가 중 하나인 토니 네그리는 정당이라는 조직 방식은 끝났다고 확신한 나머지 굳이 이것을 명확하게 말할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또 다른 자율주의 이론가인 존 홀러웨이는 《권력을 잡지 않고 세계를 바꾸자》[《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갈무리]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우리가 권력을 잡으려 한다면 결국 스탈린주의를 되풀이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홀러웨이는 정당이란 권력 장악을 추구하는 잘못된 전략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정당은, 심지어 혁명정당조차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입니다. 때로 혁명가들은 정당 자체를 목적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가장 위대한 혁명가들 중 하나인 트로츠키조차 1920년대 초에 한 연설에서 “맞든 틀리든 내 당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트로츠키가 속한 당의 지도자는 나중에 트로츠키를 살해한 스탈린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더 근본적으로는 바꿀 수 있는 것은 ‘자기해방’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란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해방하는 것이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주의는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들과 남한의 다른 모든 노동자들과 세계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자신을 조직해서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20세기의 위대한 혁명적 투쟁에서는 어떤 패턴이 되풀이됐습니다. 노동자 평의회가 등장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보통의 노동자들의 통제를 받는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기구를 건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노동자 평의회들은 파업위원회처럼 단순히 투쟁을 계속하기 위한 기구에서 자본주의 국가에 도전하는 노동자 권력 기구로 발전했습니다.
따라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사회주의란 노동자 평의회가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고 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해서 보통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사회를 운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자기해방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해방 과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혁명정당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날 반자본주의 운동의 경험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처음에 반자본주의 운동은 1999년 11월 시애틀 WTO 각료회담 반대 시위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세계적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세계사회포럼, 2001년 7월 제노바 G8 정상회담 반대 시위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반자본주의 운동이 등장했을 때 유력했던 정서는 도취였습니다. 이런 도취는 이 운동이 노동계급의 오랜 세계적 패배 이후에 등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우 다양한 배경과 관심을 가진 활동가들 사이에 강력한 연대감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정당에 대한 전반적인 의심 또한 존재했습니다. 많은 나이든 활동가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투쟁을 경험한 고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자신이 속한 혁명조직에 실망했고, 따라서 정당에 매우 적대적입니다. 그리고 다른 활동가들은 주로 1980~90년대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NGO를 통해 조직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도취감은 사라졌고, 운동은 어려운 정치적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분열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국가 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였습니다. 2001년 스웨덴 예테보리 시위와 이탈리아 제노바 시위 당시 국가는 엄청난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아딱[서방세계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 단체] 같은 운동 내 온건파들은 이런 폭력 때문에 “우리는 시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운동의 다수는 그런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9·11 이후 무엇을 해야 하나였습니다. 부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했습니다. 그 전까지 반자본주의 운동은 주로 무역과 외채 같은 경제 쟁점을 가지고 운동을 벌여 왔습니다. “이제 반자본주의 운동은 전쟁에도 반대해야 할까? 반자본주의 운동은 동시에 반전운동이 돼야 할까?” 하는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다시 한 번 운동 내 온건파들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딱의 지도자인 베르나르 까쌍은 미국의 B-52 폭격기가 폭격을 하든 말든 세계의 빈곤은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특히 이탈리아와 영국 활동가들은 “아니다. 둘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하고 주장했습니다. 세계적으로 빈곤이 계속되는 것은 미국과 그 밖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군사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거대한 반전 시위, 특히 2003년 2·15 시위는 유럽사회포럼과 세계사회포럼의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시작됐습니다.
지금 유럽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선택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것은 논의중인 유럽헌법에 반대할 것인가 말 것인가입니다.
반자본주의 운동 내 대다수는 유럽헌법에 반대합니다. 유럽헌법은 유럽연합을 군사강국으로 만들고 유럽의 복지국가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격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자율주의 이론가인 토니 네그리는 초국적으로 통일된 유럽 자본주의가 미국을 견제하는 진보적 구실을 할 것이라며 유럽헌법을 지지했습니다.
이런 선택들을 통해 제가 증명하려 했던 것은 반자본주의 운동, 특히 유럽 반자본주의 운동 내에서 지난 몇 년 동안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차이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반자본주의 운동에는 서로 다른 강령과 전략을 대변하는 일련의 경향들이 생겨났습니다.
먼저 프랑스 아딱과 까쌍이 대표하는 개량주의적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난 2∼30년 동안 강력해진 자유시장 형태의 특정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2차세계대전 종결 이후 서방 자본주의 진영에 존재했던 좀더 규제된 형태의 자본주의로 되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더는 국민국가가 아니라 개혁된 유럽연합과 UN 같은 기구를 통해 지속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두 번째 경향은 네그리와 홀러웨이가 대표하는 자율주의 경향입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말하지만,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해 집중된 정치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영국의 한 자율주의자는 자율주의측의 대안을 ‘자본주의에도 불구하고 영위하는 삶’(life despite capitalism)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이후의(life after capitalism)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사회주의를 어떻게 성취하고, 그 모습이 어떨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적이고 민주적으로 살 공간을 자본주의 체제 안 어딘가에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그리와 홀러웨이는 자본주의로부터 탈주하기, 즉 벗어나기를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본주의를 파괴하지 않고 탈출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세 번째 경향은 급진 좌파입니다. 유럽의 몇몇 좌파 정당들이 여기 속합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프랑스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그리고 이들보다 훨씬 큰 정당인 이탈리아의 재건공산당이 그 예입니다.
그리고 이들 정당들은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혁명적 변혁을 주장합니다.
저는 이 모든 다양한 경향들이 사실 넓은 의미에서 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 모두 반자본주의 운동을 이끌기 위한 강령과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율주의자들은 자신이 운동 내 정당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지만, 이것은 정치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위선입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면, 저는 정당이 없는 운동을 꿈꾸는 사람들은 정치가 없는 운동을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과연 정치란 무엇일까요? 레닌은 경제의 집중된 표현이 정치라고 했습니다. 이 주장은 두 가지 중요한 점을 함축합니다.
먼저 모든 정치는 경제의 집중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치를 이해하고 싶다면 정치의 깊숙한 곳에서 작용하고 있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존재하는 모순, 투쟁과 착취를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정치는 경제의 집중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치에서 일어나는 일은 경제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치 영역은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논리는 국가권력을 둘러싼 투쟁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추어, ‘권력을 잡지 않고 세상을 바꾸자’라는 홀러웨이의 구호를 평가해 봅시다. 이 구호가 실제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삶을 더 낫게 하기 위해 투쟁하면서 단지 국가에 등을 돌리고 못 본 체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국가를 잊었다고 해서 국가가 우리를 잊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위험해질 때, 우리가 투쟁할 때 국가는 우리를 공격합니다.
울산건설플랜트 파업 노동자들은 국가를 잊을 수 있는 사치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국가는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따라서 세계를 바꾸고 싶지만 국가 권력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세계를 바꾸는 일에 별로 진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기존 국가를 장악하겠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기존 국가들은 본래 노동자 착취의 유지에 필요한 위계적·억압적 기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리의 목적이 평의회 민주주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사회를 운영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자기해방은 기존 국가를 파괴하고 노동계급 권력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대중 운동을 건설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투쟁들을 단결시키고 운동이 정치권력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 수 있는 집중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분열시키고 파편화합니다. 대중 투쟁이 국가권력 문제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조직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정당이 스스로 권력을 잡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당이 대표하는 정치적 중심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말했습니다.
제가 혁명정당이 자기해방의 도구라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혁명정당은 대중 투쟁을 대신할 수 없지만 대중운동이 더 효과적이고 집중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현재의 반자본주의·반전 운동 같은 중요한 대중 운동은 다양한 이데올로기·전략들 간의 충돌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운동과 당을 대립시킬 것이 아니라, 그 둘이 함께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를 변혁하고 대체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종류의 당, 즉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대중적 저항이 존재하는 현재 상황에서 혁명정당은 그런 운동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건설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몸담고 있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9·11 이후 영국에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반전운동 중 하나인 전쟁저지연합을 건설했습니다. 조지 부시의 절친한 친구 토니 블레어의 코밑에서 반전운동을 건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반전운동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반전운동은 아닙니다. 2003년에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영국보다 훨씬 커다란 반전 시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일관된 반전운동을 건설했습니다. 우리는 바그다드 함락 뒤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우리는 2004년과 2005년에 전쟁 발발 1년과 2년을 맞아 전 세계에서 벌어진 반전 시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또, 우리는 최근 전쟁 반대 군인 가족 운동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전쟁 반대 군인 가족’ 때문에 블레어는 몇 주 전 영국 총선 전날 밤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은 한 아버지가 블레어의 선거구에서 블레어에 반대하는 매우 호소력 있는 연설을 했던 것입니다.
현재 반전운동의 동력이 된 영국 전쟁저지연합에서 SWP는 주도적 구실을 했습니다. 전쟁저지연합과 SWP의 적들도 우리를 비난할 때 이 점을 인정합니다.
저는 우리가 반전운동을 건설하는 데서뿐 아니라, 반전운동이 부시의 전쟁 몰이에 맞서는 일관된 투쟁이 되도록 하는 데서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혁명정당이 반드시 대중운동과 사회운동에 방해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운동이 더 강력하고 성공적이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대중 운동에 참가하는 것은 또한 혁명정당에게도 이롭습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저는 최근 경험을 얘기하려 합니다. 최근 영국 총선에서 조지 갤러웨이가 다시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이라크 전쟁에 주도적으로 반대했고, 그 때문에 노동당에서 축출됐지만 다시 당선됐습니다.
지난주 갤러웨이는 그가 사담 후세인에게서 돈을 받았다고 비난한 미국 상원에 가서 이를 반박했을 뿐 아니라 이라크 전쟁과 점령의 참혹함과 위선을 비판했습니다.
이번에 갤러웨이는 SWP를 포함해 반전운동에 참가한 사람들 중 가장 선진적인 이들이 결성한 새로운 급진좌파 연합 ‘리스펙트’ 후보로 당선됐습니다.
현재 리스펙트는 연합입니다. 리스펙트는 혁명 조직이 아닙니다. 리스펙트는 개량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의 연합입니다. SWP 당원들 같은 혁명가들이 리스펙트 연합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와는 거리가 먼 갤러웨이 같은 사람들과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당 건설 문제는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노동당은 오랫동안 쇠퇴해 왔고, 블레어는 이라크 전쟁과 영국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을 통해 이것을 촉진시켰습니다.
지난 두 번의 총선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동당을 버렸습니다. 리스펙트 같은 급진좌파적 대안을 건설함으로써 우리는 그런 노동자들을 좀더 급진적인 정치로 견인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리스펙트 건설은 혁명정당 건설과 동떨어진 일이 아닙니다. 리스펙트는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대중적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중요한 한 걸음을 뜻합니다.
저는 영국 사례를 통해서 혁명가들이 상당히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대중 운동에 참가하고 그러한 대중 운동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결론을 내리면, 세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새로운 운동은 좌파의 부활을 뜻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에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새로운 세대가 탄생했음을 뜻합니다.
물론 아직 예외도 있지만 스탈린주의의 소멸과 이런 새 세대의 성장은 좌파에게 역사적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새로운 좌파를 건설하는 이 기회에 동참해서 오늘 오후 울산 노동자들이 말한 일들이 단지 과거의 불쾌한 기억에 불과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중석 발언과 질문 생략]

우리는 끔찍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시가 말한 것과 달리 테러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시 같은 자들이 세계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들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을 보십시오. 이라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아부 그라이브와 아크라에서는 고문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과정도 봅시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폭발적 성장은 공황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더 장기적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기후변화일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기후변화가 점점 더 악화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자본주의가 기후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봤을 때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끔찍한 세계 빈곤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해마다 8천만 명의 사람들이 빈곤이나 빈곤과 관련된 원인 때문에 죽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끔찍한 체제인지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명확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상황이 더 심각해지는 것을 그냥 가만히 지켜봐야 할까요? 아니면 자본주의적 세계화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의 일부가 돼야 할까요?
그러나 제가 오늘 얘기한 것은 단지 대중 운동 건설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런 운동들에게 현재 자본주의 체제를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초점과 일관성을 제공할 수 있는 정치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함께’와 함께합시다. 그리고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갑시다.

녹취 박준규, 번역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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