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마르크스주의와 언어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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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이기웅 교수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 후속편을 싣는다. 이기웅 교수는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러시아어 언어철학을 전공했다. 필자는 최근 ‘다함께’가 주최한 맑시즘2008에서 같은 주제로 연설한 바 있다.
지난 호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데올로기와 언어의 밀접한 연관성을 시종일관 강조하면서 언어 현상을 발화
1)
2)
위의 내용에서, 터무니없이 사변적인 2)
그러나 주장 1)
그리고 역사적으로, 언어의 변화는 직접적으로 사회의 발전 단계에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의 내부적 요인들과 그것을 둘러싼 여러 가지 외부적 요인들
일반적 소통 수단으로서의 언어
볼로쉬노프의 저작이 갖는 이론적 장점 중의 하나는 이러한 언어적 사실들을 결코 왜곡하거나 단순화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는 언어를 가장 뛰어난 이데올로기적 현상이라고 규정할 때, 언어 자체가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중립적이라는 사실 또한 이야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이러한 신중한 태도가 의미하는 바는 언어가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서는 상부구조에 속하지만, 중립적인 것으로서는 사회 전체에 속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언어의 경계가 계급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확히 한다. 실제로 동일한 언어 공동체 내에서 상이한 계급들은 동일한 기호 체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중립적인 그리고 공동체적인 성격에 대한 볼로쉬노프의 이러한 사실적 지적들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마르주의에 대한 후견인 구실에 싫증을 내고 이제 스스로 언어학자를 자처하게 되는 1950년의 스탈린의 태도와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일까?
1934년 마르가 사망한 후에도 추종자들에 의해서 여전히 그의 학설이 위세를 떨치던 시기에, 갑작스럽게 1950년 5월 9일부터 7월 4일 사이에
1)
2)
이번에는 스탈린의 위와 같은 주장은 언뜻 상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이면에는, 2)
곰곰이 잘 따져 보면, 스탈린이 주장하는 1)
스탈린 언어학의 문제점
그것은 우선 앞서 말했듯이, 언어를 단순히 기계적 유물론에 입각해서 도식화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주의의 촉구이자, 언어란 동일한 언어 공동체의 상이한 구성원들이 서로간의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그리고 그 자체로 고유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기호 체계라는 자명한 사실에 대한 재확인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 확인과 더불어 볼로쉬노프가 제기하는 문제틀은 스탈린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 동일한 언어 체계를 다양한 개인들이나 상이한 집단들, 계층들, 계급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강조돼야 할 것은 민족어나 사회적 공통어의 단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발화 주체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대립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언어 기호를 사용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를 투영해야 하기에, 상이한 발화 주체들은 개인적이든 계급적이든 간에 어쩔 수 없이 첨예한 모순적인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언어 기호의 이데올로기적 사용과 그 효과에 있어서, 즉 발화의 층위와 담론 형성의 층위에서, 물질적 억압과 착취, 잉여가치의 획득을 위한 경쟁 등을 반영하는 상이한 이데올로기적인 목소리들은 필연적으로 상충적일 수밖에 없다.
언어에 대한 볼로쉬노프의 이상과 같은 문제틀은 확실히 우리가 지난 번 글의 서두에서 밝혔던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이론적, 실천적 함의는 역설적이게도 기계적 유물론이나 스탈린주의의 폐해가 역사적으로 판명된 오늘날에 와서 우리에게 더욱더 풍부하게 와 닿는다.
사실, 언어적 소통에서 화자와 청자 혹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는 현대의 여러 가지 이론적 모형들에서 추상적으로 상정되고 있듯이 그렇게 상호대칭적인 것도 평등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많은 경우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반영하는 지배나 억압의 관계들이 투영돼 있다.
만일 언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심이 이러한 것들로부터 나오는 이데올로기적 기만과 편견의 극복, 교묘하든 노골적이든 상징적 조작으로 점철된 권위적 담론에 근거하는 억압적 질서의 전복과 새로운 사회의 기획, 그리고 개성의 투명하고도 풍부한 소통적 발현을 지향한다면, 볼로쉬노프의 지적 노력은 이것을 위한 실로 유효한 실천적·이론적 첫걸음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