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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연대 파업 현장을 가다 1:
의왕 내륙컨테이너 기지와 평택항에서 만난 파업 노동자들

6월 10일 촛불시위대를 막았던 컨테이너. 이제는 화물 파업 노동자들이 주요 수출항을 컨테이너로 막고 있다. 비조합원들까지 대거 동참하는 파업으로 수출은 발이 묶이기 시작했고 완제품 반출뿐 아니라 원재료 반입이 전혀 되지 않아 주요 공장 가동도 중단되기 시작했다. 카캐리어 분회 파업으로 오늘부터 광주 기아차 공장 스포티지 생산도 중단됐다.

정부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에 “운송료 인상 협상에 적극 나서라”며 등을 떠밀고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이번 파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비조합원들이 대거 동참하고 있다는 점.

〈맞불〉 화물연대 특별취재반은 6월 13일부터 의왕내륙컨테이너 기지·평택항·인천항·부산항 등지의 파업 농성장을 취재하고 파업 노동자들을 인터뷰했다. 일요일 인천 화물노동자들은 시내 행진까지 해서 엄청난 지지와 환호를 받았다.

수도권 물류 정거장을 마비시키고 있는 의왕 화물노동자들

토요일 오전 11시 30분. 의왕의 내륙컨테이너 기지에 도착했을 때 약 1백여 명의 노동자들은 간단한 집회를 하고 있었다. 의왕 내륙컨테이너 기지는 수도권의 물류가 오가는 정류장. 이곳을 오가는 운송차들이 멈추면 수도권 공장들은 마비된다.

하루에 약 5백 대가 훨씬 넘는 운송차량이 이곳을 오간다. 그러나 토요일 현재 하루 이동 차량은 20대 정도.

이틀째 노숙 천막 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화물연대 〈맞불〉 호외를 건네자 다들 반갑게 맞이한다.

뙤약볕 때문에 더 그을렸을 법한 노동자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 흐른다. 다들 입을 모아 말한다. “비조합원들이 대거 동참하고 있어 파업의 효과가 어느 때보다 훨씬 큽니다.” “비조합원들이 알아서 파업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있어요.” “정말 놀랍습니다.”

유가 인상과 1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운송료 얘기가 나올라치면 너나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분노의 목소리들이 튀어 나온다.

“돈은 매달 들어오지요. 그러나 아침에 들어온 운송비, 저녁 때에는 기름값으로 다 나가요. 가계부는 적자고 집에 돈을 못 갖다 준지 오랩니다.”

“이명박, 경제를 살린다 했으니 유가 인상으로 허리 휘는 우리들 먹고 살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세 달 동안 내리 적자였어요. 몇 년 동안 차 할부 갚느라고 허리가 휘었고, 다 갚을 만하니까 기름값 내다가 적자 보니 어떻게 살 수가 있습니까?”

폭리를 취하는 정유사에 대한 분노는 노동자들 가슴 속에서 사무치는 응어리가 돼 꿈틀거리고 있었다.

“정유사들은 유가 폭등으로 돈을 긁어모으는데 왜 우리 같은 서민들만 허리가 휘어야 합니까?”

“왜 정유사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이익을 냈는지 공개를 하지 않는 거유?”

“심지어는 주유소 사장한테 이런 문자가 와요. ‘미안합니다. 이번 주에 리터당 또 50원 오릅니다.’ 이런 문자를 받을 때마다 환장하는 거죠.”

그래서 한 노동자가 이렇게 말하자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적자나는 차를 안 모니까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요!”

집에서 파업을 적극 지지해 준다는 한 노동자는 2003년 파업과 지금의 파업을 이렇게 비교했다. 2003년 파업으로 4박5일 경찰서에 연행된 적이 있다는 그는 “2003년 이후로는 파업한다면 집사람이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들들 볶았는데 지금은 파업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 줍니다. 집안 전체가 그래요!”

노동자들은 촛불집회가 준 감흥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6월 10일 촛불집회에도 참여했다는 한 노동자는 흥분된 어조로 “감동 그 자체였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구수한 말투의 한마디. “많이 가야 하는데 우리 상황 다 아시니께 이해들 허시겄쥬. 가지는 못해도 마음은 하나입니다.”

“평택항 사수”

한 시간 뒤, 평택항 입구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화물연대 서울경기지부 평택항분회 노동자들을 만났다. 지난 월요일부터 농성하고 있던 노동자들이었다.

높게 쌓여 가는 컨테이너. “컨테이너가 무게 때문에 5층 이상 올라갈 수가 없어요. 지금 4층까지 올라가고 있습니다.” 항에 진입하는 컨테이너 차량이 없어 항구 근처는 한적하기까지 하다.

검은 햇볕 가림 망 아래에서 노동자들은 신문도 보고, 수박도 나눠 먹고 북도 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항구 바로 앞 곳곳에 걸려 있는 삼각 깃발들에는 “평택항 사수”, “움직이면 죽여”, “노동자는 하나다”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화물연대 〈맞불〉 호외를 가져다 한 분 한 분께 나눠 드리자 여기저기서 손들이 뻗쳐 온다. “여기도 주쇼!” “어이 많이들 놓고 가세!” 너무도 진지하고 꼼꼼하게 읽는 노동자들. 특히 유럽 화물노동자 투쟁 기사를 가리키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약 1백여 명의 전경들이 배치돼 있었으나 노동자들의 눈치만 슬금슬금 보는 듯했다.

우리가 팻말과 호외 등을 챙겨가는 도중에 한 파업 노동자의 부인을 만났다. “농성장 가시지요? 같이 가요. 저도 같이 뿌릴게요” 하면서 먼저 다가온 그녀는 남편과 파업 노동자들을 위해 과일을 바리바리 싸 오셨다. 그 분은 “못 받은 분들이 계실 수 있으니 저한테도 한 묶음 주세요” 라며 더 적극적으로 호외를 배포했다.

비조합원들도 파업 농성에 함께하고 있었다. 비조합원들의 참여와 지지 방문이 계속되고 있기는 평택항도 마찬가지였다.

1년 반 전만 해도 정유업계 운송차량을 운전했다는 한 노동자는 “나는 비조합원이지만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파업에 함께할 겁니다. 요구를 따낼 때까지 끝까지 해야 돼요” 하고 말한다.

의왕·평택 취재를 함께한 김형환 회원은 한 노동자한테서 매우 놀라운 얘기도 들었다. 그 노동자는 1981년에 이라크 바스라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할 때 당했던 고통과 충격을 떠올리며 이명박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1981년 당시 이라크와 이란은 전쟁을 하는 중이었는데 같이 일하던 서독과 프랑스 노동자들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자신을 포함한 한국 노동자들은 공습이 있을 때는 대피소에 숨어 있다가 공습이 끝나면 다시 나와서 일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더 이상 무서워서 일을 못하겠으니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구하자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명박은 비자를 주지 않겠다며 출국을 막았다고 한다. 그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중동에서 정말 노예처럼 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사실 노예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이명박은 정말 안 되는 사람입니다.”

기아차 수출을 막기 시작한 카캐리어 노동자들

평택항에는 자동차 수출 전용 부두도 있다. 이 부두 앞에서도 카캐리어 분회 노동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었다. 부두 근처에는 기아 완성차를 실어 나르는 운송트레일러 1백20대 정도가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화물연대 스티커가 안 붙어 있는 차들이 많지요. 비조합원들도 많이 참여했다는 겁니다.” 화물연대 서울경기지부 경기서남부지회 시기영 카캐리어 분회장의 말이다.

“6년 동안 조합원으로 조직하고 또 설득하려고 노력했는데 하루아침에 노동자들이 이렇게 조직될 줄 몰랐어요. 광주에서는 30명이었던 카캐리어 조합원들이 8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어제 80명이 출정식을 했습니다. 정말 평생 기억될 만한 날이었지요.”

시기영 분회장은 조합원으로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힘이 이번 파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계속 힘주어 말한다.

“자신들이 알아서 차를 이 부두 앞에 일렬로 세우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놀랐습니다.”

“40일 넘게 해고자 복직 투쟁을 해서 겨우 승리하긴 했는데 한동안 너무 진이 빠져 있었어요. 본부에서 파업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냥 또 해야 되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년 동안 노력했지만 잘 안 됐던 일들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니까 멍할 정도로 정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완성차를 못 만들 정도가 되고 있어요.” “하루에 3천 대가 평택에 옵니다. 그러나 우리 파업 때문에 차가 출하되지 못하고 있어요.”

카캐리어가 멈출 경우 대체할 만한 차량이 거의 없기 때문에 파업 효과는 더 크다고 말하는 시기영 분회장.

그는 2003년 파업 뒤 회사는 보복 차원에서 일을 아예 주지 않는 바람에 힘든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고 한다. 해고되고 1년 만에 복귀한 그는 당시 도움을 많이 줬던 기아차 화성공장 노동자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껴 왔다는 말도 전한다.

시기영 분회장의 하루 일과는 이렇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공장에서 생산된 차를 싣고 나온다. 평택항까지 차를 나르고 나면 아침 8시. 8시 하차 뒤 화성, 소하리, 내수 출하장으로 가서 다시 차를 싣고 온다. 광주에서 오는 물량을 위해 광주를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밤늦게 귀가하는 그는 하루 온종일 차를 몬다.

군대 간 아들과 고3 딸이 있다는 그는 딸에게 “너 학교 빠지고 촛불집회 가도 아빠는 하나도 걱정 안 한다. 한번 가보렴” 하고 권하기도 했다며 “촛불집회에 참여한 분들과 한마음”이라고 전해 달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