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가 이명박 정부를 더 쩔쩔매게 하려면 공공 업무와 기업 영업에 차질을 빚게 하는 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우리에게 그럴 힘이 있을까?

역사는 “그럴 힘이 있다”고 답한다. 정치투쟁은 경제투쟁을 한껏 고무해 노동자들을 강렬한 자석처럼 투쟁에 빨려 들게 하곤 했다. 그 경제투쟁이 이번에는 더 큰 정치투쟁의 비옥한 토양이 된다.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대중파업은 일찍이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에서 말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 상승효과를 분명하게 입증했다. 6월 항쟁 당시 거리 시위에서 자신감을 얻은 한국 노동자들은 군사 독재 정부가 물러서는 모습을 봤다. 노동자들은 당연하게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작업장 독재는 왜 그대로지?’

6·29 선언 일주일 뒤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자 1백여 명이 기습적으로 노조를 결성했다. 그리고 7월 중순의 울산 노동자 투쟁은 중공업 중심지 창원·마산으로, 8월 중순에는 경공업 지대인 경인 지역과 전라도로 번졌다. 지역과 산업, 사업체 규모를 넘어선 거대한 반란이었다.

언뜻 보기에 ‘보수적’이고 ‘실리’밖에 모르는 듯하던 평범한 노동자들의 파업 열풍은 대학 총장직선제·판금 도서 해금·언론악법 폐지 등 정치민주화의 요구를 순식간에 쟁취했다. 무엇보다 이런 투쟁 덕분에 한국사회는 1960년 4월 혁명과 1980년 광주항쟁이 겪은 반동을 피할 수 있었다.

정확히 40년 전 세계를 뒤흔든 1968년 반란 때에도 그랬다. 프랑스에서 드골의 권위적 통치와 폭력 경찰에 반대해 새벽까지 파리 도심을 돌며 연일 행진을 한 학생들의 투쟁은 르노 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이어졌고 순식간에 항공산업, 철도, 버스, 우편, 금속, 조선소, 보험사, 대형상가, 은행, 인쇄업 등으로 번져 유럽 역사상 최대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경제투쟁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하고 정치투쟁은 국회의원들과 정당 정치인들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고정관념이다. 일상적인 시기를 벗어나 대중행동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는 전기충격이 오듯 오랫동안 참고 눌러 온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깨어난다.

한 걸음

룩셈부르크가 관찰했듯이 대중파업은 무엇보다도 노동자 그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 이전의 운동가들이 수년 동안 이룩할 수 없었던 속도와 범위로 그렇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노동자들은 놀랄 만큼 신속하게 새로운 조직들을 만들어 내고 미조직된 노동자들을 조직화한다. 1987년 7~9월 대중파업 때 순식간에 3천여 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만들어졌고 1936년 프랑스 대중파업 당시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이 1백만 명에서 순식간에 5백만 명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하루 총파업이 며칠이라도 확대될라치면 노동자들은 다양한 사회 활동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곤 한다. 예컨대, 1919년 미국 시애틀에서는 파업위원회의 허락이 있어야만 트럭들이 식료품을 운송할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은 수많은 대중파업의 역사에서 벌어졌다. 1917년 러시아의 혁명적 대중파업, 1956년 헝가리, 1936년과 1968년 프랑스, 1978년 이란, 1980년 폴란드에서….

노동자들은 지금이 이명박 정부의 반노동자 정책을 무력화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느끼고 있다. 대중파업 역사를 보면 친기업 정부가 세운 반노동자적 조치들은 파업 동안 무력화되곤 했다. 40년 전 프랑스 대중파업 당시 프랑스노동조합민주연합(CFDT)의 한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파업 전 5일 동안 경고기간을 갖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이 기간을 무시하고 파업에 들어간 교사들이 해직되지 않았다. 우편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잘 싸우면 … 위험 부담도 매우 작다는 것이다. 해묵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 걸음만 내딛으면 됐다.”

이명박의 불도저 정책에 두려움을 느꼈던 노동자들은 그 불도저가 작동 정지될 수도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끼며 용기를 얻고 있다.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대중파업의 물결이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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