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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언어 (I)

이기웅 교수는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러시아어 언어철학을 전공했다. 필자는 ‘다함께’가 주최하는 ‘맑시즘2008’에서 ‘맑스주의와 언어’라는 주제로 연설한다. (8월 17일(일) 오전 10시) 이 글은 이기웅 교수가 기고한 글의 첫 번째 부분으로 다음 호에 후속편이 실릴 것이다.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혁명의 성공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혁신하려는 거대한 실천적인 시도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연히 이와 더불어 현실의 많은 것들을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새롭게 구성해 내려는 지적인 노력들의 유례없는 활성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인 노력들의 발전적인 행로는 결코 순탄할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전범으로 참조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서, 이러한 노력들은 그 출발부터가 다분히 암중모색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가령 언어학이나 문학, 미술 등과 같은 여러 분야에서 상이한 입장들과 경향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게 됐다. 이 때문에 1920년대 러시아는 새로운 시도들로 넘쳐나는 역사상 가장 활발한 문화적 분위기였지만, 또한 이들 사이의 경쟁적인 갈등과 상충도 함께 있는 다소 혼재된 시기이기도 했다.

둘째, 이러한 와중에, 스탈린주의의 득세로 요약될 수 있는 사회·정치적 상황의 악화로 인해서 그러한 지적인 노력들과 열망들은 일시에 억압적인 궁지로 내몰리게 된다. 1924년 레닌의 사망 이후 “일국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그러나 그것의 실제적인 내용은 민족주의와 강압적인 국가자본주의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차례차례 정적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1928년 무렵 권력을 독점하게 된 스탈린은 그 다음 해에 실로 괴물과 같은 방식으로 예술과 학문의 전 분야를 “단일지도”의 원칙에 따라 재조직화를 착수한다.

이것은 각 분야마다 권력 당국이 지정한 책임자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인데, 이에 따라 당연히 예술가들이나 연구자들의 자율성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앞을 기다리고 있는 이처럼 험난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시도된 마르크스주의적인 시각에 입각한 다양한 지적인 노력들이 오늘날까지도 내용적으로 많은 점에 있어서 그 유효성을 잃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규정하는 다음과 같은 방법적 토대 때문일 것이다.

즉, 인간 현실 속에 주어진 어떤 현상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규명한다는 것은 그것을 역사유물론에 기초해서 변증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여기서 변증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주어진 현상의 고찰에 있어서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서 종합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설명적 노력은 당연히 올바른 실천적인 방향성의 정립과도 맞물려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활동이란 궁극으로 인간이 자신의 실천을 통해서, 물질적 속박과 이로 인한 사회적 착취와 억압을 해결하기 위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만큼 역사 또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총체화 과정 속에서 자리매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총체적

이상의 것을 전제로 놓고 볼 때, 인간의 가장 일반적인 기호적 활동인 언어를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규명하려는 대표적인 시도들 중의 하나가 볼로쉬노프(В. Н. Волошинов, V. N. Voloshinov; 1895~1936)의 《맑스주의와 언어철학》(1929)이다.[이 책은 푸른사상 출판사에서 《언어와 이데올로기》란 제목으로 번역해 출판했다: 편집자]

먼저 이 책의 전체적인 집필 의도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에서 언어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사회적 현실 속에서 언어와 이데올로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데올로기란 원래 마르크스가 생각한 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 즉 과학적 의식과 대립하는 허위적인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맺는 제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가치평가’라는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

총체적으로 볼 때, 사회의 상부구조로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궁극으로 결정하는 물질적 토대인 하부구조와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것을 잘 반영하는 것이 그리고 또한 자기 내부의 법칙에 따라 굴절시켜서 현실로 되돌려 보내기도 하는 것이 바로 가장 일반적인 사회적 기호체인 언어이다.

그런데 여기서 볼로쉬노프가 강조하는 것은 언어의 이러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 어휘체계나 문법체계의 층위가 아니라 개인들의 사회적 소통행위를 구성하는 발화(發話)[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현실적인 언어 행위: 편집자]의 층위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어의 본질적 기능이 소통에 있는 이상, 언어 연구의 초점 또한 당연히 발화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소통의 상황과 문맥,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사회적 구조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발화행위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기에, 확실히 발화는 본질적으로 언어 기호의 변증법적 총체성을 잘 구현하고 있는 언어적 사실이다.

이 점은, 가령 아주 간단한 예로서, “경찰이다!”라는 표현이 누구에 의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화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실제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사리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발화의 층위에 자신의 이론적 출발점을 위치시키면서, 볼로쉬노프는 기존의 언어 연구들을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분류하고, 양자 모두를 비판한다.

하나는 언어가 민족정신이나 민족의 세계관, 민족심리, 혹은 민족의 미의식 등을 고유하게 반영하는 활동이라는 관점에 입각해서, 이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구현해내는 활동으로서 개인의 언어적 창조성을 강조하는 경향인데 (헤르더 Herder, 훔볼트 Humboldt, 쉬타인탈 Steintahl, 분트 Wundt, 포슬러 Vossler 등), 볼로쉬노프는 이러한 경향을 과학성이 결여된 ‘개인적 주관주의’라고 비판한다.

다른 하나는 소쉬르(Saussure)의 생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과학적 경향이다. 이에 따르면, 언어의 본질은 개인의 말이나 발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동시대에 개개인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잠재적인 사회적 기호체계에 있으므로, 그러한 체계를 구성하는 구조적 사실들을 일정한 원칙에 따라서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입장을 볼로쉬노프는 ‘추상적 객관주의’라고 비판하는데, 왜냐하면 그 같은 기술은 언어기호가 발화를 통해서 표현하는 구체적인 내용이나 실제적인 뜻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화법

사실, 이러한 비판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언어와 연관된 다양한 현상들을 소쉬르나 볼로쉬노프 모두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론화시키는 데 있어서 두 사람의 주안점이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이다.

앞에서 우리가 든 예를 갖고 생각해보면, 소쉬르는 어느 누가 “경찰이다!”라는 표현을 발화하든지간에 모두 동일한 기호에, 따라서 동일한 ‘의미’(значение; meaning 혹은 signification)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볼로쉬노프는 그러한 동일성 위에 얹혀지는 상이한 발화자들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억양들, 목소리들, 실제적인 ‘뜻’(тема; theme)들의 현실적 중요성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물론 볼로쉬노프가 소쉬르의 문제의식을 모른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언어기호에서 ‘의미’와 ‘뜻’의 역동적 상호관계를 객관적으로 해명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임을 역설한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주된 근거는 개인의 발화가 아무리 가변적이고 주관적인 것처럼 보여도 본질적으로 타인을 지향하는 대화적 성격을 가졌으며, 발화의 이러한 대화적 구조를 규정하는 궁극적 요인이 바로 사회-이데올로기적인 사실들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이론적 입장을 경험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볼로쉬노프는 책의 마지막 부분을 ‘화법’이라는 하나의 구체적인 언어 현상의 분석적 고찰에 할애한다. 이를 통해서 그는 타자의 말의 재현 형식으로서 화법조차도 그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재현하는 발화자의 사회-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된 가치평가적 태도가 덧씌워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확히 보여 준다.

요컨대,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단지 언어 내부로만 분석의 시각을 국한시키는 연구는 불충분할 수밖에 없으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언어가 ‘인간의 현실적 의식’인 이상 그것을 구성하는 계기들을 종합화하는 방식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볼로쉬노프의 이러한 이론적 노력은 1960년대까지 국제 학계에서는 물론 소련 내에서도 잊혀져 버린다.

1920년대부터 언어 연구의 국제적인 흐름은 소쉬르의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구조주의가 주도적이었으며, 소련의 경우는 스탈린주의의 후견 아래 기계적 유물론을 강조하는 마르(Marr)의 교조적인 이론이 1929년부터 무시무시한 ‘감독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가령, 이에 맞서 학문적 논쟁을 벌인 활동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천재적인 언어학자였던 폴리바노프(Polivanov)는 박해를 받다 1938년에 총살당했던 것이다.

볼로쉬노프의 경우는 스스로 학문적 노력을 접은 채 침묵하다 요절했으며, 이러한 그의 저서가 마침내 재발견된 것은 소쉬르 식의 구조주의의 한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의 서구학계에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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