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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경쟁 그리고 자본주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개막했다. 중국 정부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구호와 민족주의를 통해 스포츠의 상업주의와 중국 내 모순을 감추려 한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들이 막대한 이윤을 올리는 한편,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는 점령자인 한족 경찰들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는 등 올림픽 이면의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크리스 뱀버리(영국의 혁명적 반자본주의 신문 〈소셜리스트워커〉 편집자)는 베이징 올림픽을 화두로 스포츠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는 구실을 설명한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이 개막했다. 언론들은 올림픽 경기를 보고 즐기라고 부추기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스포츠는 일상생활의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이다.

스포츠는 점점 원자화하는 세계에서 사람들이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 ─ 팀일 수도 있고 개인일 수도 있다 ─ 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실 올림픽은 기업들이 주도하는 행사다. 베이징 올림픽의 경우 기업 후원 금액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두 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세 배다.

베이징 시당국은 후원 협정을 맺지 않은 기업들의 광고 활동을 철저히 통제했다. 덕분에 광고판과 야외 광고비용이 27억 달러나 됐다.

맥도날드는 올림픽 공식 레스토랑이고 코카콜라는 공식 음료다.

한편 농민공[농민 출신 이주노동자] 1백만 명은 베이징에서 떠나야 했다. 사실 이것은 올림픽에서 늘 있던 일이다. 러시아는 1980년 올림픽 개최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반체제 인사들을 추방했다. 4년 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는 노숙자들이 거리에서 쫓겨났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로마[집시]들이 올림픽 경기장 근처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얼마 전 런던과 다른 도시들에서 올림픽 성화 봉송에 맞춰 중국 정부의 티베트 탄압에 항의하는 행동이 있었을 때 “스포츠에서 정치색을 배제하라”는 주문이 있었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는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정치색”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올림픽을 독일 제3제국을 홍보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1968년 멕시코 지배자들은 올림픽 개막식을 앞두고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만이 아니라 모든 스포츠가 정치와 연관돼 있다. 스포츠는 오래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스포츠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인류가 탄생한 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현대 스포츠 같은 활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계급사회 이전에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서로 협동해야 했다. 육체 활동은 노동 과정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 현실이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제물 바치기를 포함한 종교 의식, 경쟁 도시 국가들로 구성된 그리스의 특성을 반영한 ‘선수들’ 간 군사적 경쟁 등이 열렸다. 고대 올림픽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스포츠와는 완전히 달랐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수세기 동안 공놀이가 행해졌지만, 그것은 스포츠가 아니라 불교 의식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일종의 군사 훈련으로 라크로스[양 팀 10명씩 하는 하키 비슷한 구기] ‘경기’를 했다.

이런 행사들과 축구나 럭비 같은 현대 스포츠 경기 사이에는 뚜렷한 연관성이 없다.

축구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기로 꼽힌다. 축구는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대중 경기로 탄생했다.

작업장의 규칙이 축구장에도 반영됐다. 경기 시간이 명확하게 정해졌고 정교한 시계 덕분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팀에 노동분업이 도입되면서 특정한 포지션과 기술이 생겼다. 승자와 패자의 구분은 더는 애매해서는 안 되고 뚜렷하고 확실하고 절대적이어야 했다. 스포츠에 위계제가 도입됐다.

경쟁은 자본주의의 핵심이고 모든 종류의 인간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사랑, 놀이와 모든 사회관계에도 말이다. 스포츠는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경쟁 없는 스포츠는 형용 모순이다. 스포츠는 기계, 시계와 인위적 규칙들에 인간 노동이 종속되는 현상을 반영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스포츠는 일등이 되는 것, 상대방을 이기는 것, 새로운 기록을 세워 무조건 다른 이보다 앞서는 것을 뜻하는 활동이 됐다. 훈련은 스포츠판 ‘중노동’이 됐고 갈수록 비인간적인 것이 됐다.

흔히 스포츠 활동을 하는 남성과 여성은 자유롭고 동등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런 사고에 따르면 그들은 동등하게 경쟁하고 그 결과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의 주인공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한 ‘자수성가형’ 남성과 여성이다. 여기에 누구나 열심히 하면 정상에 설 수 있다는 교훈이 뒤따른다. 현실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프로 축구선수가 된 10대들이 반드시 ‘최고’이거나 가장 재능있는 선수들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종종 엄격한 규율과 힘든 훈련을 감내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몸을 망가뜨릴 준비가 가장 잘 돼 있는 사람들이다. 운동선수들이 자연적·육체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면서 약물 사용도 흔한 일이 된다.

[스포츠에서] 육체 활동은 놀이나 즐거움과는 동떨어진 것이 된다. 올림픽 게임에 ‘놀이’는 없다. 놀기 위해 올림픽에 출전한 사람은 없다. 오로지 경쟁하고 이기기 위해 출전한 것이다.

제국주의

민족주의는 스포츠의 핵심 요소이며 올림픽에서도 월드컵만큼 기승을 부린다. 사실 스포츠는 제국주의의 도구로 사용돼 왔다.

트리니다드 마르크스주의자 C L R 제임스는 영국령 서인도에서 크리켓이 식민 통치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서 한 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독일에서 체조가 발달한 것도 청년들을 군사적으로 훈련시키려는 의식적 노력의 일부였다. 피에르 쿠베르탱이 현대 올림픽 경기를 고안해 냈는데,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스포츠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스포츠는 삶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소개됐고,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여겼다. 이것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현실과 대립되는 ‘여가 시간’이 하는 구실을 봐야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우리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노동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고 우리 삶을 지배하고 아무런 성취감도 느낄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시간과 비노동 시간은 날카롭게 그리고 적대적으로 분리된다. 우리는 ‘자유 시간’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자유 시간’은 자유롭지 않다. 우리의 ‘자유 시간’은 시장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스포츠는 자본주의의 산물로 그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편견과 제약에 의해 영향받는다. 스포츠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삶을 통제하고 우리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세계라면 우리는 독서하고, 집을 짓고, 식물을 기르는 것처럼 바다에서 수영하고 산을 등반하는 것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육체 활동은 경쟁의 제약에서 해방될 것이다.

인간해방은 22명이 축구 경기하는 것을 5만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것도 모자라 수백만 명이 TV로 시청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이 미친 듯이 경쟁적으로 수영장을 왕복하는 것도 필요없다.

육체적 휴식과 놀이는 육체적 즐거움, 동료애와 자연 환경을 즐기기 위한 것이 돼야 한다. 스포츠는 그렇지 못하다.

스포츠는 경쟁이고 독단적인 규칙들에 복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이상적인 준비 과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