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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돌아보게 하는 책들

촛불 항쟁은 1퍼센트 특권층 정부와, 인간보다 기업 이윤을 우선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대중적 저항이었다.

촛불 운동은 그 거대함만큼이나 많은 평가와 논쟁을 낳았다. 그리고 그 논쟁의 일부가 몇 권의 책으로 출판돼 나오고 있다.

운동의 쟁점에 대한 논쟁적 글들이 《촛불이 민주주의다》 (해피스토리, 이하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메이데이, 이하 《민주공화국》)로 나왔다.

다음 아고라의 초기 글 모음집인 《대한민국 상식사전 아고라》(여우와 두루미, 이하 《아고라》)와 《촛불 ─ 그 65일의 기록》(경향신문사)은 촛불의 초기 전개 과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

촛불의 배경과 성과

다음 아고라는 저항 여론 성장의 초기 매개체였다. 그곳에서 4.15 학교 자율화 조처, 쇠고기 협상의 문제점 등이 토론됐다. ‘촛불소녀’로 상징되는 청소년들의 주도력이 특히 두드러졌다. 여기에 20대 청년들이 가세하며 촛불은 젊음과 활력, 패기와 풍자로 넘쳐났다.

“저 아직 15년밖에 못 살았어요”, “그저 돈이면 다 됩니다. 돈이 최고죠.”(《아고라》)

취약한 복지와 고용 불안의 시대에 성장기를 거치며 “불안한 미래”를 강요당하는 세대에게 ‘미래의 병 ─ 광우병’은 자신들의 미래를 바라보는 하나의 망원경이 됐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 결과로 나타난 경제와 사회의 양극화로 인해 배제되고 주변화된 사람들의 분노”(박원석, 《민주주의》)가 촛불의 배경이었다는 분석은 일리 있다.

이처럼 촛불 운동의 등장과 전개가 아무리 극적이어도 주요한 요구들을 쟁취하지 못했다는 쓰라린 평가도 있다.

그러나 촛불 운동은 반정부 정치투쟁이었고 따라서 정치적 효과라는 맥락에서 평가돼야 한다.

“촛불 항쟁”은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기사로 넘쳐나야 할 시점에서 신문과 방송을 점령해 버렸”고, “대운하를 포함해서 이명박 정부의 핵심 공약을 좌절시켜 버렸다.” 결국, “3개월 된 … 정부의 지지율을 20퍼센트 아래로 끌어내려 버렸다.” (정대화, 《민주주의》)

정권 퇴진과 정치적 방향 제시

‘헌법 제1조’를 주제가로 삼았던 촛불에게 “누구의 정부냐”, “대안적 정치세력은 누구냐” 하는 물음은 실질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정권 퇴진’이라는 과제가 제기됐다.

6월 10일 1백만 명이 거리로 나선 후에는 정권 퇴진 요구에 걸맞은 투쟁을 건설하고 정치 대안을 내놓는 게 필요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의 필자들은 이 쟁점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최장집 교수는 운동이 정권 퇴진으로 발전하던 6월에, ‘거리’ 정치에서 ‘제도’ 정치로 전망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민주주의》 필자들인 이남주, 정대화는 최장집을 비판하면서 ‘거리 정치와 제도권 정치의 결합’을 얘기하지만, 그 대안은 ‘거리 정치의 제도화’에 머문다. 이재영은 아직 진보정당이 제도권(의회)에서 이 운동을 대변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 운동”을 강조한다. 이병천은 실현 불가능성을 이유로 ‘정권 퇴진’ 슬로건을 기각한다.

《민주주의》의 필자들이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당시 필요했던 ‘정권 퇴진’ 투쟁 건설의 과제를 회피한다면, 《민주공화국》의 주요 필자들은 자율주의의 관점에서 그런 듯하다. 예를 들어 이광일은 “국가는 … 어느 경우에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정권 퇴진 논의를 회피한다.

“유목민” “다중” 또는 “집단지성”(박영균,《민주공화국》)의 자유로운 유목과 활동력만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촛불은 거듭거듭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 서 왔다. 민주적 토론을 통해 전략적 지도력을 구축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커져 왔다. 따라서 박영균처럼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하려는 노력 자체를 배격하는 것이야말로 촛불의 잠재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오히려, 상호 대화 속에서 효과적 저항 방법을 제시해야 할 좌파의 구실이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필요했으나 “실종된 고리”였던 ‘조직 노동자들의 파업 건설’ 문제에 대해 유일하게 공공노조 김동성 부위원장의 글(《민주공화국》)이 아쉬움을 조금 메우고 있다.