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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용어화 논쟁에 대한 비판적 고찰

영어 공용어화 논쟁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기웅 -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노어노문학과 교수

우리 사회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직장인들이 영어를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고 있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물론 억압적인 현실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적절한 영어 구사 능력은 입학, 졸업, 유학, 취업, 승진, 그리고 심지어 개인의 인터넷 사용에 있어서까지도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영어 공부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들 중 대다수의 경우에는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러운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한 데는 잘못된 교육이나 학습 방법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라는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통상 어느 정도 적절한 외국어 구사 능력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평균적으로 3000시간 정도의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한데, 비단 영어뿐만 아니라 어떠한 다른 외국어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의 현재 여건에서는 이것을 제대로 담당할 수 있는 공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이상과 같은 사회적 상황 속에서, 소설가 복거일이 내놓은 과격한 주장, 즉 영어를 한국어와 더불어 공용어로 채택하고 장차 가능한 상황이 되면 모국어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에 대한 언어 민족주의 진영으로부터의 격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심정적 동조를 얻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1998년 7월 영어 공용어화에 대한 1차 논쟁 당시 조선일보가 실시한 인터넷 찬반 투표에서 찬성하는 의견이 45%였으며, 1999년 11월 교육방송(EBS)에서의 토론 후 시청자 여론 조사에서는 62%가 찬성하는 의견이었다. 이러한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결국, 영어를 장차 모국어로 채택할 수도 있다는 복거일의 주장이 과격하다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영어를 공용어화함으로써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 사회에서는 영어를 잘 하는 것이 거의 강제적인 필수 사항이며, 더구나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훨씬 더 유용한 언어인 이상,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더 많아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거라는 소박한 생각도 많이들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소박한 생각을 단순히 민족주의적 입장에 근거해서 옳지 않은 것으로 단정짓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18-19세기의 서구 민족주의 사상가들이 내세우던 핵심 명제 중의 하나인 “언어는 민족혼이다”라는 주장은 이미 현실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 사회의 동질성의 근간을 이루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동일한 민족어의 공유라는 막연한 일반적인 생각 또한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사회의 경계와 언어 공동체의 경계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한 동일한 언어 공동체 내에서도 계층적, 정치적, 지역적, 성적... 차별화들이 복합적으로 결합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어라는 민족어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정체성과 어떤 필연적 연관관계를 갖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한국어가 우리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에게는 모국어이며 또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자발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의사소통 및 표상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 이상의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한국어가 “우리 민족의 얼”이며 내재적 가치라는 형이상학적 믿음에 근거해서 영어 공용어화론을 반박하는 것은 해당 사안에 대한 정서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태도 표명은 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유효한 비판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어 공용어화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한국어가 우리 사회에서 기능하고 있는 보편적 의사소통 및 표상 수단으로서의 독점적 지위에 대한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에는 일면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우리가 처한 사회의 실제 현실인 것이다.

그렇지만 영어 공용어화를 주장하는 입장은 그것이 표명하는 일견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잘못된 현실에 대한 대단히 무책임하고 비과학적인 반응임에는 틀림없다. 이 점을 우리는 크게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으로 나누어서 아래와 같이 비판적으로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사회-언어학적으로 볼 때, 한 사회 내에서 상이한 두 언어 사이의 언어적 간섭은 사회적으로 강한 언어가 약한 언어를 밀어내는 방향으로 일어나면서, 그와 동시에 밀려나는 약한 언어는 그것이 기층 언어일 경우에는 강한 언어의 음성-음운-억양 구조나 문법 및 어휘 구조에 광범위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만일 한국어와 더불어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할 경우 그리고 영어가 점차로 사회적으로 강한 언어의 지위를 점유하게 될 경우, 공적인 영역에서 한국어는 점차로 밀려나게 되겠지만 그와 더불어 영어 또한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는 한국식 영어가 될 것이다 (아마도 행정, 금융, 상업 등의 영역의 하급 기관에서는 피진 잉글리쉬(Pidgin English)와 같은 유형의 흥미로운 새로운 혼합어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국식 영어는 여전히 국제무대나 상급 기관에서는 차별을 받을 테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누가 미국식 혹은 영국식 영어를 잘 하느냐에 따른 차별화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심리-언어학적 차원에서, 언어와 사고의 발달 사이의 상관관계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두되 구조 속에서 언어와 사고는 발생론적으로는 별개의 것이다. 즉, 우리의 뇌에서 사고의 기능을 담당하는 부분과 언어의 기능을 담당하는 부분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처음에는 사고의 발달 과정과 언어의 발달 과정이 독자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생후 2년이 좀 지나면서 이 두 과정은 서로 만나게 되고, 비로소 언어적 사고라는 것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가 되면 어린 아이는 두 단어짜리 문장들을 구사하게 되며, 만 3살이 되면 1000 단어 정도의 어휘와 성인 언어의 기본적인 문법적 문형들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통상 어린 아이의 언어 습득과 사고의 형성에 있어서 만 3살까지의 시기가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까지의 어린 아이의 성장 과정의 특징은 사고의 발달이 언어의 발달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언어의 발달이 사고의 발달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는 지각적 이미지들이나 생각들의 연결 방법보다는 단어들의 연결 방법을 먼저 숙달하며, 따라서 그의 언어적 사고의 발달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먼저 습득한 언어적 틀과 자신이 겪는 사회-문화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심리-언어학적인 관찰을 바탕으로, 우리는 한국어 더불어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는 이중언어 사회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의 성장 과정을 상상해보자. 이 경우, 어떤 아이들은 두 개의 언어를 제대로 다 구사하면서 정상적인 사고의 발달 과정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두 개의 언어 모두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사고의 발달에 장애를 보이는 아이들도 많이 생겨날 것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상황과 한국어를 사용하는 상황이 어린 아이에게 명확히 다르게 인지되는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두 언어의 습득이나 “언어 사용에 있어서의 적절한 전환”(code-switching) 능력의 습득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사고의 발달도 제대로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언어적 장애와 사고 발달의 장애를 겪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실제로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가정이나 사회적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 중에는 두 언어를 모두 제대로 습득하는 경우들도 많지만, 두 개의 언어의 혼동으로 인해서 “이해하기 힘든 기묘한 개인적 언어”(idioglossia)를 구사하거나 언어적 장애를 겪는 경우들도 종종 발견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영어 공용어화론을 공공연하게 내세우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이나 태어난 아이들에게 얼마나 무모한 실험을 펼치려 하는지 그 사회적 무책임성에 실로 아연할 따름이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영어 공용어화의 문제를 놓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이나 토론이 찬성하는 편이나 반대하는 편 모두 그 이론적 토대가 대단히 취약하고 허구적인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물론 필자 자신도 결과적으로는 반대하는 편에 선 셈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막연히 민족주의적인 대중적 정서나 맹목적인 언어 민족주의의 관점에 입각해서 현실의 문제를 재단하는 것이 대중 각자가 실제로 현실에서 겪고 있는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논쟁의 이론적 근거와 내용이 양편 모두 실제적으로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영어 공용어화론의 실천적 귀결에 대중 각자가 찬반으로 나뉘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영어가 갖는 언어적 영향력의 중압감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 각자에게 억압적으로 강제되는 현실적 문제가 사회적 차원에서 민주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개개인에게 고통과 부담으로 전가될 경우에 대중들은 문제 해결을 자처하는 잘못된 주장이나 위험한 주장에도 급진적인 관심을 표명할 수 있는데, 영어 공용어화의 문제 또한 이러한 잘못된 상황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어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만일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을 정말로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결국 교육을 통해서 해결할 수밖에는 없다. 이럴 경우, 우리는 영어를 공용어화하지 않고도 좋은 교육적 성과를 내고 있는 네덜란드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과 같은 나라들의 경험을 참고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과 병행해서, 영어 구사 능력을 지금처럼 개인의 능력에 대한 중요한 평가 척도로 규정하고 있는 광범위한 제도적 관습과 억압을 철폐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아무리 좋은 교육도 자본주의 체제가 제도화된 교육에 덧씌우고 있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개인들 간의 선택과 차별화 및 불평등의 지속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시녀 역할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 능력이란 근본적으로 사회 내에서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한 외국어의 구사 능력이 이러한 본질적 기능과는 별개로 개인들 간의 경쟁을 억압적으로 부추기는 제도적 폭력으로 확산·심화되는 사회 체제가 과연 유지되고 존속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실로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