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경제 위기에 맞서 싸운 전 세계 노동자 투쟁의 사례와 교훈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번이 그 두 번째다

1945~1970년대 초반까지 약 30년 간은 자본주의 역사상 최장의 호황기였다. 특히 연평균 임금성장률은 전쟁 전과 비교해 거의 두 배나 높았고 각종 복지 정책이 도입된 유럽에서는 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주장하는 것이 쓸데없고, 자본주의 틀 내에서 경제 성장과 복지를 한꺼번에 성취할 수 있다는 개혁주의 이상이 실현되는 듯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짧은 파업으로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따낼 수 있었고 생활수준의 지속적 향상에 따라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윤율이 정점에 도달한 후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자본가들은 작업 속도 가속화, 임금 인상 억제 등 노동자 착취를 강화하려 했고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양보를 따내는 것이 조금씩 어려워졌다.

그래서 때때로 노동자들의 불만은 개별 작업장 수준을 넘어 폭발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노동자들이 1968년 폭발한 학생 투쟁을 지지했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는 파시스트 독재에 항거하는 운동에 노동계급이 참가했다. 영국에서는 1972년 광부들의 대규모 파업으로 2년 뒤보수당 정부가 실각하고 노동당이 당선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운동의 방향

1973년 석유 파동이 방아쇠가 돼 불황이 본격화했을 때, 이런 과정을 통해 축적된 기층 노동자들의 자신감은 투쟁을 전진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실제로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상당한 양보를 얻어 냈고 불황의 파괴적 효과를 완화시킬 수 있었다. 특히 노동자 투쟁이 군사 독재 정권을 끝장내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던 포르투갈에서 노동자들은 경기 후퇴가 가장 심각했던 1973년∼75년에 대대적 임금 인상을 따냈다. 그래서 임금소득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72년 52퍼센트에서 1975년 69퍼센트로 껑충 뛰었다. 비슷한 시기 파시스트 독재를 무너뜨린 스페인에서도 복지 제도 확충과 부유세 확대를 약속받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노동자 투쟁이 주류 정치 체제를 뒤흔들면서 주택 임대료가 대폭 인하되고 낙태와 이혼이 합법화됐다. 이런 투쟁들은 불황의 시기에도 기층 노동자들이 주도권을 발휘해 단호히 싸우면 얼마든지 양보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아쉽게도 궁극적으로 투쟁의 방향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사민당(사회당) 등 개혁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국가가 케인스주의 정책을 도입하고 노동자들이 잠시 양보하면 자본가들이 투자를 늘려 호황이 곧 재개될 거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그러나 1973년 시작된 불황은 계속됐다. 1974~1976년에는 심각한 경기후퇴가 찾아왔고 1976∼1979년 사이 일부 제3세계 국가의 고도성장 덕분에 경기가 조금 되살아나는 듯했지만 1980년 이후 미국의 이자율 급등과 제3세계 외채위기가 발생하면서 다시 한 번 심각한 경기 후퇴가 찾아왔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패닉상태에 빠졌고 나중에 신자유주의로 불리게 될 시장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예컨대 1981년 당선된 프랑스의 미테랑 사회당 정부는 처음에는 각종 케인스주의 정책을 도입했지만 민간 자본가 투자 활동이 재개되지 않고 수입만 늘어 국제수지 적자가 확대되자 이내 급진적 긴축 정책을 취했고 노동자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요구했다.

당시 기층 노동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경제 위기의 책임을 지배자들에게 묻고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일관되게 방어하기 위한 명확한 정치적 방향이었다. 당연히 지배자들과 타협해 ‘경제 살리기’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기층 투쟁을 고무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투적 노동자들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각 나라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이런 과업을 방기했다. 예컨대 이탈리아와 스페인 공산당은 1970년대 말 주류 자본가 정당과의 타협과 ‘국가 경쟁력 향상을 위해’ 노동자가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구조조정을 받아들이는 ‘역사적 타협’ 노선을 추구했다.

그들은 파시스트와 우익의 반동을 막기 위한 ‘헤게모니 블록’을 결성한다는 미명 아래 이런 정책을 정당화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긴축 정책으로 경제 위기의 파국적 효과가 심각해지면서 극우파의 영향력이 커졌을 뿐이다.

일부 혁명적 좌파들은 개혁주의 지도부의 한계에 도전하는 기층 노동자 운동을 건설하려 했다. 이탈리아에서 여러 변혁 조직들과 영국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시도가 대표적이었다. 이탈리아 변혁적 사회주의 조직들은 한 때 수십만 명의 전투적인 현장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을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참을성 있게 공산당 지지 노동자들에게 접근하려는 노력을 포기했고 영향력 확대에 제동이 걸리자 일부는 테러 행동에 나섰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기층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조직하는 공동전선 운동인 ‘현장 조합원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추세를 역전시키기에 SWP의 규모가 너무 작았다.

당시 운동이 개혁주의 지도부를 뛰어넘지 못하면서 노동자들의 전투성은 조금씩 잠식됐고, 경제 위기가 갈수록 심화하자 빠른 속도로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 노동자들은 전후 호황의 성과들 중 많은 것들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노동자 투쟁이 거둔 성과가 보여 줬듯이 패배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어떤 정치가 운동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느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