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웅 교수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 기고문은 명쾌하고 흥미롭고 신선한 자극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감히 한두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볼로쉬노프의 출발점은 언어가 ‘개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사회’ 현상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소쉬르와 달리 언어의 가변성을 강조했다. 구조주의자 소쉬르는 언어를 고정 불변의 법칙들의 체계로 봤다. 물론 볼로쉬노프도 언어에 어느 정도 안정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언어의 유동성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가령 처음에 ‘진보’라는 용어가 소심한 온건 좌파 지도자들이 ‘좌파’라는 말의 대용어로 수세적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했다 해도, 그들과 주류 언론·정당이 ‘진보’라는 말을 ‘사회민주주의’의 대용어로 사용하는 게 보편화된다면, ‘진보’는 좌파 일반이 아니라 단지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주의만을 가리키게 될 것이고,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주의 왼쪽의 진정한 좌파들은 ‘진보’라는 말의 사용에 신중하게 될 것이다.

언어의 유동성 문제는 계급의식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큰 함의를 갖는다. 언어가 의식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일진대 만일 언어가 고정 불변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면 계급의식도 가변적이라는 뜻이 된다.

볼로쉬노프가 언어의 유동성과 가변성을 강조했다 해서 그를 포스트구조주의의 언어 이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는 낱말 의미의 불안정성을 단연 강조했다. 포스트구조주의자의 논의 속에서 언어는 안정성이 무시되고 의미가 파괴돼 버렸다. 그러다 보니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언어 이론 자체가 무의미해져 버렸다. 가령 아무리 ‘민족’이라는 말의 뜻이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해도 어떤 쓰임새에서든 민족 담론은 계급과 계급투쟁의 현실을 은폐하는 구실을 한다.

볼로쉬노프의 《언어와 이데올로기》는 스탈린주의와 학술주의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사상을 혼란시킨 루이 알튀세르의 유산을 청산하고 루카치 이래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철학적 전통을 재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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